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우리 옷 사랑 … 한복 연구 36년
Busan People / Great! 부산 / 송년순 송이전통한복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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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 자성대 서문 앞 송이전통한복연구소에서 “전통을 이어간다고 말하면서 전통을 모르고 외양만 갖추려고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토로하는 송년순 송이전통한복연구소 대표(70)를 만났다.
솜씨 좋은 어머니께 어깨너머로 바느질 배워
1층 132㎡의 작업실에 원단과 실패가 가득하고 손수 지은 옷들이 가지런히 옷걸이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업대 위에 붉은 빛이 짙게 배인 홍색 항라(가는 실의 견사로 짠 여직의 천)가 펼쳐진다. 조복(朝服) 저고리 본을 앞에 놓고 다리미질을 골고루 한다. 그리고 줄자를 펴서 치수에 따라 초크로 표시를 하고 핀으로 눌러준다. 본과 한 치의 오차도 없게끔 세심하게 확인하면서 재단한다. 표시한 점선들을 자를 대어 그리면서 온 신경을 집중한다. 눈에 익은 디자인이지만 조복이나 제복을 의뢰받을 때면 치수를 챙기고 또 챙겨서 일점일획 빈틈없이 만든다. 그런 자세와 습관이 몸에 배었다. 이런 것들은 안동 권 씨와 이응해 장군, 성산 배 씨 문중들의 출토 복식들을 연구하고 복원하면서 갖춰진 습관이다.
송년순 대표는 경남 거제시 하청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중학교 입학할 때도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를 해 입혔다. 그래도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과 어머니를 원망해 본 적이 없다. 당시 형편으로는 중학교에 다니는 것도 감사해야 했다. 숙모가 세 분이나 있었지만 그 동네에선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곁에서 눈썰미로 배운 솜씨를 외삼촌이 눈여겨 보고 “넌 누님 닮아서 옷 잘 짓는구나”라고 자주 칭찬했었다. 멀리 강원도로 명태잡이, 오징어잡이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낮에는 밭일하고 밤에는 어두운 전등불 밑에서 손바느질 하는 어머니 모습만 보고 자랐다. 그래서 어린 소녀의 꿈은 훌륭한 재단사가 되는 것이었다.
16살 중학교를 졸업하자 부산으로 와서 송도에 있는 무료기술학원 양장부에 들어가 양장의 기본을 익혔다. 6개월 과정을 수료하고 영도의 양장점에 보조로 취직했다. 19살 때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가 태풍으로 불귀의 객이 됐다. 다섯형제를 부양하는 어머니의 권유로 21살 때 철강회사 다니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어느 날 시어머니 헌 버선을 세탁해 구멍 난 곳을 바느질로 손질해 준 것을 시어머니가 보고 “얘야, 너 바느질 솜씨가 예사롭지 않구나. 학원가서 공부해 솜씨 살려 보려무나” 라고 말했다. 등 떠미는 대로 양재학원에서 6개월 과정을 마치고 학원의 추천을 받아 미화당골목의 뺑땅의상실에서 재단사 권 선생의 특별지도를 받는다. 뺑땅은 부산에서 알아주는 양장점이었다.
3년 후 창선동 부산은행 앞 지지의상실로 옮겨 김청옥 재단사에게 유행에 까다로운 의상법을 배운다. 양장은 유행에 민감해 변화가 심했다. 다시 학원으로 옮겨 봉제를 배운 것을 바탕으로 집 근처 명장동에 양장점을 개업했지만 유류파동 등을 겪으면서 양장점이 사양길에 접어들 때 서둘러 문을 닫고, 한복을 배우기로 작정한다. 아무래도 한복이 좋았다. 어릴 때 어머니 무릎 앞에서 한 땀 한 땀 뜨던 바느질이 그리웠다. 재단과 부속 봉제일을 양장에서 충분히 익혔으므로 자신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바느질 솜씨 탁월 … 타고난 한복장인
부평동 한복거리에 가서 이종련(제일한복) 선생을 만났다. 적성에 맞는 일이라 재미도 있고 일품을 빨리 익혔다. 어깨너머로 배우던 시절은 옛말이 됐다. 한복에도 양장제도를 도입해 제대로 된 멋진 한복을 만들었다. 양장일 배우면서 입체적인 디자인에 익숙했던 옷 만들기는 한복을 양장처럼 보이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우리 옷은 평면디자인인 것을 망각하고 있었던 무지도 깨달았다. 양장재단으로 익힌 솜씨를 한복에 활용해 우리 옷의 특징을 살린 옷을 만들었다.
