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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정 10년의 회고 : 문화예술>
다사다난했던 문화 예술계
부산예총회장․동아대 교수 최 상 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부산의 문화예술계에 있었던 일화들의 기록을 청탁받고서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그 뒷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특히 2002년에 부산은 아시안게임, 월드컵경기, 세계합창올립픽대회, 아․태장애인체육대회 등 자그마치 33개의 국제대회를 치루었다. 그러다보니 그 이면에 정사로서 기록할 수 없는 이면사가 많았다. 그러나 지면 관계로 모두 언급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특히 부산국제락페스티벌, 부산비엔날레, 부산바다축제 등에 얽힌 자료를 충분히 준비해 두고도 빠뜨리게 된 것이 아쉬웠다. 그리고 필자가 과문한 탓으로 다른 대회나 행사의 일화를 본의 아니게 언급하지 못한 점을 관계인들께서 양해해 주시기를 바라며 다음 몇 가지만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1. 부산시립극단 창단의 뒷이야기
400만 부산시민의 예술문화 향유 척도를 가늠할 수 있고 행정관서의 예술문화에 대한 육성의지를 파악할 수 있는 관립 예술단의 운영은 그 지역 예술인들에게는 매우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부산시립교향악단, 부산시립무용단, 부산시립합창단, 소년소녀합창단,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의 창단에 이어 부산연극인들의 숙원 사업이었던 부산시립극단이 창단된 것은 1998년 1월 23일로 부산연극사에 큰 획을 긋는 빅 이벤트였다. 그러나 이런 쾌거 뒤에는 몇 사람의 헌신적인 노력과 애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마도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리라. 묻혀진 뒷 이야기를 주섬주섬 긁어모으는 의도는 차후에라도 공을 세운 그 분들의 뜻이 왜곡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오래도록 연극계 뒷이야기 속에 회자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이다. 부산시립극단이 창단 되기를 희망하는 소리는 여타의 다른 장르 시립단체가 생겨날 때마다 또는 연극협회의 집행부가 바뀔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하던 소망이었다. 민선시대 1기 문정수 시장의 공약사항 어디쯤인가에 부산시립극단의 창단이 거론되면서 시립극단 창단의 행정적 분위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당시 부산연극협회장이던 김경화는 지금이 시립극단이 창단될 수 있는 호기임을 예측하고 당시 부산예총 회장이던 김동규 교수와 협의를 했다. 김동규 교수야말로 직전 부산연극협회장을 지냈던 터라 여러가지 분위기 조성을 위해 힘을 보태는데 서슴지 않았고 주도적인 역할을 자임했다. 시립극단 창단 1년 전인 1997년은 부산아시안게임을 치루기 위한 전초로 부산동아시아경기대회를 치루는 해였고 이 행사를 경축하는 의미로 제15회 전국연극제를 부산으로 유치하여 연극예술에 대한 대 시민 이미지를 강화시키고자 했다. 제1회 전국연극제를 출발시켰던 부산에서 다시 한번 한국 지역연극의 모습과 활동 상황을 시민들이 보게 된다면 시립극단 창단에 큰 몫을 담당할 수 있으리란 계산 속에서 부산연극협회 임원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유치활동을 펼쳤다. 당시 몇 개 도시가 경합을 했지만 한국연극협회의 정진수 이사장은 부산 쪽으로 지원을 약속했다. 다만 부산의 현재 집행부가 연극제 집행예산도 증액시키고 나아가 시립극단을 만드는 초석을 다질 수 있는 행사로 만들기를 약속하고.... 그러나 이런 분위기 조성 정도는 그 전에도 많이 있었으므로 좀 더 강력한 분위기 조성이 필요했다. 