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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갑오개혁으로 천년의 恨 풀어

동래온천과 기생문화② 게이샤 대항해 권번조직 기생족보 불태워

내용

우리나라에 서구의 실용적이며 자유로운 문물과 사상이 서서히 침투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서이다. 기독교가 전파되고 실학(實學)이 자리잡으면서 상당한 문화적 충격과 갈등을 겪는 가운데 소수의 사람들이 근대사상에 차츰 눈뜨게 된다. 고종(高宗) 연간(1864∼1907)은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대외세력들 앞에 지금까지의 완고하고 폐쇄적인 빗장이 풀어지는 이른바 개화기의 길목이 된다.

갈라진 틈 사이로 봇물이 열리듯 사회 모든 부문에 걸쳐 거대한 지각변동이 예고되고 있었다. 조선을 점거하려는 여러 나라들의 알력 속에서 개화사상은 차츰 폭넓게 퍼지고 각종 사회제도의 개혁과 변화도 급속히 이루어진다.

고려 이후 천년 이상의 오랜 세월동안 면면히 이어온 우리의 기생제도(妓生制度) 또한 노비제도 등 다른 전근대적 제도의 혁파와 더불어 없어지게 된다. 먼저 1886년 고종 23년에 노비의 세습을 금지하는 부분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어 1896년에는 이태 전 동학혁명에 따른 내정개혁이었던 ‘갑오개혁’으로 공사노비(公私奴婢)를 전부 없애고 인신매매를 엄금하여 형식상 노비제도는 완전히 철폐 소멸되었다. 그와 함께 당연히 관기(官妓:관청에 딸린 기생)제도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관기제도도 사라져

노비제도가 철폐되자 하루아침에 자유의 몸이 된 전국의 공사노비와 기생들은 관아나 사가(私家)에서 보관했던 노비안(奴婢案:노비의 호적)과 기안(妓案:기생의 호적)을 한 곳에 모아 불태우며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들은 자유를 돌려준 조정의 조치에 감읍해 노비안과 기안을 불태운 자리에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동래 지역의 노비들과 기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동래 복천동 고분박물관 근처인 망월산(望月山) 비탈에 노비안과 기안을 모아 불사르고 재를 묻은 자리에 영보단(永報壇:은총을 영원히 기리는 비단)이란 공덕비를 세운다. 지금은 그 산비탈이 마을로 변했고, 마을 어귀에 있던 영보단은 ‘고분박물관(시립박물관 복천분관)’ 경내 야외전시관 입구로 옮겨져 있다. 세월의 풍우에 마모되며 묵연히 서 있는 그 비석은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옭아맨 문서의 소각을 지켜보던 그때의 노비며 기생들이 흘렸을 감격의 눈물로 다져진 듯 하다.

‘감격’ 뒤엔 냉소가

노비해방은 실로 천 년 묵은 한과 서러움의 응어리를 풀어놓는 혁명적 조치였다. 그러나 제도의 혁파나 개편이 곧 그들에게 진정한 사회적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기뻐서 날뛰는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눈은 오히려 냉담하고 조소적이었다. 또한 철저한 농경사회에서 논밭 한 뙈기 없는 그들이 설사 자유의 몸이 되었다해도 당장 호구의 길이 막연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멀리 떠나기도 했으나 결국 그들 대부분은 지주의 소작농이 되거나 종전의 주인 밑에서 천시 받으며 문서 없는 하인배나 머슴노릇을 계속하며 살아야 했다. 기생들도 형편은 같았다. 그녀들도 역시 기안이 없었을 뿐 관리나 양반들을 상대로 가무(歌舞)나 음곡(吟曲)으로 술을 팔거나 관청의 큰 연희나 토호의 잔치 등에 흥을 돋우어주는 것으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양반들의 화류 풍류도.

일제시대 매춘업 침투

한편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침탈을 노골화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전관지역(專管地域)에서 매춘업까지 시작한다. 1902년 광무(光武) 6년에는 창녀업체인 이른바 유곽(遊廓)을 만들었다. 유곽이 가장 먼저 들어선 곳이 부산이다. 지금의 중구 부평동 부평파출소가 자리잡고 있는 동쪽 일대였다. 이 지대는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전관조계(專管租界)였던 지금의 대청동 지대와 바로 인접한 곳이다. 부산에 이어 항구도시인 인천 원산 등지에도 잇달아 유곽이 생겼으며, 서울에는 2년 후인 1904년 광무 8년에 들어섰다.

일본은 1898년 일본 영사가 우리나라 궁내부(宮內部)와 동래온천 임차계약을 체결하고, 동래온천 지역의 본격적인 침탈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로운 목욕탕과 부속 여관을 지어 영업을 시작하고, 이어 요정과 요리점 상점 등으로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일본 기생인 게이샤(藝者)들을 진출시켜 번창하는 온천장 손님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그들은 ‘오끼야권번(置屋券番)'이란 조합을 결성하여 게이샤들을 공동으로 관리했다. 그러나 조선 기생의 소문을 들어 알고 있던 일본인들은 그들의 연희석이나 술자리에 동래의 기생들을 수소문해 불러들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주저하던 기생들도 한 두 사람이 나가게 되고 수입도 만만치 않자 차츰 스스럼없이 나서게 되었다. 게이샤보다는 기생들의 가야금과 거문고 연주 등을 더 즐기는 일본인들도 늘어갔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공공연하게 조직적으로 매춘업을 시작하고, 그들의 게이샤들이 동래 온천장 요정의 손님들을 맞이할 뿐만 아니라, 기생들까지 불러들이자 동래 기생들 사이에도 조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살기 위해 기예(技藝) 상품화

첫째는 일본인들의 근대적 상술을 통하여 자기들이 익혀온 기예(技藝)가 훌륭한 상품이 될 수 있다는 재빠른 현실인식이었다. 다음은 조직적이며 합리적인 ‘오끼야권번'의 운영방법을 관찰하고 자기네들도 적극적으로 힘을 규합해 활동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한 것이다. 지역 유지들 역시 나라 뺏긴 울분에다 게이샤들까지 활개를 치자 민족적 자존심이 크게 상하여 기생들을 조직적으로 부활시키자는 움직임이 움텄다.

이렇게 하여 1910년 치욕의 한일합방이 되던 해에 동래 기생들 가운데 우두머리 격인 김동년(金東年) 박난전(朴蘭田) 변비봉(邊飛峰) 등이 앞장서 옛날의 관기(官妓)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아 조합을 결성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들은 지난날 동래 교방(敎坊:관청에 딸린 기생양성소)에서 가무 음률을 지도해 온 악사들을 함께 참여시키고, 동래 유지들의 후원을 받아 마침내 동래기생조합(東萊妓生組合)을 출범시킨다. 초대 조합장은 동래교방의 행수기생(行首妓生:기생우두머리)으로 가야금의 명수였던 이운초(李雲初)가 맡았다. 동래 유지들은 지금의 동래세무서 옆 ‘중앙의원' 자리에 조합 사무실을 마련해 주었다.

동래기생조합은 1912년에 ‘동래예기조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20년 다시 ‘동래권번'으로 바꾸어 동래의 기생문화를 이어간다. 그리고 ‘권번'은 일제의 폭압 아래 점점 멸실되어 가던 우리의 전통 가무와 음률의 맥을 이어가는 소중한 산실이 된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0년 11·12월호
작성일자
2013-10-29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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