1983년 부산진시장 도로변에 송이한복을 개점했다. 한복시장에서 전통한복은 이런 것이라고 보란 듯이 보여주고 쐐기를 박고 싶었다. 까다로운 한복 마니아들은 디자이너의 바느질 솜씨를 보고 옷을 맡기던 시절이어서 그의 솜씨를 당당히 겨뤄보고 싶은 오기도 있었다. 다른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손으로 박음질하고 바느질했다. 조카들 결혼식도 잊어버리고 오직 침선에 매달렸다. 타고난 재주가 없으면 한복 생각도 말아야 한다던 옛 어른 말씀이 옳았다. 특히 눈썰미가 뛰어나야만 훌륭한 한복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송년순 송이전통한복연구소 대표는 36년 동안 한복과 함께 하며 우리 옷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사진은 송년순 대표가 조복을 재단하는 모습).
2013년 침선장 영예 … 각종 공예대전 수상
우리 옷의 구성적 특징은 옷감을 직선으로 마름하고, 그것을 인체에 맞춰 곡선으로 바느질하는 데 있다. 입체적인 몸매에 맞도록 남은 부분에 주름을 잡거나 끈으로 고정시켜 온화하면서도 여유 있는 한국적 아름다움을 살린 형식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몸의 곡선을 따라 마름질해 몸매에 꼭 맞도록 옷을 짓는 양장(양복)과는 크게 대조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우리 옷은 평면구성이 주는 곡선의 기교가 의복에 나타난다기보다는 몸의 움직임이나 입은 방법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되므로 풍성한 아름다움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한복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2년 부산대에서 천연염색전문과정을 수료하고, 2007년 단국대에서 조선시대 여자 속옷 제작과정을 인정받았다. 건국대학교에서 침선전문과정을 수료해 2013년 4월 (사)한복문화학회에서 침선장으로 선정됐다.
2001년 12월 (사)한국무형문화재기능보존협회가 주관하는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입선했다. 그리고 해마다 출품해 특선도 받았다. 2013년 6월 제6회 한국공예예술공모전 및 문화관광상품대전 전통부문에 대상을 수상했고, 그해 제8회 대한민국 문화상품공모전에서도 대상을 받아 ‘황금골무’를 부상으로 받았다.
지난해 9월에는 ‘송이 송년순 40여 년의 길, 조선 사대부의 멋’ 전시를 부산시청에서 열어 100여 점의 작품을 소개했다. 그는 우리 전통의 고급문화를 가르치고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시는 사대부의 명품 옷을 선보이는 ‘멋 보임전’이었다. 사대부 부녀자만 누릴 수 있었던 멋을 잘 표현했다. 도포는 선비라면 누구나 입던 옷. 그는 조선시대 남자들이 얼마나 화려하게 옷을 입었는지도 보여줬다. 이런 작품 준비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54년 동안 이어온 바느질과 유물 발굴 현장에 참여해 직접 보고 재현한 경험들이 밑거름이 돼 사대부의 멋을 한껏 펼쳐 보인 것이다.
우리 옷 한복의 전통 이어지길 바라
그는 2003년부터 매주 한 차례 새벽 첫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전통한복과 관계되는 공부를 하고 돌아온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한다. 처음엔 남편 몰래 다녔으나 이젠 남편이 열혈 팬이 돼 뒷배를 봐주고 있다. 가족의 보살핌이 없었으면 결코 감당하지 못할 일이었기에 그의 가족사랑은 특별하다.
그의 우리 옷 사랑은 ‘우리 옷 패션쇼’에서도 나타난다. 1994년의 심장병어린이돕기 KBS 민속의상 패션쇼를 연 이후 부산문화회관 대강당, 주미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 진주성 특별무대, 인사동 아트센터, 사할린 주립박물관 특별전시 및 패션쇼, 국립 안동대박물관 등에서 우리 옷의 멋을 펼쳐 보였다.
1962년 학원에서 바느질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이래 무려 54년 세월이 흘렀다. 전통한복 공부와 연구만 36년이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 우리 옷의 매력에 깊이 젖었다. 그는 일정한 규칙 없이 지나치게 변화만 강조하는 한복 개량에 대한 걱정이 크다. 전통색상을 무시하고 명도와 채도 대비를 예사로 생각하며 그저 입기에 편리한 것만 생각하는 요즈음 한복디자이너들과 한복애용자들의 사고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랜 시간 동안 발전해온 우리 옷 한복의 아름다움과 멋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길 간절히 바라는 그다.
- 작성자
- 주경업 부산민회장
- 작성일자
- 2016-02-29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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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라좋다 제부산이야기 통권 제113호(2016년3월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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