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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부산문화 숨은 ‘통(通)’이 되다

Great! 부산 - 김성배 도서출판 해성 대표

내용

부산 출판계를 대표하는 도서출판 해성 김성배 대표는 부산문화계에서 독특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인물이다. 출판 - 문학 - 문화운동 - 연극을 넘나들며 전방위로 활동하는 그는 '부산문화의 마당발'로, '부산문화의 숨은 실력자'로, '섭외의 제왕'으로 불린다.

'김성배가 모르는 사람은 문화판 사람이 아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인맥은 문학·음악·영화·연극을 아우른다. 복잡한 문제가 생겼을 때 으레 호출되는 이도 그다. 꽉 막혀있던 문제도 그에게 오면 해결된다. 도깨비방망이를 휘두르는 것도 아닌데 희한하게 풀어낸다. 아이디어 뱅크이기도 하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기발함으로 부산 문화판을 선도한다. "김성배가 만들면 히트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이니, 문화기획력도 가히 독보적이다.

사진·문진우

열악한 부산 출판계에서 27년 동안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출판인이자 등단 시인으로, 문화기획자로, 소극장 대표로 24시간을 36시간처럼 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도서출판 해성이 있는 중구 중앙동의 오래된 골목이었다.

그는 예의 자투리 시간을 쪼개어 손님을 만나고 있었다. 수인사를 나누며, 그 유명하다는 '김성배의 구두'를 보았다. 깨끗하게 닦여 반질반질 광택이 났다. 얼마나 걸어다니는지 석 달에 구두 한 켤레를 갈아 치운다는 구두는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낡고 먼지 투성이일 거라는 예상은 깨졌다. 광택 나는 구두에 허를 찔렸다. 어쩐지 통쾌했다. 그의 비밀을 한 자락 알아차린 듯했다. 열악한 부산 출판계에서 망하지 않고 27년을 버텨낸 괴물이자 무관의 제왕으로 불리는 부산문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 어떻게 살아남아 전설이 됐는 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즐거움이었다.

1964년생, 만 51세. 팔자 센 용띠로 태어나 용의 비늘 한 자락을 물고 신나게 놀고 있는 김성배 씨. 그의 저력이 궁금했다.

출판·문화연구·연극 … 1인 3역 소화

Q. 명함이 3개(도서출판 해성 대표·부산문화연구회 대표·한결아트홀 대표)입니다. 본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명함만 석 장이지, 다 같은 거예요. 한 뿌리에서 나왔으니까요. 출판사를 하면서 내가 만든 책을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거예요. 자, 그러면 어떻게 알릴 것인가? 좀 다르게 알리고 싶었지요. 한마디로, 고급스럽고 지속가능한 마케팅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정공법을 쓰기로 했지요. 해답은 자명했습니다. 긴 호흡으로 가자, 이것 외에는 없었어요. 문학인구의 저변 확대, 문화예술 애호가들을 확산하는 게 바른 길이라 생각한거죠. 그래서 만든 것이 일반시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부산문화연구회고요. 연극(한결아트홀)은, 아이고, 그건 얘기가 좀 길어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그의 창업 스토리는 극적이다. 이 이야기를 위해서는 잠시 시간을 1983년으로 돌려야 한다.

고교 시절의 그는 꽤 이름을 날리던 '문청'이었다고 한다. 안도현·정일근 시인 등과 전국청소년문예대전과 전국 백일장에서 실력을 겨루었고, 수차례 공모전에 입상하면서 문재를 인정받았다. 한마디로 이름깨나 '날렸다'는 것. 작가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던 청년은 1983년 그 꿈을 멈춘다. '가난' 때문이었다. 1984년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특기 장학생으로 선발됐지만 등록금이 없었다. 가난한 살림과 홀아버지를 두고 혼자 서울로 갈 수가 없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부산에 남았고, 그를 기다린 것은 '백수'라는 이름표였다.

김성배 도서출판 해성 대표는 부산 출판계에서 27년 동안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출판인이자 등단 시인이다. 문화기획자로, 소극장 대표로도 활동하고 있다.

