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일제강제동원역사관 추모탑 참배
- 내용
▲ 추모공원에 우뚝 세워진 ‘추모탑’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에 위치한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시민들이 많이들 관람했겠지만 역사관 언덕에 있는 추모공원 추모탑을 참배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역사관 맨 윗 층에 올라가서 밖으로 나가면 약간 오르막길을 만난다. 이 길을 올라가면 추모공원이고, ‘추모탑’을 만날 수 있다.
추모탑 뒤편에 새겨진 글을 보면,
징병은 묻지 마라, 갑자생 무조건 군대에 끌려갔다.
사람이 100 m 쯤 떠, 폭격 당한 사람은 죽은 거기서 파묻고 와 버렸어.
집에 오니까, 죽었다고 통보가 와 있더라고, 당시는 갑자, 을축 생은 군대에 가야한다.
▲ 추모공원 추모탑으로 가는 길에서 볼 수 있는 태극기.
일본군 위안부로 14살에 끌려갔는데 너무 어려서 손님을 못 받는다고 많이 맞았어.
바닷가에서 4촌과 같이 납치됐는데 그 애는 일본군 총 맞아서 죽었어.
이런 말을 아무데도 안하고, 죽으려고 했는데, 너무 억울해서!
돌아와서는 시집도 못가고 평생 고생을 하면서 살았어.
들리느냐,
- 열두 소녀 이야기에서.
나를 개 끌고 가듯이 끌고 가서 저기서 눕혔어요.
어린애 요만큼 한 니기리에시 밥을 두덩이 밖에 안줘.
우리는 다 죽을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했어.
똑딱선 타고 오다가 바다 귀신 될 뻔했지.
가긴 어딜가, 헌병이 총 들고 지키는데.
징용에 끌려간 사람의 글에서.
강제동원은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자행한 인적, 물적 동원과 자금통제를 말한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이후 일본은 ‘국가총동원 법’을 제정하고 본격적으로 조선인에 대한 강제 동원령을 실시하였다.
이 법은 일본정부가 의회의 동의 없이도 일본 본토는 물론 식민지와 점령지의 인력, 물자, 자금을 총 동원하여 전쟁에 투입할 수 있는 전시통제 기본법이다.
노무동원은 일본 국가권력이 법령에 근거한 공권력을 동원하여 정책적, 계획적, 조직적, 집단적, 폭력적으로 식민지인을 각종 산업 현장에 노무자로 동원한 행위를 말한다.
법령에 근거하여 행정조직을 설치하고 한반도는 물론 일본과 점령지 일대에 7,554,764명을 강제 동원하였다.
▲ 강제동원으로 가기 전 신체검사를 받는 우리 선조들.
군무원 동원은 일본 육.해군에 소속된 민간 인력으로 군속, 군부, 군요원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제의 국민징용령 및 각종 규칙에 따라 한반도,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중 서부 태평양 제도의 군사기지와 전선에 동원을 하였다.
군인동원은 1930년대 조선인 징병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던 일본은 아시아 태평양 전선이 확대되어 병력이 부족하게 되자, 조선인을 군인으로 강제동원하였다.
당시 군인으로 장제동원된 인원은 20여만명 이상이었다.
여성동원은 일제는 1931년 만주침략 이후 1945년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식민지의 젊은 여성들을 일본군이 설치한 ‘위안소’에 감금하여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하였다.
1932년 상하이에서 시작된 위안소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점령지역이 늘어남에 따라 대부분의 일본군 주둔지로 확대되었다.
동원된 인원은 40만 명 이상으로 추정한다.
▲ 일본 패전으로 우리 선조들이 귀국선을 타고 오는 모습.
귀환자가 말하는 탄광의 실상은 조선인들은 전쟁물자인 석탄과 철광을 채굴하는 막장 현장에 투입되었다.
막장의 천장이 무너져 매몰되거나 가스 촉발이 일어나는 등 각종 사고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작업은 아침 7시에 시작하여 저녁 7시로 하루 12시간 일을 하며, 채굴장을 비우지 않고 3교대로 돌아가면서 일을 했다.
채굴장에서 나올 때 몸이 정상적으로 나온 사람은 거의 없고 모두 빈신불구상태에서 막장 채굴장에 나왔다.
- 박용식님의 진술.
▲ 탄광에서 힘든 일을 하는 우리 선조들.
해방 후 귀환은 일본의 패전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은 본국으로 귀환을 서둘렀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의 귀환은 일본의 몫이었으나, 일본은 방관하였고 귀환을 도와야 할 조국은 무정부상태였다.
스스로 귀환 길을 나서다가 폭풍과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기도 하였다.
동료의 유해를 끌어안고 고향으로 오는 길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안타까운 여정이었다.
- 작성자
- 황복원
- 작성일자
- 2019-12-26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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