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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이야기리포트

무선통신의 뿌리, 봉수대

내용

부산 시내에는 여러 곳의 봉수대가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곳을 꼽으라고 하면 당연히 4개 구를 아우르고 있는 황령산 봉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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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령산 봉수대 전경.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왜군들의 부산포 침략을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위치는 부산진구 전포동 산 50-1번지이며, 비지정 국방문화유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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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전거를 번쩍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청년.


봉수대를 찾아 올랐다. 아직은 봄이 아니라서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배낭을 지고 올랐으니 등에 땀으로 가득했다. 


정상에는 젊은 청년들이 자전을 타고 올라와 있다. 건강을 과시하면서 자전거를 번쩍 들어 올리고 사진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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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재 데크에 만들어진 시민들의 쉼터.

 

봉수대의 화구 5개는 불탄 흔적은 없지만 옛날 당시의 것이 아니고 원형 본존의 형태로 새로 만든 화구이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은 뚜껑을 덮고 자물쇠로 잠갔다. 낮에 연기를 올리는 연통 역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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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쌍이 앉을 수 있는 흔들의자.

 

봉수대는 군사적 목적의 중요한 통신시설이다. 


낮에는 섶나무와 짐승들의 똥 등을 사용하여 연기로 왜적의 침입을 알린다. 밤에는 횃불을 밝혀 그 신호를 알렸다. 횃불은 화구 숫자에 따라 그 위험성을 알렸다. 


요즘 같으면 휴대폰이나, 유선전화, 팩스로 알리지만 당시는 통신시설의 열악함으로 봉수대의 역할이 얼마나 국가 안위에 영향을 주었는지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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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서 내려다 본 문현동 국제금융 빌딩숲.


화구의 횃불 숫자는 평상시에는 1개를 피운다. 왜적이 해상에 나타나거나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2개를 피운다. 왜적이 해안가에 근접하거나 반경에 가까이 오면 3개를 피운다. 우리 병선과 접전을 하거나 국경을 침범하면 4개를 피운다. 왜적이 상륙하거나 적과 접전을 하면 5개의 신호를 올린다. 


만약 구름이나 안개, 비, 바람 등으로 봉수의 전달이 불가능할 때는 포성이나 뿔 나팔, 징 등으로 알리고 여의치 않을 경우 봉수군이 다음봉수대까지 달려가서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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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서면 시가지 전경.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황령산봉수대는 1425년(세종 7) 이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서쪽 초량의 구봉산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동쪽 해운대 간비오산 봉수대와 북쪽 범어사 동북쪽의 계명산봉수대에 전달하여 최종적으로 서울 남산의 경봉수대까지 변경의 상황을 전하는 부산 봉수망의 중심이었다. 


황령산봉수대는 동래부에서 관리를 하였다. 별장 10명, 감고 1명, 봉군 100명씩 배치되어 교대로 근무를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14일 황령산 봉수군 배돌이가 부산포에 왜군이 침입하였음을 알린 사실이 “이충무공전서”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조상들이 왜적 침략 때마다 신호를 올리던 이곳 봉수대가 가진 민족수호 의식과 국토방위 정신을 후손들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성자
황복원
작성일자
2020-03-0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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