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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202310호 기획연재

“소막에 살아도 살아있으면,그걸로 된기라”

피란수도 부산 그 흔적을 찾아서 ④우암동 소막 피란 주거지&부산항 제1부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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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들은 살 곳을 찾아 일제강점기에 만든 소막에 가마니나 판자로 칸을 지르고 보금자리를 틀었다(사진은 소막의 흔적이 남아있는 우암동 소막마을 골목).


소 120여 마리가 들어가던 소막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살아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희망은 있었던 게야.

그것이 우암동 소막마을의 생활이었지.

글·하나은

소를 닮은 바위가 있던 곳…우암동
왔는가. 사람 사는 것 다 똑같지, 이 동네 뭐가 볼 게 있다고 왔는가. 그래도 이왕 왔으니 내 이야기나 한번 듣고 가시게나.

우암동. 이 동네의 역사가 깊기는 하지. 그러고 보면 소하고는 인연이 있는 동네구먼. 일제강점기가 되기 훨씬 전 마을 포구 앞에 소를 닮은 큰 바위가 있었다네. 소를 닮은 바위, 그래서 ‘우암(牛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지. 그 바위가 어디 있냐고? 지금은 없어. 아 일본이 조선의 소를 몽땅 잡아다가 일본과 만주로 보내지 않았는가. 이 동네에 소 검역소와 소막(외양간)을 짓고 큰 도로도 만들었는데 땅까지 매립했다네. 1930년대인가 그때 폭파해서 없어져 버렸다는구먼.

소막의 규모가 어마어마했지. 처음에는 한 동에 120마리 정도를 수용하는 소막이 5동 있었는데 1919년에는 14동까지 늘어났어. 연간 1만2천 마리의 소가 배나 기차에 실려 수출됐다네. 조선의 소들은 떠나고 조선사람들은 굶주리고 가난해져 간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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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①1920년대 우암동 모습. 사진출처:남구 ②6·25전쟁기 우암동 피란민촌 모습. 사진출처:서전병원 사진전 ③1953년 미국구호물자 부산항 인수식. 사진출처:국가기록원


소막이 주거지로…소막마을의 탄생
이 동네서 20분쯤 차를 타고 가면 1912년에 만든 부산항 제1부두라네. 어디 우리 좋으라고 만들었겠어. 일제가 우리 것을 더 잘 빼앗으려 만든 게지. 그래도 1945년 광복은 오고야 말았어. 그때 비행기가 있었나 뭐가 있었나. 일본으로 이주된 동포들은 배를 타고 부산항을 통해 돌아왔지. 들뜬 마음으로 고국 땅을 밟았지만 기다리던 것은 찢어지는 가난 뿐이었어. 좀 사는 사람들이야 고향을 찾아갔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돌아와 어디로 가겠는가. 그때 비어있던 소막이 생각난 거지. 지금 같으면 쳐다보지도 않겠지만 그때 그럴 여유가 있었나. 비를 피할 지붕과 바람을 피할 칸막이만 있으면 그것만도 감사했어.

비어버린 소막에 사람들이 들어갔다네. 기다란 우사에 가마니나 판자로 대충 칸을 질러 가족 수별로 면적을 배당받았지. 그런데 또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전쟁이 난 게야. 이번에는 보따리 짐을 둘러멘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쏟아져 들어 왔지. 어떤 이들은 저기 아미동 비석마을로 갔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초량 산등성이로 올라갔다는구먼. 이 동네에도 피란민이 많이 왔어. 천막이 100여 개가 넘을 정도였지. 소막 칸칸이 피란민들로 가득 차고 부엌은 집밖에 두고,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했다네. 소 120여 마리가 들어가던 막사 한 동에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생활했다니 그 생활이 어땠겠는가. 그래서 우암동, 이 동네에 ‘소막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게야.

집은 좁고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데다 내일은 또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나날이었지. 그래도 다행히 미군이며 유엔군이며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이 오더구먼. 저기 부산항 제1부두로 밀가루며 옥수수며 구호물자가 들어오고 군인들도 들어왔지. 마을 남정네들은 부두에 가서 하역을 도우며 일자리도 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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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①마을 입구에 자리한 소막마을 주택전시관. ②소막마을 주거지 모형. 19.8㎡(6평) 정도의 소막에서 평균 5명 이상의 사람이 살았다. ③소막마을 주택 내부. 부산시 자료사진.​


아, 들었는가. 부산 명물 밀면도 이 동네에서 탄생했다네. 사람들이 모이니 자연스레 시장이 생겨나지 않겠는가. 우암동골목시장은 그렇게 시작됐지. 바느질로 옷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포목전이나 식당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

함경남도에서 피란 온 정 씨 아주머니도 이 시장에서 작은 가게를 열었어. 원래 2대째 냉면집을 했었다는군. 그런데 냉면의 주재료인 메밀을 구할 수 없었던 게야. 하는 수 없이 구호 물품으로 나눠주던 밀가루를 섞어 면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밀면의 시작이라는군. 내호밀면이라고 저쪽 골목에 아직도 있다네. 허영만의 ‘식객’인가 만화에도 나오고 ‘백년가게’에도 선정됐다니 한번 가보시구려.

거 요즘 브라질인가 어딘가 하고 닮았다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 있지 않은가. 동항성당도 큰 도움이 됐었지. 1951년인가 천막으로 지었는데 배고픈 사람들, 아픈 사람들,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많이 보살펴 주었지.


마을 흔적,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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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오른쪽은 ‘부산의 리오데자네이루’로 불리는 동항성당 예수상. 왼쪽은 부산 밀면의 원조라 불리는 내호냉면. 사진:권성훈


전쟁 후에는 우리도 숨통을 좀 돌렸어. 비록 나라 땅 대부분이 폐허가 됐지만, 목숨은 부지하지 않았는가. 열심히만 하면 우리도 잘 살 수 있다고 희망이 꿈틀하기 시작했어. 우리 동네 옆으로 동명목재 등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어. 공장에서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으니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는 집들이 생겼지. 다른 소막을 사거나 2층으로 증축하는 가정이 늘었다네. 이 동네 집들을 보면 1층보다 2층이 더 큰 가분수 같은 집들이 간혹 있는데 그 당시 재개축을 한 흔적이지. 시장도 커지고 극장까지 들어섰다네.

그런데 세상이 어디 그리 녹록하던가. 산업 구존가 뭔가가 바뀌면서 잘나가던 공장들이 어느새 문을 닫거나 이사를 가더구먼.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이 좁은 골목길에 정을 붙인 우리 같은 사람들만 남은 게야. 요즘은 마을 주변으로 재개발이 한창이라 떠난 사람들이 더 늘어나 아쉽구먼.

이 동네가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으로 올랐다지? 그래서인지 요즘 마을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어. 저기 우물터가 보이는가? 예전에는 저 근처에서 빨래도 하고 수영도 했다네. 소막사의 환기구가 남아있는 흔적도 있으니 찾아보시게나. 부두도 많이 바뀌었다지? 큰 배가 들어오는 여객터미널이 생기고, 2030년엔 세계박람회도 준비하고 있다고? 구호물자가 들어오던 때가 생생한데 세상 참 좋아졌구먼.

우리 동네를 걸을 때는 옛날에는 ‘못 살았구나’라며 드라마나 영화를 보듯 보지 말고 마음의 눈으로 봐주시게나.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영혼을 기억해 주시게나. 그것이 바로 지금도 남아있는 희망 아니겠는가. 긴 이야기 듣느라 수고 많았다네.

<피란수도 부산 연재 끝>

작성자
하나은
작성일자
2023-06-01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202310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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