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민초 기리는 <항일무명용사위령비>
- 내용
우리나라는 위정자들의 부국강병 정책 소홀과 안보의지 미약으로 유사 이래로 무수히 많은 외세 침략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아 나라를 완전히 잃은 뼈아픈 역사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쑥대밭이 됐고 백성들은 모진 고초와 시련을 겪었습니다.
순국선열들의 헌신적인 독립운동과 이름 없는 민초들의 저항의지가 씨앗이 돼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는 나라를 위해 애쓴 유명 무명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부산 강서구 생곡동에는 ‘항일무명용사위령비’라는 국가 보훈부 지정 현충시설이 하나 있습니다. 항일무명용사위령비는 해방을 앞두고 자결한 한 무명용사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1995년 8월 15일 녹산향토문화관에서 건립한 비석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새벽에 한 청년이 가덕도 외양포에 주둔한 일본 해군기지를 탈출했습니다. 그 청년은 10리 바다를 헤엄쳐 건너 송정 바닷가를 지나 녹산, 성산을 거쳐 서낙동강 가에 닿았습니다. 그날 오전 10시경 장락포(현재 부산 강서구 생곡동 장락마을) 모퉁이 산 낭떠러지에서 총을 쏘며 쫓는 일본 헌병과 대치하던 이 청년은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고 투신해 순국했습니다. 청년의 탈영 과정을 목격한 사람들은 “큰 키에 좀 마른 얼굴, 누런 일본 수병의 옷을 입었고 어깨에는 옷 보자기 같은 걸 짊어졌다.”라고 증언하였을 뿐 성과 이름과 고향은 알 수 없었습니다.
위령비 최초 건립 위치는 투신 장소로 알려진 부산 강서구 녹산동 산2-4번지로, 성산마을과 장락마을의 경계인 일명 ‘처녀골’ 입구였습니다. 그러나 2008년 도로 공사로 인해 부산 강서구 생곡동 산6-1번지 장락마을 앞으로 이전되었습니다.
높이 4.5m, 너비 1.6m의 항일무명용사위령비는 화강암으로 된 기단의 2층 앞부분에 무궁화가 양각되어 있습니다. 기단 윗부분 몸체는 세로로 긴 사각형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비의 상부에는 둥근 구슬 모양의 조형물 두 개가 포개져 있습니다. 한자로 ‘항일무명용사위령비(抗日無名勇士慰靈碑)’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해방을 2시간 앞두고 자결한 이름 없는 조선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후세에 널리 알려서 추모하고 강력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삼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혹시 부산 강서구 생곡동을 지나는 길이라면 한번쯤 들러 무명용사의 넋을 기려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나 평화, 행복과 번영은 순국선열들이 처절하게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결실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 작성자
- 박정도
- 작성일자
- 2025-09-04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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