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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2016년 9월호 통권 119호 부산이야기호 기획연재

학이 나래짓하듯 기품있고 우아한 춤사위

“내 춤에 만족 못해, 항상 부족하고 아쉬워” … 부산시립무용단 수석 역임

내용

지난 5월 첫 날. 동래구 온천동 호텔농심 야외특설놀이마당은 날씨 못잖게 민속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윽고 일군의 풍물잽이들이 ‘동래학춤’이라 쓴 깃발을 앞세우고 들어와 놀이마당 한켠에 자리 잡고 굿거리장단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낭랑하고 청아 유장한 구음(口音)이 장내에 울려 퍼지면서 한 무리의 학춤꾼들이 날음사위 펄럭이며 놀이마당에 날아든다. 새하얀 바지저고리에 ‘하이얀’ 도포를 걸치고 통영갓을 쓴 춤꾼들이 학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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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생 춤을 시작한 이성훈 씨는 올해 2 동래학춤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학의 움직임 관찰해 만든 동래학춤

나아 ~ 날지니 ~ 나아 ~/

날지니 ~ 나아나아나아 ~ 지루나 ~ 날지니 ~

나아 ~ 날진/

~ 알지니지니지루날  ~ 날지니 낫다날지니……

 

학의 생김새를 본떠 연출한 새하얀 옷차림이 놀이마당에하이얀무늬를 수놓는다. 날렵하고 다부진 주무수 이성훈 씨가 춤판 한가운데 섰다. 양팔을 조용히 허리에 얹었다가 들어 올려 하늘을 향해 뻗쳤다가 다시 허리께에 얹으면서 상체를 굽혀 주위를 둘러본다. 학이 모이를 찾아 어르는 모습을 방불케 한다. 동래 사람들만의 소리꼴이 배인 동래 굿거리장단은 듣고만 있어도 어깨가 들썩이고 입장단이 절로 난다. 여기에 더해진 구음으로 동래학춤이 더욱 돋보이며 춤태 또한 고와 보인다

꽹과리가 갑자기 잔가락으로 몰아치며 힘차게 덧배기가락을 매기면 그의 춤도 크게 요동을 한다. 양팔로 허벅지를 치면서 하얀 그림자가 뛰듯 위로 솟구친다. 왼발로 다시 뛰어서 올렸던 오른발을 앞으로 내어들고 몸을 왼쪽으로 틀어주듯 하면서 들어 올렸던 양팔로 둥글게 원을 그린다. 그리고 들어 올렸던 오른발을 아래로 내리찍듯이 뛰어 앞으로 하고 왼발을 뒤로 길게 뻗으며 춤이 크게 배긴다. 동래학춤의 백미인 배김사위다.

초등 6학년 찾아온 춤과의 깊은 인연

춤꾼 이성훈은 부산에 정착한 부모님 덕에 동대신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초등학생 시절 피아노학원을 다니면서 오가던 길에 있던 성민무용학원에서 흘러나오는 장구소리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문을 방싯 열고 엿본 순간, 춤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수줍음 타는 소년을 발견한 원장이 소년에게춤을 추고 싶어? 그럼 춰봐라고 권한 것이 동신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다. 성민무용학원 원장은 다름 아닌 부산 춤꾼 성승민 씨였다.

선뜻 무용학원으로 들어섰으나 정작 원장은 춤은 가르쳐주지 않고 청소부터 하랬다. 1년이 지나 중학생이 돼도 장구채 들고 청소 잘못했다고 나무라기만 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학원생들 춤추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혼자 춤을 익혀갔다. 이를 눈여겨 원장이 춰봐그러고는 춘다, 춘다 한마디도 없었다. 어린 마음에 섭섭함이 컸으나 개의치 않고 공부만 열심히 했다. 그러던 어느 무용학원에서 배운다는 사실이 집에 알려졌다. 부모님의 호된 꾸지람이 쏟아졌다. 그래도 춤을 배워 춤꾼으로 남고 싶어 하는 소년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의 부모는그러려면, 집에 들어오지 마라 최후통첩을 한다. 중학교 2학년 15 때였다.

오갈 없는 소년을 거둬 사람이 원장이었다. 학원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전통춤의 기본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래도 집에서 학비는 보내왔다. 동아대학교 체육학과(당시는 무용도 체육과에 속했다) 졸업(1976) 때까지 그렇게 무용학원에서 살았다

대부분이 여학생인 무용학원에서 궂은일 마다않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렸고 성승민 선생의 수제자가 됐다. 훌륭한 춤꾼이 부모님과 친척들에게도 떳떳하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학사자격을 지닌 춤꾼이 돼야 했다. 남자 무용수가 귀하던 시절 당당한 남자 무용수로 우뚝 서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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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학춤 좌우배김사위.