당시 부산연극협회장이던 김경화씨는 길을 가다가 평소에 친분이 있는 부산시보사 문화환경분과 시의원인 진영태 시의원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게 된다. “아이구, 진의원님 오랜만입니다.” “김 선배님 요즘도 연극 활동 열심히 하시죠·” “예 덕분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안 바쁘시면 저희 사무실에 가서 차 한 잔하고 가시죠” 김회장은 진의원을 따라 서면교차로 부근에 있는 그의 개인 사무실에 가게 된다. 진영태 의원은 남구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개인 사업을 하고 있었고 김회장과는 중학교 선후배간이었다. 라면 먹으며 연극예술 한답시고 좌충우돌할 때 진의원이 간혹 김회장의 공연을 위해 작은 도움을 주고 있던 터였다. 시인이기도 한 진의원의 이런 마음이 부산시립극단을 창단시키는 큰 힘으로 작용되었다. 그 다음날 연극협회 김회장은 김동규 예총회장을 찾아가서 진의원과의 대화 내용을 전달하고 진의원과의 부산시립극단 창단을 위한 만남이 서면 공구상 골목의 한 식당에서 이루어지고 여기서 창단을 위한 심도있는 협의를 하게 된다. 김동규 예총회장은 부산시장과 담당국장, 과장을 만날 때마다 시립극단 창단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역설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어느 날 김동규 예총회장이 쇠뿔은 단김에 빼야 된다 싶어 문시장과 단판을 짓기 위해 바쁜 일정을 피해 새벽에 시장댁을 방문했다. “김회장 아침부터 어쩐 일이요·” “시장님 일정이 빈틈이 없어 새벽에 방문했습니다” “잘 되었소. 오늘이 내 생일인데 몇 분 초청할까 하다가 번잡스럽기도 해서 그만두고 혼자서 미역국 먹기로 했는데 마침 잘 왔소.” 하며 아주 반가히 맞아 주어 분위기가 밝았다. 겸상을 하면서 이때다 싶어 김회장은 시립극단 창단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분위기 탓인지 문시장도 쾌히 승낙을 했다. 한편으로 진의원은 그 동안 시립극단 창단을 주창하였던 여러가지 문서를 통해서 시의회의 공감대 형성에 나선다. 시립극단 창단의 분위기가 서서히 조성되어가자 문화계 일각에서는 시립극단과 함께 시립 오페라단의 창단도 이루어져야한다는 의견이 나와 창단을 위해 노력했던 연극협회는 긴장감을 가지게 된다. 부산시의 사정으로는 시립예술단 2개를 동시에 발족시킬 여유가 없음으로 자칫 무르익은 시립극단 창단 분위기가 식을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행정이란 때로 형평성을 내세워 양쪽 힘의 균형이 상충하면 양쪽 모두를 포기시켜 여론의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을 사용하므로 이를 아는 사람들은 극단 창단이 수포로 돌아갈까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의회의 예산승인과 조례 안이 통과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안심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럴 때 또 하나의 문제가 돌출된다. 창단 초기의 지도체제를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이다. 기존의 예술단과 같이 1인 상임체제로 하느냐. 어떻게 선출하여 맡기느냐 하는 민감한 문제였다. 시립예술단 관리부서인 문화회관에서 여론 수렴에 나섰고 부산연극협회는 집단지도체제로 3~4인의 예술감독위원회를 만들어 초기 2년을 시험 운영하는 안을 내놓았다. 일각에서는 시립극단의 초기 방향정립과 성격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1인의 수석연출자가 맡아야 한다는 안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방향성을 논의하고 초기인선의 잡음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예술감독위원회 제도를 초기 2년만 한시적으로 시행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1997년 가을은 부산연극사에 있어 경사스런 날이 된다. 부산시립극단의 창단이 문시장의 결단과 시의회의 노력으로 이렇게 되기까지는 김동규 부산 예총회장과 김경화 부산 연극협회회장의 숨은 노력의 결실임을 밝혀둔다.
