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임진왜란 순국선열 표상 반송 <삼절사>
- 내용
조선시대 임진왜란은 나라에 힘이 약해서 일본의 침략에 의해 생긴 참혹한 전쟁이었다. 국토는 철저히 유린되고 백성은 모진 시련을 겪었다. 국방이나 안보에 소홀하며 한가하게 골육상쟁을 펼치면 어떤 비참한 결과가 나오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반면교사다.
상절문.임진왜란을 맞아 전국 곳곳에서 왜적을 물리치려고 목숨을 초개 같이 버려가며 내 고장과 내 나라를 지키려는 의병이 일어나고 일부 벼슬아치들은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백성을 이끌고 중과부적의 왜적과 처절하게 싸웠다.
모현관.왜적이 가장 먼저 도착한 부산에서는 왜군을 맞아 크고 작은 결사항전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양씨 집안의 거룩한 희생정신은 본받을만하다. 이런 양씨 집안을 기리는 사당이 부산 반송동에 자리하고 있는 삼절사라는 문화재이다.
반송재.두루 알다시피 반송 삼절사(盤松 三節祠)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양지(梁誌), 양조한(梁朝漢), 양통한(梁通漢) 등 남원 양씨 집안 세 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세한당.이들 중 양지(1553~1592) 는 경기도 파주 사람으로 적성현감을 거쳐 삭녕군수로 부임하여 임진왜란 때 성을 지키다 순절하였으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양조한(1555~1592)은 동래향교(東萊鄕校) 유생으로, 동래향교에 봉안된 성현들의 위패를 동래읍성 내의 정원루(靖遠樓)에 봉안한 후 순절하여 호조 정랑에 증직되었다. 양통한(1559~?)은 양조한의 아우로서 경주의 문천회맹(蚊川會盟), 팔공산회맹(八公山會盟)과 함께 창녕 화왕산성(昌寧火旺山城)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순절하였으며, 이후 호조 좌랑에 증직되었다.
세한당.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들 삼공신(三功臣)의 넋을 위로하고 그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약 300여 년간 남원 양씨 문중 및 지역 주민을 중심으로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모셔왔으며, 향토방위를 통한 호국정신과 당시의 사회윤리관 확립을 위한 정신사적 측면, 그리고 이를 기념하는 현장인 점을 감안하여 경역 전체를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삼절사.1839년 동래부사 이명적에 의해 약 400평의 경역에 사당 1동, 재실 1동, 관리사 1동의 목조건물이 건립된 후 몇차례의 보수를 거쳤으며, 1990년 현재의 모습으로 정화하였다.
지금 국제정세는 매우 불안하다. 국방과 안보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기다. 다시는 임진왜란이나 6.25 한국전쟁 같은 국가 시련이 닥치지 않도록 유비무환의 자세로 안보의식을 다져야 한다. 순국선열 위패가 있는 반송동 삼절사에 잠시라도 들르서 국방 안보의지를 다져 보면 어떨까!
- 작성자
- 이옥출
- 작성일자
- 2024-06-14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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