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동 책방골목서 공자님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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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부산시민을 문화에서 눈을 뜨게 한 명소는 누가 뭐라고 해도 보수 동 ‘책방골목’이다. 골목입구에 들어서면 책을 한가득 안고 서있는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오른쪽 대신 동 방향 큰길가 부산의 명소 보수 동 책방골목이라는 입간판을 세웠다. 젊은 청년들이 책방골목을 기웃거린다. 덩달아 ‘부산 관광공사’골목투어를 하는 사람들이 한곳에 모였다.
좀 복잡하지만 명소라 책을 사고파는 가게는 흥정을 한다. 시민이 책을 구입하려면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정찰제다. 하지만 시민이 헌책이든 새 책이든 일단 이곳으로 가지고 오면 헌책으로 분류한다. 정가에서 값을 책정한다. 시민 한사람이 유심히 책의 겉모습을 바라보면서 필요한 책이 없나 살핀다. 이 골목을 방문한 사람은 책에 관심을 가진 시민이다. 물론 젊은 청년들은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난 전문서적을 가지고 온 사람도 제법 있다. 책을 살 때 값을 생각하면 억울하겠지만 그래도 헌책을 팔 수 있다는 자체로 만족을 느껴야 하며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책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고 명소가 되는 것 아니란 걸 확실하게 보여준다. 겨울 두툼한 외투를 입고는 한사람이 겨우 올라가야 할 계단 양옆에 진열된 책을 보면서 가게주인의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 알 수 가있다. 그 많은 책들을 물어보면 척척 위치를 알고 있다. 책방사장님은 책의 위치자판기다.
부산서면 대형서점에 가면 천장에 책을 분류한 명패를 볼 수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 사장님의 머릿속에 책의 위치를 입력시켰다. 정말 대단하시다. 우리가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지 못하는 서적이라도 이곳에 가면 대부분 찾아 읽을 수 있다.
보수동의 책방골목이 명소가 된 원인은 8.15광복직후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다. 함경북도에서 피란을 나온 한 부부가 최초로 헌 잡지와 책, 참고서 등을 모아 팔던 난전이 시초가 되었다. 당시 보문서점(현 글방쉼터)로 1970년대 70여 점포들이 성업을 하였다. 가끔 헌 책속에서 진귀본을 발견하면서 오늘날 이렇게 번창하였다.
피란을 왔던 피난민들은 용두 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일과였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그들에게 단골이었다. 책방골목은 문화의 거리, 추억의 거리로 기억되어 왔다. 헌 책이 새로운 주인을 만나 새롭게 태어나는 재탄생의 창조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보수동의 유래는 복병 산 지맥인 용두 산을 중심으로 배산임해의 지형인 중구의 서단에 위치하고 있는 본래는 동래군 사하면 지역으로서 1896년(고종33년) 부산부에 속했다. 1914년에는 보수정이라 하였다가, 1947년 보수 동으로 지명을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수동의 명칭은 원래 보수천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수천은 보수 산에서 발원하여 보수 동을 지나 동남쪽으로 흘러 부평 동을 거쳐 부산바다로 들어가는 하천이다. 그전에는 법수천이라고도 불렀다.
이곳에 가면 공자논어맹자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다. 공자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몸도 내 몸같이 소중히 여겨라. 내 몸만 귀한 것이 아니다. 남의 몸도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리고 네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일을 네가 먼저 그에게 베풀어라.’ -공자- 바닥을 잘 살펴보면 만난다.
그리고 또 ‘학문은 물을 거슬러 가는 배와 같아서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나느니라. 빨리 하려 하면 이루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면 큰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음이 군자가 아니겠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탓하라’. -논어- 역시 바닥에 각인을 했다.
- 작성자
- 황복원/부비 리포터
- 작성일자
- 2015-02-17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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