2. 짧은시간, 높은 정상에 오른 부산국제영화제
서울에서는 흔히 중앙과 지방의 이분법으로 구분하지만 부산 시민은 나름대로 바다와 강 그리고 산을 낀 천혜의 자원을 가진 도시 부산에 남다른 자긍심을 지니고 있다. 부산의 자긍심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단시일내 아시아에서 성공적인 영화제로 급부상한 부산국제영화제를 들 수 있다. 이 영화제가 이렇게 빨리 위상을 정립한데에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일선에서 활동했던 관계자들의 인내와 고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성공적인 문화행사는 거의가 서울에서 이루어지는데 영화제만은 부산에서 성공하고 있는 이유가 영화제 쪽의 인적자원이 적재적소에 적절하게 모여 있었던 때문이 아닐까. 서울이나 광주에서도 얘기가 있었지만 영화제가 성사되지 않은 이유는 서울에는 전문가적인 사공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며, 광주 쪽은 역으로 사공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는 우스개도 있다. 부산이란 지역에 영화의 인적자원이 그리 넉넉지 않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하지만 지금 중앙대에 있는 이용관 교수, 80년대 후반에 런던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귀국한 프로그래머 전양준, 부산 시네마테크와 프랑스 문화원에서 활동했던 김지석 등 영화제를 위한 정수 중의 정수들이 부산에 있었다. 이들은 이때 <영화 언어>라는 계간지를 발간하고 있었는데 ’95년경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영화제를 한다면 5억 정도의 스폰서가 돼 줄 의향이 있다기에 이들의 영화제를 향한 꿈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호텔에서 꿈꾸는 영화제와 이들의 영화제를 향한 현실은 동상이몽으로 부득이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현 김동호 집행위원장과 김지석, 오석근 등이 부산시를 상대로 노력한 결과 행정적 지원과 재정적 지원으로 3억원을 약속 받았는데 첫해 예산이 종자돈보다 7배가 많은 21억이었다니 이들이 예산확보를 위해 동분서주 남몰래 흘린 땀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제1회 영화제 때 시에서는 아시안위크를 개최하기로 했는데 공교롭게도 날짜가 영화제와 겹쳤다.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낮에는 아시안위크, 밤에는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를 개막했는데 영화제를 아시안위크의 부대행사쯤으로 여긴 몇몇 공무원들의 예상과는 달리 아예 주객이 전도되어 영화제는 처음부터 시민들을 매료시켰다.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는 이제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아시아를 넘어 국제적으로 떴다. 부산국제영화제의 괄목할 성장은 어느 도시나 탐을 내겠지만 부산국제영화제가 성공한 요인으로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즉 이들은 실패한 국제영화제와 성공한 국제영화제의 원인분석을 철저히 함과 동시에 성공한 영화제의 벤치마킹을 많이 하는 전략을 잘 짰다는 것이다. 경쟁영화제는 ABC 등급끼리는 서로 소통 초청을 하지 않지만 비경쟁영화제는 등급의 구분없이 초청할 수 있기에 부산국제영화제는 비경쟁영화제를 채택함으로써 늦게 시작했지만 좋은 작품 확보에 무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부산국제영화제는 비경쟁영화제로 세 가지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아시아영화, 신인감독, 산업화와 연관된 영화제로 PPP(부산 프로모션 플랜)를 통해 우수한 감독발굴, 작품제작 지원 등을 도입했다. 하지만 벤치마킹을 한다고 해서 누구나 잘했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그 예로 이웃한 도쿄영화제를 들 수 있다. 도쿄영화제에서는 일류인 깐느영화제를 표방하여 필름마켓을 시도했다. 필름마켓은 필름을 사고 파는 것으로 깐느, 아메리칸, 밀라노의 세계3대 필름마켓에서 거래는 거의 성사되기에 도쿄영화제의 필름마켓은 사고 파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빈껍질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벤치마킹 잘못해서 쫄딱 망한 쉬운 예로 도쿄영화제의 필름마켓을 들 수 있다. 둘째, 예산을 지원해 준 부산시의 운영예산, 인적자원 등에 대한 간섭을 처음부터 철두철미 배제시켰기에 우리 사회의 병폐인 전문가의 말을 듣지 않다가 망하는 위험성을 애당초 제거해버린 것이 그 두 번째 이유일 것이다. 셋째, 관객들의 다양한 욕구에 반응하고 반영시키며 시민들의 관심과 애정을 유도했다. 