가난 때문에 꿈 접고 출판업 뛰어들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나니까 막막했지요. 무엇보다 먹고 살아야 했어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어쩔 수 없이 글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됐어요. 고등학교 때 문예반 활동을 하며 알게 된 류명선 시인, 최영철 시인, 신태범 소설가 등 부산지역 소설가와 시인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출판을 배웠어요."

의외다. '먹고 살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니. 출판사는 여전히 고상한 문화사업으로 인식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무언가 거창한 목적과 명분이 있었을 거라는 기대는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생존의 엄숙함 앞에서 관념의 더께를 털어내야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진솔한 이유가 있을 수 없다.

그는 부산문단의 시인과 소설가들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밑바닥부터 배웠다. 한 달 버스값으로도 부족한 월급 5만원을 받으면서도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에게는 뛰어다니는 행위가 곧 배움이었던 시절이었다.

그가 배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출판사 견습 시절이라 불러도 크게 무리가 없을 2년 동안 그는 출판 실무뿐 아니라, 오늘의 그를 있게 만든 가장 큰 능력이자 자산인 '사람'을 배웠다. 실무적으로는 출판기획·편집·제작·유통까지 전 영역을 아우르며 기량을 쌓아갔고, 또 다른 갈래에서는 '사람'을 엮고 나누고 이어가는 사람 경영법을 배웠다. 어떻게 가능했는지 물었다. 답은 간단했다.

"어려운 일을 도와주면 됩니다. 단, 진심으로 해야 합니다."

1인 출판사 열고 부산다움 내세워 전국으로 이름 알려

1989년, 마침내 그는 독립한다. 결혼 축의금을 모아 자본금 100만원으로 도서출판 해성을 차렸다. 사무실 보증금으로 100만원을 내고 나니, 수중에 돈 한 푼 없었다. 그가 헌신했던 벗들이 돕고 나섰다. 친구의 부친이 전화를, 고 윤정규 소설가가 팩스를 보내주었다. 책상·의자같은 자잘한 사무실 비품도 지인들의 기증품으로 충당했다. 그렇게 도서출판 해성은 어렵게 문을 열었다. 직원은 혼자였다. 말하자면, 이미 30여년 전에 그는 1인 출판시대를 연 것이다.

Q. 출판업 입문 5년만에 자신의 출판사를 차렸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산의 출판시장은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떻습니까, 출판사는 잘됐습니까?

"힘들었죠. 결혼은 했고, 아이는 태어났고, 살아야 했어요.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죽어라 일했지요. 창업 이듬해 '1990년 신춘문예 등단 시인 신작 시집'을 펴냈어요.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들의 작품을 이름도 없는 지역 출판사에서 만든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어요. 그 시집을 계기로 '해성'이라는 이름이 조금 알려졌지요."

이름 없는 부산의 작은 출판사였지만, 사업은 나름 순탄했다. 부산의 문화와 역사, 부산다움을 전면에 내세운 기획으로 부산은 물론이고 부산을 넘어 시나브로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슴 한켠에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다. 혼신의 힘을 쏟아가며 만든 자식같은 책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는 다시 한 번 사고를 치기로 했다. 자신이 만든 책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는 문학인구의 저변을 확대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 각종 문화사업을 진행하는 '부산문화연구회'를 출범시킨 것이다. 도서 마케팅을 위해 만든 부산문화연구회는 출판과 함께 부산문화계의 숨은 실력자라는 위상을 공고하게 해주는 양 날개가 된다.

부산문화연구회를 통해 문학청년으로서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던 구상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지역 언론사와 함께 진행한 소설강좌, 문학기행, 청소년인문학강좌, 작가와 함께하는 북 콘서트, 부산스토리텔링 강좌 등 문학과 예술 전반을 아우르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고, 부산문화연구회를 통해 현실에서 실현시켰다.

