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이수현씨 15주년 추모식
부산청년 이수현이 한일관계에 남긴 선명한 지문
- 내용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 우리는 그렇게 잊혀지는 존재가 되길 원치 않는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선명히 기억되길 원한다. 되도록 좋은 삶으로 또 많은 이들에게 말이다. 하지만, 바쁘게 흘러가는 세월에 이전 세대의 삶들은 강물처럼 흘러가 역사의 한 순간에 남아있기 쉽지 않다. 언제나 바쁘고 분주한 현실이 우리의 주의를 잡아끈다.
요즘 뉴스 속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인구에 회자되는 이슈 중 한일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당한 인식과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에 대한 문제는 일제강점기의 상흔과 문제가 아직 현재진행형임을 말해주고 있다. 칼 바람치는 북극한파의 절정인 1월26일 부산 내성고 정문 앞 도로에 한 무리가 모였다. 스물일곱 한 청년의 죽음을 애도하며 추모하는 자리였다.
2001년 이날, 일본 동경의 전철역에서 일어난 한 사건 때문이다. 200여명의 승객들이 전동차를 기다리는 중, 만취한 일본 승객한명이 선로 위로 뛰어 들었다. 누구 하나 그 당혹스런 사건 가운데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런데,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 2000년에 일본 유학 중이었던 부산 청년이 그 승객을 구하려 선로에 뛰어들었다. 일본인 사진작가도 한 명 그 상황에 합류했다. 하지만, 달려오는 전동차를 멈출 수는 없었고 그렇게 3명의 목숨은 철마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 사건은 온 일본을 떠들썩 하게 만들었다. 한국인 청년 스물일곱의 젊은이가 아무런 계산없이 한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 아무도 뛰어들지 않은 죽음의 선로 위로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이 일이 일본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났다. 개인주의에 대한 자각과 비판과 함께 자국민을 구하려다 희생한 젊은 한국인에 대한 고마움으로 일본인의 추모 행렬이 줄을 이었다. 경직된 한일 관계에 한 청년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이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한류열풍이 일본에 불게되는 계기도 되었다.
부산의 낙민초, 동래중, 내성고에서 학업하여, 고려대 무역학과에 진학했던 젊은 인재. 그가 지금 살아 있었다면 마흔 두 살의 건강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추모식에 함께한 여동생과 조카 가정을 보며 이 추운 바람속에서도 참여한 교직원들과 내성고 스물 다섯여명의 학생들을 보며 여러 생각들이 스쳐갔다.
그의 정신을 기리고자 ‘LHS 아시아 장학회’가 설립되고, 2007년 ‘너를 잊지 않을거야’라는 영화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부산 청년 故이수현씨가 한일 관계에 남긴 그 선명한 지문이 헛되지 않도록 응어리진 한일 관계의 오래된 숙제들이 제대로 매듭이 풀려지길 바라길 기도한다.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씨, 카멜맨 세키네 시로씨는 2001년 시오오꾸보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발견하고 자신들의 위험을 무릅쓴 채 용감히 선로에 뛰어들어 인명을 구하려다 고귀한 목숨을 바쳤습니다. 두 분의 숭고한 정신과 용감한 행동을 영원히 기리고자 여기에 이 글을 남깁니다.” - 동일본 여객철도 주식회사
- 작성자
- 김광영/이야기 리포터
- 작성일자
- 2016-01-29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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