외환위기시에 영화제가 어렵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60대의 한 부인이 영화제 사무실에 찾아와 십만원을 봉투에 넣어 가지고 영화제를 위해 써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으니 이런 일반 시민들의 관심과 애정이 성공의 요인이 아니겠는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국제영화제를 하다보니 무엇보다 일선에서 발로 뛰어다녀야 하는 이들은 모든 면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가적 정신과 ‘하면 된다’는 무지막지한 논리에 목을 매달아야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제도적인 문제로 1회 때는 세관 통과 시에 영화 편당 세금을 매기겠다고 해서 문화행사를 위한 것이니 무관세여야 함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명을 해야했고 또 영화제인데도 영화 검열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편당 오~팔십 만원의 심의비를 내야한다고 세관원이 고집을 부리는 통에 숨구멍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200여 편의 검열을 받자면 그 돈은 얼마인가· 또 국제영화제 상영을 위한 영화를 검열했다면 세계 초유의 웃음거리가 될 뻔하지 않았겠는가· 이래저래 동분서주하며 설명하고, 해명하고, 매달리고 해서 풀어나갔다. 또 자막도 영어 자막만 있었기에 한글 자막을 넣긴 넣어야 하는 데 필름 손상의 문제가 있었다. 다행이 일본에서 도입한 레이저를 자체 개발하여 사용하므로써 이 어려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야외스크린을 상영하면서 제일 인상 깊은 것이 몇 해 전, <어둠 속의 댄서>를 상영할 때였다. 5,000석의 표가 매진되었는데 상영 당일 비가 내린다고 했다. 스태프의 회의 결과 비가 와서 못 본다는 사람에게는 환불하기로 하고 일단 야외 상영을 실행하기로 했는데 우려와는 달리 5,000석 중에서 3,000석에 사람이 들어차 영화를 보았다. 어두운 밤, 비가 죽죽 내리는 가운데 불빛에 반사되는 일회용 비닐우의를 입고 영화를 보는 3,000명의 관객은 한마디로 전율 그것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 스태프뿐만 아니라 외국인 게스트들이 그 장면에 감동, 또 감동했다. 영화가 끝난 후 빗물인지 슬픈 내용의 영화로 인한 눈물인지 아니면 관객이 준 감동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되는 물기가 관계자들의 얼굴을 적셨다.
해운대와 남포동 양 지역에서 펼쳐지는 영화제로 인해 김동호 위원장이 해운대에서 남포동으로 하루에도 몇 번이나 시간을 다투며 왕복하느라 오토바이 퀵서비스를 많이 이용하였다. 어느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 짐 싣는 오토바이 뒤꽁무니에 매달려 다니겠는가· 하지만 부산의 교통사정은 중후한 승용차로 다녔다가는 실수하기가 일쑤이기에 김동호 집행위원장은 실리를 택하였다. 체력은 국력이라며 체력은 타고 난 분이지만 스태프들은 혹시 사고라도 날까봐 가슴을 졸이게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1회 영화제 때만 해도 12시가 되면 술집들이 문을 닫았다. 외국의 게스트들과 자리를 함께 하다 12시가 넘으면 술집을 나와야 하니 각자의 숙소로 가기에는 미진한 만남을 김위원장은 ‘스트리트 카페’를 차려 분위기를 돋구었다. 카페라는 말이야 그럴 듯하지만 실은 숙소 호텔 앞의 길거리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오가는 게스트들을 불러 말술을 나눴으니 일본처럼 관료적인 곳에서 온 사람들은 물론이요, 그 밖의 외국인들도 두고두고 김동호 집행위원장의 인간적인 소탈함에 반했음을 얘기한다. 대한민국의 차관까지 지낸 분인데 소탈하기가 그지없다. 이런 인간적인 매력도 부산국제영화제를 성공적으로 이끈 요인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오늘의 부산국제영화제가 제 위상을 잡기까지에는 김동호 집행위원장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관련된 프로그래머 세 사람과 김동호 집행위원장 등 주요 부서에는 1회 때부터의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부산국제영화제의 결집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편 영화관 시설이 너무 낙후되어 웃지 못할 일들도 더러 있었다. 의자 사이의 간격이 좁아 몸집이 큰 게스트들이 영화 상영이 끝날 때까지 울상을 하고 있었던 일이며, 외국의 게스트들이 관람 중에 샌들을 신은 게스트의 발을 쥐가 깨물은 적도 있었고, 국도 극장에서는 한참 영화상영 중에 고양이 울음소리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는데 알고 보니 극장에서 쥐를 잡기 위해 키운 고양이가 줄기차게 울어댄 것이었다. 