사람과 인연 중요시 … '진정성'으로 다가가

Q. 김성배 대표하면 섭외의 달인으로 불립니다. 대중강연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고 박완서, 오정희 소설가를 모시고 와서 부산문단을 놀라게 했습니다.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거나, 아니면 특별한 비결이 있다는 말들이 있습니다.

"비결요? (웃음) 비결같은 거 없습니다. 고 박완서 선생이나 오정희 선생은 일면식도 없는 분이었어요. 무조건 달려드는 겁니다. 한참 후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김성배 사장과 통화를 하면, 어쩐지 부산에 가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절박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게 비결이라면 비결이겠지요."

그가 사람을 엮는 방식은 '진정성'이다. 항상 사람이 목적이었다. 단 한 순간도 사람을 도구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실제로 지금까지 그와 크고 작은 인연을 맺은 이들 가운데에는 친동기간 이상으로 두터운 우정을 나누는 이들이 적지 않다. 출판과 문화사업을 해온 27년 동안 그가 가꾸고 지켜온 인맥들이 지금은 산맥처럼 단단하고 두텁다.

한결아트홀은 연극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사진은 연극진로체험교실에 참가한 학생들 모습).

그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출판사를 시작한 1989년부터 지금까지 하루하루가 부산의 문화사를 품고 있는 거대한 이야기의 산맥이었다. 그 숱한 이야기를 다 듣자고 작정하면 한 달로도 어림없을 것이다. 이야기를 이어가다보니 출판 불모지 부산에서 27년 동안 출판사를 이끌어온 비법 한 가지를 알게 됐다. 이 남자, 곰같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여우다. 그것도 꼬리가 아홉 개 쯤 달린 구미호라 불러도 전혀 과하지 않다.

그의 사무실 책상은 여우같은 면모를 솔직하게 보여준다. 얼핏 보아 그의 책상은 정돈돼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천만에 말씀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촘촘한 책상 지도가 그려져 있다. 1열 1횡은 사무실 결재 서류, 1열 2횡은 출판사 신간도서 기획서, 1열 3횡은 검토해야 할 출판 원고, 다시 2열 1횡은 부산문화연구회 프로그램 기안서, 2열 2횡은 각종 공모사업 제안서 초안 등이다. 그가 작성한 지도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다. 곰이라 생각했다가 여우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고치게 한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부산문화연구회·한결아트홀 계속 이어지길

Q. 당신은 아이디어 뱅크로 유명합니다.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습니까. 또 당신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보여준다.

"저는 수첩을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지하철을 탈 때나, 길을 걸어갈 때도 퍼뜩 생각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바로 기록합니다. 세상 처처가 다 아이디어의 보물창고입니다. 제가 차를 놔두고 지하철을 타고, 걷는 이유는 세상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제 마지막 꿈은, 제가 피땀 흘려 가꾼 도서출판 해성과 부산문화연구회와 한결아트홀이 백 년 이백 년 이어지는 것입니다. 제 자식들에게는 물려주지 않습니다. 누군가 열정적으로 일 할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전해줄 생각입니다. 부산에도 백 년, 이백 년 된 출판사가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메모로 빼곡한 그의 수첩을 보았다. 휘갈겨 쓴 글씨가 전기 콘센트 같았다. 말하자면 그는 세상에 거대한 콘센트를 꽂고 자신을 연결시켜두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수첩은 세상과 김성배라는 한 인간을 연결시키는 고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성.배.라는 이름 석 자는 부산 문화계에서 여러 갈래 문화의 흐름이 흘러드는 '길'이고, 문화예술인들이 그 길 위에 왁자지껄 모여드는 '시장'이고, 모여든 이들이 전을 열고 세상과 만나는 '난전'이다. 부산문화의 큰 물줄기가 그를 향해 흐르고, 그를 통해 새로운 갈래로 뻗어간다. 무정형의 정형으로 부산문화계를 아우르는 부산문화계의 마당발은 석 달에 구두 한 켤레를 갈아 신으며 뛰었던 시간의 축적이었던 것이다. 그가 몇 켤레의 신발을 갈아 신을 지 자못 궁금하다.

작성자
김영주
작성일자
2015-11-24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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