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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이야기리포트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

역사 속의 부산을 얼마나 아시나요?

내용

최근 카이스트 학생들이 연달아 자살을 하면서 사회적인 우려를 낳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되돌아보게 한다. 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관심과 학생들의 열정은 비단 오늘날의 일인 것은 아니다. 과거의 교육에 대해 살펴보면서 현재와 비교해보자.

조선시대에 우리 지역에서의 교육기관은 향교와 서원이 있었다. 바로 명륜동의 ‘동래향교(東來鄕校)’와 안락동의 ‘안락서원(安樂書院)’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에 향교와 서원은 국가 통치 이념을 전파하는 핵심 기구였다. 그리고 부산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들 기구가 있었던 동래부가 부산을 포함하는 큰 중심이었다. 따라서 동래에는 향교와 서원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동래중학교에 재학할 때, 항상 무심히 지나쳤던 ‘동래향교(東來鄕校)’를 찾아서 조선시대의 교육에 대해 배웠던 것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동래향교(東來鄕校)는 동래 명륜초등학교 정문 옆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대 소실되었으나 1605년 동래부사 홍준(洪遵)이 중건하였다. 원래 동래읍성 밖 2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1704년 유생들의 소청에 의하여 동래부의 동쪽 관노산(현재의 동래고 부근) 밑으로 이전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이전과 중건을 거듭하다가 1813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부경역사연구소,『시민을 위한 부산의 역사』, 선인, 2003)

향교는 오늘의 공립 중등교육 기관에 해당한다. 정부는 유교 이념을 전국에 보급하기 위하여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군현마다 향교를 설립하였으며 문과에 급제한 교관을 파견하여 운영하였다.

향교의 정문인 반화루(攀化樓) 밑을 지나면 먼저 강학 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만나게 된다. 명륜당의 뒤편에는 제향공간으로 공자 이하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의 성현이 모셔져 있는 대성전(大成殿)과 동무·서무가 있다.

동래향교는 성균관의 축소 형태이며 우리나라 향교의 일반적 모습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명륜당은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학습 장소이다. ‘명륜’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다. 건물 배치상의 특성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으로 뒤편에는 대성전, 앞편에는 명륜당이 위치하고 있다.

향교에 입학한 16세 이상의 학생을 교생(校生)이라 하였는데, 양반과 평민이 입학 가능하였다. 다만 양반은 동재(東齋)에 평민은 서재(西齋)에 거주하게 함으로써 이들을 구별 지었다.

향교는 유교 교육을 하면서 교화를 시키는 양면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사림 세력이 강화되면서 유교 이념을 전파하는 교화의 기능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향교는 지방 양반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향촌지배기구로 변질되었다.

동래 향교를 찾고 난 뒤 강학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의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라는 뜻을 통해 과거에는 숭고하고 드높은 교육의 목표를 추구하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시대의 교육은 그 목적이 입시를 위한 취업을 위한 공부로써 변질되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오늘날에는 교육 인프라가 과거에 비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하였지만, 우리들의 생각·문화 등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작성자
이원석/부비 리포터
작성일자
2011-04-19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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