이 모든 해프닝을 초석으로 삼아 이들은 앞으로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배출한 인재들과 한국에서 영화제 관련 노하우를 가진 전문가는 다 모였다는 자부심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끌고 나갈 것이다. 제4회 PPP에 소개된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가 지난 해 베니스 영화제를 휩쓸었고, 올해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캐롤라이 감독의 <꿈꾸는 풍경>도 지난해 PPP의 프로그램이다. 올해로 53회째를 맞은 베를린영화제에서 한국의 PPP에 자극받아 내년부터 ‘Co-production market'이란 프로젝트 마켓을 신설키로 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괄목할 만한 성장인가. 올해부터는 아시아에서 제작되는 영화의 세일즈까지 영역을 넓혀 달라는 요청의 쇄도해 오고 있다니 필름마켓 도입과 더불어 PPP가 아시아영화 중심 마켓으로 성장될 것으로 기대하는 많은 이들의 바람이 곧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지역의 영화를 통해 세계 문화의 흐름을 조망하고 아시아영화를 중심으로 아시아영화의 새로운 비전과 세계영화계에서의 한국영화의 위상을 향상시키며 아시아에서의 공동투자 마켓 형성 및 한국과 아시아영화를 제작 지원함으로써 한국의 문화예술도시로서 부산의 국제적 이미지를 제고하는데 기여한 부산국제영화제의 공로를 우리는 익히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3. 2002FIFA월드컵축구대회 본선 조 추첨 유치경쟁 일화
2001년 4월 17일 오후로 기억된다. 그 당시 전진 부시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최회장, 내일 첫비행기로 상경할 준비해서 김해공항으로 좀 나와 주이소” 상당히 급하면서 단호한 음성이었다. “왜 그라는데요·” “우리가 이리 앉아서 조 추첨 유치가 어려울 것 같소. 아무래도 로비하러 상경해야 되겠심더” 이때 필자의 역할은 한국 FIFA 본부 이사로 있는 한국예총 이성림 회장에게 본선 조 추첨 장소를 표결로 정할 때 부산 유치를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때 이미 전화로 이성림회장으로부터 적극 도와주겠다는 확약을 받아 놓은 상태여서 필자의 임무는 완수해 놓은 셈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내일 강의도 있고 빠질 요량으로 전진 부시장에 전화로 그 동안의 경과를 말씀드렸더니 “그래도 내일 회의장 복도에서 만나 한 번 더 다짐을 받아 놓는 게 좋소. 내일 다른 사람들도 서울 올라가기로 했으니 꼭 나오소” 사실 이때만 해도 다른 경쟁 도시인 서울이나 서귀포보다 유치경쟁에서 훨씬 늦게, 그것도 막판에 뛰어든 셈이어서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진인사대천명’의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야겠다 싶어 휴강조치를 하고 서울로 올라 간 것이었다. 회의 시작 두 시간 전에 도착해서 복도에 부산유치 프랭카드를 설치한 후 티켓도 들고 입장하는 이사들에게 일일이 큰절도 하며, 벡스코 설계 도면을 보여주면서 설명도 하고 그야말로 맨 투 맨 식 전법으로 각자가 맡은 이사가 입장하면 복도에서 붙들고 통사정을 했던 것이다. 다른 경쟁 도시의 관계자들은 이미 상황 끝난 듯이 복도에 한 명도 얼쩡거리지 않은데 유독 부산사람들만 복도에서 설쳐대니 15명 내외의 FIFA 한국 이사들이 입장할 때마다 놀란 듯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성림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최회장 왜 올라왔어요·” “아무래도 이회장님을 찾아 뵙고 부탁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내가 전화로 약속했잖아요” “예, 한 표 믿습니다” “걱정 말아요”하고 이회장은 회의실로 입장했다. 사실 이때만 해도 서울 아니면 서귀포로 낙착되는 분위기였다. 서울은 세계도시로 당연히 서울서 조 추첨을 해야 된다고 믿고 있고 게다가 서울시장이 바로 이사로 들어가 있으니 제일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한편 서귀포는 천혜의 관광 자원에다 오래 전부터 많은 시간을 갖고 로비를 끝낸데다 특히 한국축구협회 정 모 회장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부산 유치의 논리는 서울은 이미 세계도시로 인정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각종 세계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고 있으니 이번만은 같은 대한민국 도시요, 한국 제2의 도시인 부산에 양보하여 부산을 한번 띄어 달라는 부탁 겸 호소를 표방했다. 