 

 

평생 동래학춤에 빠져 살다

1975(대학 4) 서울 국립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전국신인무용경연에서 승무를 신인상을 수상하고 이듬해엔 부산일보 30주년기념 신인콩쿠르에서 차상으로 입상한다. 1984년에 부산시립무용단의 수석이 창작춤보리피리여자 새되어 울다등의 작품을 올린다

특히여자 새되어 울다 동래학춤을 소재로 작품이어서 동래민속의 김희상 어른 등이 태를 지도해, 동래학춤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이를 인연으로 1990 부산민속예술보존회에 입회하게 된다. 학춤이 좋아서 입회했지만 협회규정상 동래야류 넷째양반 역을 배우고, 다시 동래지신밟기 사대부 역을 맡아하면서 지신밟기보존회 회원으로 등록된다. 그래도 틈틈이 시간나는 대로 동래학춤을 익혀나갔다.

2007 부산시에서 무형문화재 분야별 배역에 따른 수요조사를 실시했다. 그는 그간 익혀온 동래학춤 평가를 다시 받아 동래학춤 전수조교로 선정됐다. 예부터 춤하면 경상도요 그중에서도 동래를 으뜸으로 꼽는다 했다. 동래춤 가운데 태가 가장 빼어난 동래학춤의 보존회원이 됐으니 이젠 마음껏 동래학춤을 연구하고 학춤 세계에 깊이 빠질 있게 됐다.

동래학춤은 예전 어떤 명무가 당시 출입복이던 도포에 쓰고 너울너울 허튼춤을 추니 누군가가 학이 춤추는 것과 같다고 학춤이라 불렸다. 이후 이왕이면 학답게 추려고 학의 동태를 연구, 동작을 가미해 발전한 것이 오늘날의 동래학춤 아니던가. 당시 김귀조, 김문수, 김필상, 최순임 선생 앞서간 학춤 명무 못지않은 학춤꾼이 돼야 했다. 이듬해 7월에는 동래학춤 보유자 후보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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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학춤 활갯짓 뜀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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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학춤 군무.

 


춤추는 시간이 가장 행복해” … 문정원 선생사사

춤의 세계는 냉정했다. 대학 기계체조하면서 다친 상처가 시간이 지나면서 덧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스승 성승민 추모공연에도 빠져야 했다. 시립무용단 수석자리도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성훈의 인생이 망가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더럭 겁이 났다. 이를 악문 고민 끝에 시작한 것이 민속춤과의 인연이었다. 그러고 보니 민속춤은 일종의 치료방편이 됐고, 재활운동도 겸해 몸의 유연함도 도와주었다. 그리고 동래 춤꾼 문장원 선생에게서 춤을 사사했다. 당시 동래학춤 예능보유자 김동원 선생과 동래고무 예능보유자 김온경 선생에게도 배웠다.

그에게 춤이란 정확한 동작과 자세에서 비롯된다는 믿음이 으뜸이며, 민속춤에 있어서는 세련미 보다 토속미가 내재해 있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특히 동래학춤이야말로 절제와 역동성에 토속미가 가미돼야 하지 않던가

춤꾼 이성훈의 동래학춤 사랑은 유별나다. 양팔을 어깨 위로 올려 마치 머리 위에 소쿠리를 받쳐 이듯 걸어가는 덧배기춤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뒷배김사위와 소매걷음사위를 사랑한다. 춤의 말미에 양팔을 허리에 얹어 장단 걸어가다 오른발 들어 오른쪽으로 배기고, 다시 장단 걸어가다 왼발 들어서 왼쪽으로 배기는 좌우배김사위를 즐겨 춘다. 그의 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지하철을 기다리면서도 몸을 움직고 목욕탕에서도 사람이 없으면 춤을 춘다. “내겐 춤추는 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예술가가 그렇듯이 그도 예술에 목말라 했다. “ 춤에 만족 못하지예, 항상 부족하고 아쉽기만 하지예.”


동래학춤 예능보유자 지정어머니께 헌사

2009년에는 문장원 스승의 권고로 10여년을 맡아오던 보존회 사무국장에서 벗어나 춤꾼으로 돌아왔다. 올해 2월에는 동래학춤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보유자 지정서를 들고 자신을 쫓아냈던 집으로 가서 어머니께 헌사했다. 당신 아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훌륭한 춤꾼이 돌아왔다고 눈물로 그간 행적을 낱낱이 말씀드렸다. 2011 이성훈의 춤이 좋아 8년간이나 짝사랑하던 여인 이나현과 늦은 결혼도 했다

춤은 발로 노닐고 악은 손으로 치고 문지르니 무릇 춤판이란 손발이 척척 맞아야 좋은 판이렸다. 춤을 보면 음악이 들리고 음악이 들리면 춤이 보이는 , 판이 작은 무대건 호기로운 놀이마당이건 춤을 부르는 소리가 있으면 춤꾼은 항상 그곳에 함께 있었던 것을. 점차 풍류를 잃어가는 시대에 그나마 풍류가 남아 있는 , 시간의 종점이기도 동래에 동래학춤이 있다.

도처에서 모여든 한량들 틈새 어딘가에서 빼어난 동래 굿거리장단이 구음선율을 타고 흐를 때면, 마리 학이 이성훈이 도포자락 휘날리며 특유의 유장한 춤으로 무릉도원의 세계를 펼쳐보이고 있음이렸다 

작성자
주경업 부산민학회장
작성일자
2016-08-30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2016년 9월호 통권 119호 부산이야기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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