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그 시절에 아빠는 뭐했어?”
영화 1987, 부산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
- 내용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데, 딸이 말했다. “아빠 이 영화에는 주연이 없어요. 모두가 주인공이에요” 아이들과 예전에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러갔을 때, 익숙하지 않아 “이게 무슨 영화야”고 하던 중학교 일학년 애니메이션 애호가인 딸이 이 영화에는 뭔가를 볼 만큼 시선도 커지고, 영화의 완성도도 높았나 보다. 그랬다. 이 영화는 박종철, 이한열만 열사로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대를 살아 간 시민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전 나이 일흔 살이나 먹은 노인입니다. 이젠 살 만큼 인생을 다 산 몸으로 어제 풀려나와 보니까 스물한 살 젊은이의 장례에 조사를 하라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아까 백기완 선생도 지난밤 한잠 못 잤다고 했지만, 저도 한잠 못 잤습니다. 너무 너무 부끄러워서. 왜 나왔던가?
어제 저녁에 여기서 박수를 치는데 제가 거절을 했습니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당신들의 박수를 받을 것이냐? 밤을 꼴딱 새면서 아무리 생각을 해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이한열 열사를 비롯한 많은 열사들의 이름이나 목이 터지게 부르고 들어가려고 나왔습니다...(후략)”
일흔 살의 나이를 먹은 문익환 목사. 1987년 7월 9일 연세대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하루 전날 감옥에서 출소하여 그를 위한 조사를 지었다. 영화 1987 엔딩에도 나오는 문익환 목사의 조사 속에서 “열사여!”라고 거듭 외치는 내용은 그러했다.
1980년대 후반의 모습은 당시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재현이 어렵다고 했지만, ‘1987’ 미술팀(한아름 미술감독)은 집요한 고증을 거듭해 완벽에 가까운 화면을 구성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4만 5천평 부지에 오픈 세트를 지어 1980년 후반 실존한 건물들의 사이즈를 그대로 반영한 것은 물론, 건축 자재도 당시 사용했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영화의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해 무대장치나 소품들도 꽤나 신경을 썼다. <썬데이 서울>, <TV가이드>, 이문열의 장편소설 <사람의 아들> 등이 등장하고, 당시 신문물 이었던 ‘MY MY 카세트’ 에서 유재하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 쌓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붉은색 코트의 불안을 꼭 감추고 검문 중인 경찰들 사이로 지나는 연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속에 이 노랫말마냥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길을 향해 나가는 연희는 이 영화의 축소판이다.
<레미제라블> 영화가 상영되던 2012년 우리는 언제 저런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해 본적이 있다. 프랑스 혁명의 힘이다. 하지만, 우리는 ‘택시 운전사’ 영화로 광주민주화운동을 새로운 시선으로 조명하며 천안문사태를 은폐하는 중국정부의 감시 속 중국 민중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영화 속에 담아내는 부러움을 자아내게 되었다. ‘변호인’으로부터 시작된 군부독재시절을 파헤친 진실 밝히기는 ‘택시 운전사’로 이제 그 힘을 이어가는 영화가 바로 ‘1987’이 아닌가 한다.
“철이 아부지, 와 이러고 있노?”
장례식장을 찾은 박종철 어머니의 말은 그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아픔을 도끼처럼 찍어 내린다. 어느 강가 얼어붙은 그 물에 박종철의 뼛가루가 재가 되어 흩어질 때 아버지는 그 한줌 재가 다 날아가지 못하고 한 얼음위에 쌓이자 “종철아”를 울부짖으며 눈물로 그 위를 적신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 가족들 생각은 안 해요. 그날 같은 거 안 와요. 꿈꾸고 살지 마요”
연희가 던지는 그 말이 우리에게 울림으로 남는다.
영화는 그 질문에 답하듯 하얀 신발을 모티브로 전개된다. 매캐한 최루탄 냄새를 맡으면서도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온 대학생들, 노동자, 시민들에 이르기 까지 그들의 발은 평범하지만 위대한 발걸음이었다. 어느새 1987년 6월 항쟁이 30주년이 되었다.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서울대생 박종철의 물고문 사건(1987년 1월), 이 사건의 진실을 취재해 나가면서 5월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은폐, 조작되었음을 발표한다. 6월 항쟁은 들불처럼 일어난다. 종교인들이 등장한다. 조계사, 명동성당, 향린교회 세 종교가 민주주의를 위해 협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6월 9일 연세대 이한열군이 시위도중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진 한 장. 그 여름을 시민궐기의 열기로 달구게 한다. 그 해 여름 20여일간 수백만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군부독재정권은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 조치 시행을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한다.
아이들이 묻는다. “아빠, 그 시절에 아빠는 뭐했어?” 나는 중학생이었다. 딸의 지금 나이와 비슷한 시절이다. 부산박물관 현대실을 방문하니 그 시절의 부산의 모습이 생생하게 실려있다. 6월 항쟁의 상징과도 같은 이 사진, 대형태극기가 휘날리고 그 앞을 두 손을 높이들고 감격에 찬 청년이 상의를 탈의한 채 자유를 울부짖는 듯한 그 사진이 다름아닌 우리 부산 문현동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민주공원 민주횃불 야경
부산은 또한, 다른 곳과 달리 민주공원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한국 민주화에 초석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부산의 카톨릭 센터에서 1주일간 5백여명의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의 시위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부산전역과 전국적으로 민주화의 불길이 번져 대통령 직선제의 개헌을 이끌어 내었다. 기회가 되면 부산민주공원과 민주항쟁기념관도 한번쯤 방문해 보는 것도 좋겠다.
- 작성자
- 김광영/이야기 리포터
- 작성일자
- 2018-01-25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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