한편 서귀포는 실내가 아닌 옥외에서 행사를 계획하고 있는데 비가 내린다든지, 기온이 갑자기 내려간다든지 하면 원만한 대회 진행이 어려우니 마침 국제회의를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는 벡스코 건물이 이 때쯤 개관되니 부산에 유치되어야 합당하다는 논리를 폈던 것이다. 그런데 부산이 월드컵 조 추첨대회 유치 신청을 FIFA한국 본부에 늦게 낸 이유가 나변에 있었다. 하루는 벡스코 개관을 앞두고 사장 이하 전 직원들이 모여 개관기념 국제대회 유치를 의논하는 회의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한 여직원, 그것도 임시 여직원이 월드컵 축구대회 본선 조 추첨 대회를 유치하자는 의견을 내어 놓았고 그 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벡스코 정해수 대표는 즉각 부산시장에게 유치 협조 공문을 보냈고, 안상영 시장은 부산을 홍보하는데 절호의 기회로 삼고, 그것도 홍보비도 들이지 않고 전 지구촌 인구에게 부산을 소개하는 호기로 판단하고 적극 나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치경쟁에 늦게 뛰어 들었지만 그 성사 여부가 오늘의 회의에서 결판난다니 회의시간 내내 로비에서 기다렸던 우리 일행 모두는 좌불안석이었다. 전진 부시장, 배임태 국제준비단장, 이규호 과장, 보좌하는 담당직원 몇 명 그리고 민간인으로서는 부산축구협회 회장, 전 국제심판이었던 원로 축구인 한분, 부산시 생활체육협의회장, 벡스코 정해수 대표, 담당직원, 그리고 발의자였던 문제의 임시 여직원과 필자 등이 격전을 치룬 뒤의 피로한(첫 비행기를 타느라 아침도 거른 체 상경한 탓도 있으리라) 모습으로 복도에서 옹기종기 모여 회의결과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회의를 끝내고 이사들이 이삼 명씩 짝을 지어 복도를 빠져나가면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필자는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들었다. “이성림 회장은 부산사람들한테 물먹었나, 왜 한사코 고집을 부리지요.” 거의 절망적인 기분에서 이 말 한마디로 무언가 한 가닥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뒤에 구체적으로 알아 본 결과는 우리측으로부터 부탁 받은 몇 몇 이사들이 부산유치를 주장하다 서울, 서귀포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반박을 받고 물러선 반면에 예총 이성림 회장은 여성 특유의 고집으로 끝까지 부산유치를 주장하고 버틴 덕택으로 그 날 유치장소를 결정짓지 못하고 다음 회의로 순연되었다는 것이다. 부산의 입장으로서는 다 떠내려 간 보따리를 일단 건진 셈이었다. 또 다시 유치활동의 시간을 벌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부산은 외곽을 치고 들어가기 위해 눈을 국외로 돌려 FIFA본부의 이사들을 부산에 초청하여 설명회를 가지고 벡스코 현장을 보여주기로 했다. 아프리카인, 아랍인, 유럽인, 등 6~7명밖에 안 되는 FIFA본부이사들의 얼굴색깔이 각각인데다가 언어 또한 각각 이어서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게 상례였다. 그런데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접대부가 없어 이들을 찾느라고 부산시내 전역을 뒤지는 소동을 벌였던 일화가 기억에 새롭다. 어쨌든 이 접대부들이 FIFA본부 이사들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며 부산유치를 강력히 부탁한 것이 부산유치 성공의 일익을 담당했으리라 미루어 짐작된다. 다음날 그들의 표정이 활짝 밝았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본선 조 추첨대회는 부산에서 유치하게 되었다. 60억 지구인들에게 부산을 홍보하고 관계임원, 수행원, 취재기자, 관광객들을 포함하여 약 만 명의 손님을 불러들인 외화 획득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부가 가치야 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오늘의 세계도시 부산이 있기까지는 2002 FIFA본선 조 추첨대회가 기여한 몫이 크다. 이런 막대한 이익을 부산에 가져다 준 일등 공신은 시청 관계임직원과 민간단체도 그 공로를 인정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부산사람들이 고마워야 할 사람은 끝까지 부산유치를 밀어준 한국예총 본부 이성림 회장과 지금은 정식 직원으로 발탁, 승진되어 외국에 나가있는 백스코 임시 여직원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임시 여직원의 새로운 아이디어 하나가 부산을 이렇게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4. 악전고투한 2002부산합창올림픽
