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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2016년 7월호 통권 117호 부산이야기호 기획연재

무녀<巫女>에서 무녀<舞女>로 … 나는 무대에서 춤과 접신<接神>한다

부산대표 춤패 배김새 활동 26년 … 16년 대표 역임, ‘영남 춤’ 매력 알리기 헌신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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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처럼
까만 생머리, 정수리에서부터 이마까지 줄로 곧게 뻗어 내린 가르마, 말간 초승달처럼 부드러운 반달 눈썹, 정성스럽게 마스카라를 바른 속눈썹, 주름의 결을 따라 섬세하고 꼼꼼하게 메워진 꽃분홍색 입술
 

춤꾼 하연화(50) 인상은 화려하다. 연꽃이라는 이름처럼 송이 요염한 꽃을 마주하는 듯했다. 어쩌면 꽃같고, 어쩌면 무당같은 묘한 분위기의 춤꾼. 하연화는 자타가 공인하는 부산을 대표하는 중견 춤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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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춤꾼 하연화는 10 후반의 나이에 춤을 시작해 경성대 무용학과를 거쳐 춤패 배김새에서 26년간 춤을 췄다. 16년을 배김새 대표로 지냈다

 

춤과의 만남 그리고 재회

냄새 물씬한 경성대 무용학과 연습실. 쿵덕 쿵덕~ 낭창한 장구소리가 울려 퍼지는 연습실로악바리 춤바보하연화를 찾아갔다. 그녀는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모교인 경성대 무용학과 겸임교수로 일주일에 네 차례 무용실기를 가르친다. 시큼한 땀내를 방석 삼아 연습실 마룻바닥에 앉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에 극적인 드라마는 없다. 하이 톤의 음색으로 인생을 되돌아보는 속에는 신파조의 드라마대신 끈적이는 땀과 집요한 노력, 속불의 은근한 뜨거움이 이글거렸다. 그녀의 눈빛이 반짝인 이유였다.
 

저도 이렇게 오랫동안 춤을 출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춤추는 좋아서 춤만 추며 살았는데 벌써 삼십년이 흘렀네요.”
 

하연화가 기억하는 인생의 춤은 초등학교 운동회 매스게임이다.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운동회 단체 매스게임으로 부채춤을 추게 됐다. 5학년 여학생 명이 어깨와 팔을 부딪쳐가며 춤도, 집단체조도 아닌 시늉만 냈을 뿐인 춤에 어린 여자아이는 매료됐다.
 

이상했어요. 친구들은 재미없다고 하는데, 저는 너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
 

춤의 매력을 맛본 아이는 부모님께 춤을 배우고 싶다고 청했지만 어린 소녀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탓이다.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았던 여자아이는 이상 부모를 조르지 못했고, 아이는 춤을 잊었다. 춤과의 운명적인 재회는 4 후에 이뤄진다. 고교 1학년 때였다. 문과와 이과를 결정해야 시간이 다가오면서 초조해하던 여고생의 머릿속으로 퍼뜩 글자가 지나갔다. ‘이었다
 

경성대 무용학과 85학번춤꾼 하연화 탄생 예고

말고는 하고 싶은 없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춤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같아요.”
 

그녀의 인생은 고교 1학년 때부터 시작했다. 조금 늦은 출발이었지만, 번도 늦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선택한 춤은 한국무용. 초등학교 추었던 생애 부채춤의 동작이 몸속에 각인돼 있었다. 다른 춤은 생각하지 않았다. 늦게 시작한 춤에 무섭게 빨려 들어갔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곧바로 무용실로 달려가 땀으로 목욕 정도가 때까지 연습했다. 늦게 시작한 그녀가 있는 것은 연습밖에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2년을 미친 듯이 춤을 췄고, 소원대로 무용학과로 진학했다
 

경성대 무용학과 85학번. 건조한 줄의 문장을 그녀는 사랑한다. 춤꾼 하연화의 인생이 용틀임을 시작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대학생활은 단조로웠어요. -학교-연습실이 전부였어요.”
 

대학에 입학한 그해 12, 그녀의 춤인생에서 결코 떼려야 없는 사건이 생긴다. 바로 춤패 배김새의 창단이다. 은사이기도 경성대 최은희 교수가 주축이 만든 춤패 배김새는 31년째 부산 춤판을 지키고 있는 동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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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대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하연화는 제자들과도 스스럼없이 작품을 구상하고 춤을 춘다


춤패 배김새사람·사회와의 소통 배워

춤에 대한 열정과 재능을 인정받은 무용학과 여대생은 배김새 창단 이듬해인 1986년부터 무용단 공연에 참여하게 된다. 춤을 시작한지 4년여에 불과한 어린 대학생이 전문가들의 공연에 참가한다는 것은 파격이었다. 쟁쟁한 선배들과 공연을 하면서 그녀는 자신에게도 담배 씨눈처럼 작지만 소중한 재능이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그녀는 겸손하게 말했지만) 작고 보잘 없는 재능은 춤을 향한 들끓는 열정과 결합하면서 폭발한다. 그녀는 춤패 배김새를 만나면서 한여름 연밭의 연꽃처럼 화들짝 피어났다. 1989 대학 졸업 진로는 곳이었다. 춤패 배김새였다. 그녀도, 주변 춤꾼들도 배김새 행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배김새와 함께 그녀의 인생은 이후 지난 2015년까지 26년동안 이어졌다
 

배김새에서 춤에 대한 모든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혔어요. 나름의 예술철학을 가질 있었지요. 배김새는 사회와의 소통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춤은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어요. 보잘 없고 작은 공연이라고 배김새가 마다하지 않고 찾아간 것은 그런 이유였습니다.”
 

