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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신라 왕들 번갈아 가며 즐겨 행차

동래온천과 기생문화① 名妓 애향·금섬 사랑 독차지

내용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온천을 이용한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국시대부터 온천을 이용하였다고 하나 지명은 밝혀지지 않는다.

문헌상 가장 처음으로 지명이 밝혀진 우리나라의 온천이 바로 동래온천이다. 1281년 신라 신문왕(神文王) 2년에 충원공이라는 재상이 동래온천에서 목욕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그것이다. 또한 신라의 여러 왕들이나 귀족들이 동래온천을 즐겨 찾았다는 이야기는 ‘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역사 자료에 자주 나타난다. 이미 고대부터 동래온천은 전국에 이름을 떨친 치병(治病)의 휴양지가 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동래온천은 고려 조선조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온천의 대명사로 확고한 자리를 지켜왔다. 특히 각종 질병치료에 효과가 탁월한 온천으로 명성이 높았다. ‘삼포개항(三浦開港) 이후 소문을 들은 일본인들도 기를 쓰며 동래온천을 찾게 되자 주민들과 마찰을 빚는 등 크게 말썽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인 1920년대를 전후하여 온천장은 일본 사람들의 손에 의해 여관과 요정들이 다투어 들어서며 근대적 온천시(溫泉市)로 발전하며 오늘의 시가지 형태를 갖추어 갔다.

60년대 초까지 신혼여행지

동래온천은 광복 후 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전국의 신혼부부들이 밀월여행지로 첫손을 꼽은 관광명소로 명성을 지켜왔다. 그러나 이후 관광개발 정책의 후진성과 단견 등으로 차츰 쇠락과 정체의 길을 걸어 지금에 이르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래온천은 조선조(朝鮮朝)의 몰락과 더불어 없어진 관기(官妓/관청에 딸린 기생)들이 가장 오랫동안 그 명맥을 이어온 고장의 하나다. 원래 관기는 지난날의 엄격한 계급사회에서 국가나 귀족계급들의 필요에 따라 제도적으로 양성한 천민계급 출신의 여성집단이다. 그들은 ‘교방(敎坊)’이나 ‘기생학교(妓生學敎)’ 등에서 짧게는 1∼2년 길게는 3∼4년간 전문적인 수업을 받아야 했다.

기녀(妓女) 혹은 기생(妓生)이라 부르는 특수한 집단이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관기제도가 있었다는 기록은 고려시대 이후부터이다. 이후 조선조에 이르면 기생문화가 절정에 이르며 그 폐해도 만만치 않았다. 연산군 폭정을 배후에서 부추겼다는 ‘장녹수’의 이야기는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한편으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기생들이 서화나 시조 등 우리나라 여성문화의 한 장을 열어놓기도 했다. 황진이 매창 부용 등 이른바 ‘삼대 기생시인(三代詩妓)’이 대표적인 명기(名技)들이다.

양반들의 화류풍류도.

기생문화 자취 최근까지 보존

관기제도는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노비제도(奴婢制度)의 철폐와 함께 폐지되었다. 그러나 기생제도의 유습은 그 후로도 오래 동안 우리의 독특한 풍습문화로서 존속해 왔다. 동래온천은 극히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기생문화의 자취를 찾을 수 있었던 전국에서도 매우 드문 관광지의 하나였다.

동래를 비롯한 부산지역은 조선조 초기까지 한낱 변방에 버려진 어촌으로서 국정상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대마도를 근거지로 왜구들이 무시로 침범하여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자 국방상 요충지로 여겨져 차츰 그 지위가 커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547년 명종 2년에 일본사신이 왕래하는 길목임을 고려하여 도호부(都護府/ 목牧 다음 가는 제4급의 지방관아)로 승격되었다.

‘동래부지’나 ‘동래부읍지’ 등의 기록에 따르면 동래부 관아에는 통상 30~40명의 관기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동래의 관기는 다른 지방에 비해 숫자도 적었고 그나마 주로 일본 사신들의 접대를 위한 외교적 목적으로 양성하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이름이 남아 전하는 동래기생으로는 ‘애향(愛香)’과 ‘금섬(金蟾)’두 사람 정도이다.

“어찌 혼자 떠나라 합니까”

애향과 금섬은 모두 임진왜란 때 자기들이 모시고 있던 사또와 함께 왜군들에게 저항하다가 순절하였다. 애향은 ‘흑의장군’으로 불리는 부산진첨사 정발(鄭撥) 장군의 애첩이었고 금섬은 동래부사 충렬공 송상현(宋象賢)의 애첩이었다. 두 사람은 타고난 미모에 재예(才藝)와 시가(詩歌)에 두루 뛰어난 명기(名技)였다.

정발 장군은 임진왜란 발발 열흘 전 전쟁을 예감하고 애향을 불러 여종과 함께 경주로 가라고 일렀다. 애향은 그러나 양산 역참(驛站/말을 바꿔 타는 곳)에서 수양모와 여종만을 보내고 홀로 성으로 되돌아간다. 정발이 크게 놀라 나무라자 애향은 눈물을 흘리며 애소한다. ‘천첩이 사또의 은총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어찌 위험에 놓였다고 혼자 떠나라 하십니까. 죽더라도 사또의 시중을 들다가 죽어 천첩의 도리를 다하겠습니다.’ 마침내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진성은 함락되고 적탄에 맞은 정발은 애향의 가슴에 안긴 채 눈을 감는다. 애향은 곁에 쓰러진 병사의 창을 받아들고 눈앞에까지 몰려온 왜군에 저항하다가 죽음을 맞는다.

왜군에 잡혀 처형 당해

금섬 역시 송부사가 왜군의 침공을 알고 여종과 함께 양산으로 피신시키려 하나 단호히 거부하며 끝까지 곁에 남았다. 그리고 동래성이 함락되고 송부사가 죽기 전에 조복(朝服/관청에서 회의 때 입는 예복)을 가져다주고자 담을 넘다가 왜군에게 포로가 된다. 그녀는 포승에 묶인 채 3일 동안 왜군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항거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전한다. 이렇게 임진왜란 때 자기가 모신 사또와 함께 죽음을 택한 두 사람은 지금 동래 ‘충렬사’안의 ‘의열각’이라는 사당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다음호에서는 관기제도 폐지 이후 계속된 기생문화의 유습으로 생긴 동래 권번(券番/기생양성소)에 얽힌 비화를 소개합니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0년 9·10월호
작성일자
2013-10-29
자료출처
다이내믹부산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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