2002부산합창올림픽은 2000년 제1회 린츠대회 시 확정되었다. 당시 모 민간기획사가 오스트리아 제1회 대회를 참관한 후 영업을 목적으로 제2회 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하도록 하였고, 재원조달을 위해 부산시와 중앙정부를 설득하여 국제행사 승인, 부산에서의 대회 개최 결정 등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대회를 유치한 민간기획사에서는 전국적인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위원회를 창립, 각 시․도별 예술위원회를 조직하고 대회홍보와 국내팀 선발 등 대회준비를 위한 절차를 진행하면서 4억 원이 넘는 사비(私費)를 투입하였고, 2002년 2월 1일자로 대회조직윈원회가 정식 발족하면서 그 동안 민간기업에서 추진한 준비사항과 독일 본부(ICOC)와의 각종 재정부담의 협약도 승계하게 되었다. 그간 추진주체의 민간기업 대표가 조직위원회 사무처장으로 임명되면서 부산시 추진 공무원(파견)과의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 첫 번째가 대회 관련정보가 공유되지 않았다. 독일본부와의 각종 업무협의사항, 각종공연 준비사항과 관련된 모든 정보는 사무처장 머릿속에 있었고, 비서 중심의 업무처리, 서울 또는 개인사업차 해외출장, 행선지 불명 등 공공기관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한쪽은 개인의 영업을 위해, 다른 한쪽은 국익을 위해 서로의 목적지향점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무처장직을 그만두도록 하고, 그해 7월부터는 상근 운영위원장 체제로 하여 본격적인 대회준비를 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조직위원회 발족 이전에 집행한 운영비 보전에 대한 견해차였다. 조직위원회 총회에서 이미 집행한 운영비는 보전하도록 결정되었으나 그 내용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현격한 견해차가 발생하였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민간 기획사는 이윤추구가 그 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비용 청구자와 보전실무책임자가 동일인인 사무처장이라는 점이었다. 결국 사무처장을 배제하고 검증작업을 거쳐 청구액 4억7천여만 원 중 2억여원만 인정하여 최종적으로 2억 원만 보전하는 협약을 체결하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대회 예산 60억 원 중 협찬금, 부개최도시 분담금, 입장수입 등 상당액이 불투명하거나 비현실적이었고, 국․시비 22억 원만 재원이 확보되었으나 이것도 독일본부에 부담하기로 한 국제홍보비 13억 원과 저소득국가 지원금 4억 원을 제외하면 나머지 5억 원으로 집기구입, 사무실운영비, 기 집행 운영비 보전 등 대회를 준비해야 하므로 특히 대회홍보에 애로가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전국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든 한․일 월드컵대회와 부산에서의 가장 큰 행사였던 아시안게임 등으로 인해 시가지에 설치된 일부 홍보물 등은 개밥의 도토리처럼 관심 밖이었다. 그래서 예산도 46억 원으로 축소 조정하고 재정은 초긴축으로 운영하였다. 예산을 수반하는 홍보용 인쇄비의 대회 가이드북 제작(총 1억원 이상)등은 한국방문의 해 추진기획단에서 지원받았고, 홍보효과가 큰 방송광고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따라서 재정지출 없는 홍보는 한계가 있었고, 외국인 5천명을 포함 1만여명이 일시에 부산을 방문한 대규모 국제행사에 비해 홍보가 미흡했던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게 되었다. 같은 국제대회인데도 월드컵조직위원회나 부산아시안게임조직위원회의 홍보비 예산과 비교해 보면 정말 부럽기조차 했다. 대회기간 중에 중앙정부 차원의 재정지원으로 대회를 잘 치뤘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대회개막을 축하하는『KBS-열린음악회』가 10월 20일 BEXCO광장에서 열렸다. 며칠 전부터 행사준비를 하느라 분주했지만 대회 하루 전 일기예보는 당일 비올 확률 40%로 예보되었다. 만약 비가 온다면 우의를 10,000개를 준비해야 하는데 부산에는 그만한 물량이 없어 하루 전에 서울업체에 주문하여 차량으로 수송해야만 했다. 반대로 비가 오지 않는다면 주문한 우의 대금 5백만 원은 날릴 판이다. 만약을 대비하여 당일 아침에 결정하되, 5천 개만 주문했다. 진인사 대천명이란 뜻을 여러 번 대뇌이며. 드디어 『KBS-열린음악회가 개최되는 당일 아침 가랑비가 약간씩 뿌리는데 어쩌면 많은 비가 오지 않을 것만 같아 판단하기 어려워서 한참 고민하다가 우의 10,000개를 주문했다. 대회시간이 임박해지면서 빗줄기가 굵어지고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관중 입장개시 직전에 우의 수송차량이 도착하여 입장객에게 배부하였는데 작은 일 같지만 순간의 판단이 정말 어려웠고 옳은 판단에 대한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다.