그녀가 회상하는 배김새의 생활은치열함이다. 얼마나 치열하게 생활했느냐면, 말고는 당시를 기록할 어떠한 언어를 찾을 없을 정도다.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이 , , 춤이었다. 당시 배김새는 별도의 연습실이 없어서 경성대 무용학과 연습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곤히 잠든 수위 아저씨를 깨워서 께라 주세요( 열어 주세요)”라고 말한 이도 그녀였고, 수위 아저씨가 지쳐 잠든 새벽 2, 컴컴하고 육중한 대학 건물을 가장 늦게 나가는 이도 그녀였다. 연습실에서 먹고, 자고, 춤추고, 공연을 나갔다. 공연을 마친 후에는 다시 연습실로 돌아와 지친 몸을 쉬게 했다. 연습실에서 웃고, 울었다. 연습실이 집이었고, 연습실이 우주였다.
 

이쯤에서 ~ 한숨이 나온다. “독종이었네요라는 인터뷰어의 말을재미있었어요!”라며 발랄하게 뒤집는다
 

춤이 좋아서, 춤이 미치도록 좋아서 춤만 췄다는 그녀. 춤패 배김새 정기공연은 물론이고, 예술이라고는 접해보지 못했던 소외계층, 각종 시민단체를 위해서도 기꺼이 춤을 췄다. 장소가 무대가 아니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춤을 달라는 요청이 오면 거리와 광장은 물론이고 새벽녘 바닷가까지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그녀는 자신이 올랐던 무대와 자신이 춤을 췄던 거리를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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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연화는 춤이 미치도록 좋아서 춤만 췄다. 장소가 무대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사진은 태평무 공연 모습). 

 

무대 가리지 않는 공연춤은 밥과 같은 존재

기억의 부재 혹은 소멸이 크게 낯설지 않다.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의 셈법을 이해할 있을 같았다. 그것은 그녀에게 춤은 밥이고 생명이기 때문임을 이해한 탓이다. 사람들이 지난 세월 먹은 밥그릇 수를 헤아리지 못하듯이, 그녀에게 춤과 무대는 매일 먹어서 뼈와 피와 살이 되게 하는 밥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짐작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춤패 배김새로 활동한 26 동안 그녀는 16년을 대표로 춤패를 이끌었다. 부산 문화판에서 춤패 배김새하면 하연화가 자동 연상될 정도로 배김새의 역사와 함께 해온 그녀는 얼마전 배김새 대표를 후배에게 물려주었다
 

너무 오래 했죠. 내면에서 다른 춤을 추고 싶다는 욕망이 커졌어요. 지금까지의 전통 춤과는 조금 다른, 전통춤의 본질을 간직하면서 현대적 감각을 더한 그런 춤을 추고 싶었거든요. 춤꾼 하연화의 인생 2막을 열어봐야지요. 춤꾼으로서의 승부를 던진거라고 봐야겠죠?”

 

인생 2 시작영남 매력 알리기에 헌신

<부산이야기> 그녀를 만난 이유다. 하연화가 걸어온 길은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열악한 부산 무용계가 춤이라는 고갱이를 붙잡고 혼신을 다한 땀의 기록과 궤를 같이 한다. 유료 관객을 찾아보기 어려운 춤판의 현실을 당차고, 없는 관록의 춤꾼은 헤쳐 나가겠다고 선언한다. 지금 그녀는 새로운 춤을 위해 바투 몸을 풀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현재 하연화무용단이라는 1 무용단을 이끌고 있다. 그녀의 욕심은 춤을 시작한 34 전이나 자타가 공인하는 부산 대표 춤꾼이 지금도 한결같다. 바로이다
 

그녀는 새로운 춤을 열기 위해 주말이면 스승을 찾아 배움을 청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 부산시지정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이수자, 경남무형문화재 제21호 진주교방 굿거리춤 전수자인 그녀는 새로운 춤의 길을 열기 위해 매주 스승을 찾아 전통춤을 전수받고 있다. 전통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춤을 열기 위해서는 탄탄한 전통춤의 뿌리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서다
 

부산의 춤은 다른 지방의 춤과 달라요. 부산의 바다와 산과 강이 춤사위 안에 오롯하게 녹아들어 있어요. 거칠고 투박하지만 웅숭깊어요. 자연스러움과 진정성이 영남춤의 매력이에요. 저의 인생 2막은 영남춤의 매력을 전파하고, 새롭게 만드는데 헌신할 거예요.”
 

그녀의 이름이 그녀의 운명과 기막히게 조우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 연꽃 (), (). 춤이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타고 피어나는 연꽃의 무리. 춤에 대한 열정 하나로 숱한 위기를 뚫고 춤꾼으로 꽃피운 그녀의 삶은 연꽃을 닮았다. 거대한 춤의 물줄기를 타고 오르는 작고 여린 무녀(巫女) 혹은 무녀(舞女) 부산은 품고 있다. 좋은 일이다.

 

  

작성자
김영주
작성일자
2016-06-29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2016년 7월호 통권 117호 부산이야기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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