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임시수도 1023일’ 사진으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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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광복 70주년이자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5주년이 되는 해였다. 지나간 시간의 마디를 힘주어 기억하려는 것은 아직도 그 아픔의 역사가 미완의 과정으로 남고, 더 내딛어야 할 내일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71주년인 금년 임시수도 1023일의 아픔의 사진을 ‘임시수도 기념관’(이하 기념관)에서 전시한다.
그래서 부산광역시서구 기념관은 한국전쟁 시절 부산의 다양한 모습을 시민에게 알리고자 전쟁기간 동안 임시수도 부산의 역할을 다 했던 임시수도 기간 사진을 이야기와 전쟁의 시작과 함께 부산으로 모여든 피란민들의 고단한 생활을 전하고자 기념관 정원은 당시 부산에서 일어난 생생한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전시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발발도 중요하지만 대한민국의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오늘은 없었다. 거슬러 올라가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40분 북한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암호명 ‘폭풍’ 이라는 이름으로 기습 남침을 개시 한다. 북한의 애기치 않은 일격은 파죽지세로 밀려 내려왔다.
7월 20일 대전과 전주를 점령한다. 23일 광주, 26일~27일 여수를 점령하여 남항 일대를 장악한다. 8월 1일 낙동강 선까지 후퇴하며, ‘부산 교두보’로 불리는 낙동강 방어선이 만들어졌다. 낙동강 방어선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대한민국의 최후의 보루였다.
부산은 지형상산으로 쌓였다. 평지가 좁은 부산에 모여든 피란민들은 산과 언덕으로 기어올라 당장 급한 움집이라도 지어야 한다. 그래서 생긴 것이 판잣집이다. 집이 있어야 일할 자리를 찾지만 막상 집을 지으니 일할 자리가 없다. 다행히 부산은 항구를 끼고 전쟁구호 물자를 실어온 군수물자를 빼내어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꿀꿀이 죽’, ‘얌생이’ 라는 말들이 생성하였다.
환경이 열악하여 판잣집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산복도로와 중심가 건물도 화재에 취약했다. 그래서 붙여진 ‘불의 도시 부산’ 불이 났다하면 대형화재다. 불이날 수밖에 없는 구조는 판잣집에 초롱불, 촛불, 아궁이 불 등 화마에 주요 원인을 모두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바다를 낀 강풍으로 불이 나면 전소하는 불의 도시였다.
피란민과 부두노동자의 애환은 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모여든 60만 명의 피란민들이 부산항 부두와 가깝고 부산역, 국제시장, 자갈치시장을 이어주던 40계단 뒤편 산비탈에는 10만 명이 넘는 피란민들의 판잣집들이 줄을 이었다. 노래 가사에 고스란히 묻어있다.
경상도 아가씨 (1절)
사십 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란살이 처량스레 동정하는 판잣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워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 없이 슬피 우는 이북고향 언제가려나.
피란민들의 만남과 이별의 역사 ‘영도다리’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란민들은 해어질 수밖에 없는 부모, 형제를 향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한다. 피란민들은 평생 연이 없던 부산으로 내려와서 영도다리에 모여들었다. 부산의 이정표가 영도다리였다. 이산가족을 찾으려고 영도다리는 매일 인산인해로 북적였다.
한편 ‘굳세어라 금순아’ 노랫말 가사 중에서,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 부두에 / 목을 놓아 불러보았다 찾아를 보았다 / 금순아 어데로 가고 길을 잃고 해매였더냐 / 피눈물을 흘리면서 1.4이후 나 홀로 왔다. 피란생활의 애증을 읽는다.
- 작성자
- 황복원/이야기 리포터
- 작성일자
- 2016-12-08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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