『KBS-열린음악회』에 참석한 각국의 주한 대사 30여명이 당일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데 행사가 끝나고 이들을 태운 전용버스가 공항으로 출발한 후 항공기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버스 운전기사가 길을 잘못 들어서 헤맨다는 연락이 왔다. 알고보니 이들을 태운 버스는 부산차가 아니고 대구차였고 안내직원도 서울사무소 직원이 탑승한 게 아닌가. 당시 전국의 관광 버스가 다 동원되고 안내 직원도 충분치 않아 사정이 어려웠지만 정말 난감한 순간이었다. 다른 안내차를 보내고 난리를 치는 순간에 도영심 조직위원장은 항공사에 연락하여 항공기 출발시간을 10분 정도 늦추도록 조치했다. 보통 남자보다 센 여자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외국합창단들이 속속 입국하고 10월 21일에는 경연일정에 맞추어 독일합창단들이 김해공항에 도착했으나 숙박 수송업무를 대행하던 K여행사 관계자는 독일 본부로부터 받기로 한 외국합창단 숙박비를 당초 지급일을 어겼다면서 수송차량을 철수해 버렸다. 이로 인해 독일합창단 100여명은 2시간 가량 김해공항에서 기다려야 했고 긴급 대체차량을 동원하여 가까스로 수송을 할 수 있었다. 10월 22일에는 숙박대행사인 K여행사 관계자가 외국합창단들을 억류할 움직임을 보이자 독일본부 관계자와 K여행사 관계자 등이 도영심 조직위원장 주재로 심야 대책회의를 가졌다. 독일본부측에서 숙박비 지불약속을 이행하든지 신뢰할 수 있는 지불보증을 하도록 하였다.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독일본부 관계자들이 대회예술감독 등의 보증인을 내세워 익일까지 지불하겠다는 지불보증서를 작성하는데 합의했다. 그런데 잠시후 K여행사 사장은 이것마저 못 믿겠다고 하자 도영심위원장은 K여행사 사장에게<계약 당사자끼리 그런 것도 하나 해결 못해서 이렇게 여러 사람을 곤란케 하느냐>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날 이후 숙박비 지불논쟁은 매일 일어났고 새벽 1~2시에 퇴근하여 막 잠들 시간인 새벽 4시쯤에는 호텔에서 체크아웃하는 외국합창단 억류사태가 일어났고 급히 호텔로 달려가서 중재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때 부산시 관계 공무원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고 술회했다. 대회 종료일인 10월 27일에 또 한차례 소동이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지불해야 할 숙박비를 지불하지 않고 독일본부 관계자가 호텔을 빠져나가려다 밤잠도 못 자고 지키고 앉았던 K여행사 관계자와 몸싸움이 벌어졌고, 쌍방 고소로 인해 경찰관이 출동하고 출국을 저지하려는 사태가 벌어졌다. 급기야 관련 국가 주한 대사로부터 인권문제가 제기되는 등 외교문제로 비화될 조짐을 보였는데 결국에는 도영심 위원장 중재로 적정한 선에서 숙박비를 지불하고 억류 3일째인 10월 30일에야 이들이 출국할 수 있었다. 출발부터가 순탄치 못했던 2002 부산합창올림픽 대회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시민들의 의외의 참여와 관심으로 대성공의 막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부산시민과 대회관계자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