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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치마폭 흙 담아 쌓은 왕비의 ‘왕릉’

아홉 공주 지극한 효성… 전통 미풍 단절 아쉬워
이야기 한마당 / 아홉 공주가 쌓은 왕릉

내용

여섯 부족이 어우른 연맹체로서 경주에서 형성된 신라는 국가로서 체제를 갖추면서 세력을 확장해 갔다. 신라 남쪽에 위치한 산악지대가 오늘날의 부산인 옛 동래와 기장지역이다. 그날의 동래·기장지역 부족국가는 남쪽으로 뻗어나려는 신라가 위협의 대상이었다.

부족국가 시대의 부산

그러한 사실은 삼국사기 열전(列傳) 거도전(居道傳)에 나오는데 신라의 탈해왕(기원 57∼79) 때 신라는 거도를 시켜 동래·기장지역의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漆山國)을 정복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는 신라가 서서 100년 정도에 지나지 않아 국가의 형태가 굳어지기 전이다.

정복이라 해도 신라에 예속·병합되는 데까지는 미치지 않고 신라가 가진 힘을 과시한데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그 이후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이 계속 유지·존속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이 동래가 거쳐온 자취를 밝힌 글에서는 동래를 옛날에는 장산국( 山國)이라 했는데 신라가 점령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을 두었다고 하고 있다. 이 시기는 6세기쯤의 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우시산국 거칠산국 장산국이라 한 것은 신라에 병합되기 이전 동래·기장지역에 있던 부족국가의 이름이다. 그런데 동래·기장지역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던 옛 부족국가는 5세기 무렵까지 독자성을 유지하며 주위의 침략에 버텨왔던 것 같다.
 

외침 저항한 부산의 부족국가

이 지역으로 침략해 온 외침으로는 육지로 이어져 이렇다는 경계선도 가지지 못했던 그 당시 날로 세력이 번창해 갔던 북쪽지역 신라의 남하(南下)가 가장 두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거기다가 서쪽에서는 오늘날의 김해지역 가야의 세력이 넘보고 있고 동남쪽 바다에서는 왜구의 침탈 또한 심각했을 것이다.

그러한 외침을 방어하는 데는 부족의 단합과 무력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4∼5세기에 매장되었을 것으로 보는 이 지역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무기류에서도 알 수 있다. 복천동·노포동·오륜동·두구동 고분군에서 그날의 무구(武具)인 철제의 창·칼·활촉·갑옷·투구 그리고 전투 때 쓰인 말의 머리가리개와 가슴가리개 등이 그것이다.

필자가 번거롭게 1500년도 더 될 옛날의 이곳 부족국가시대를 말하는 것은 오늘날까지 기장지역에서 전해 내리는 아홉 공주의 왕릉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이 왕릉얘기는 이 지역 역사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홉 공주와 왕릉 이야기

이 전설은 '기장군지(2001년 간(刊)'가 말하고 있다. 그 내용은 앞에서 말한 우시산국이라는 부족국가가 신라에 정복당했을 때이다. 정복 당시의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우시산국이 신라에 정복될 그 때 우시산국의 왕과 왕자는 포로가 되어 경주로 끌려가고 왕비는 공주 아홉을 데리고 산 속으로 피난을 떠났다. 당시 왕비가 아홉 공주를 데리고 산 속을 헤매다가 당도한 곳은 오늘날의 기장군 기룡리 하근마을이었다.

그러나 그곳 역시 신라에 정복된 거칠산국이 되어 주위에서 보호해 줄 리 없고, 되려 화를 입을까 하여 신분을 숨기고 움막집을 지어 거처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살 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왕비는 농사일, 길삼질, 방아찧이 등 품팔이를 하며 아홉 공주와 함께 보리죽으로 연명했다.

그 가난과 어려움은 말이 아니었다. 초근목피로 주림을 달래는 경우도 있고 공주들이 나들이를 할 때는 옷 한 벌을 번갈아 입어야 할 곤경이었다.

그럼에도 포로가 되어 신라로 끌려간 왕과 왕자의 생사가 근심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아녀자의 몸으로 경주 땅까지 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날마다 화철령 고개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달래며 소식을 기다렸다.
 

아홉 공주가 쌓은 왕비의 '왕릉'

아홉 공주를 위해 몸에 익지 않은 일을 닥치는 대로하던 왕비는 끝내 병을 얻고 말았다. 아홉공주의 지극 정성도 그 효험을 얻지 못하고 숨지고 말았다. 어머니의 시신을 움막집이 있던 기룡천 건너편 송림 속의 마당에 묻었다.

어머니를 잃은 아홉 공주는 사는 길을 찾아 이웃마을로 뿔뿔이 흩어졌다. 흩어진 공주들은 제각각의 마을에서 부녀자가 지녀야 할 행위를 보였고 그 행위는 마을 부녀자의 모범이 되어 공주들을 따랐다.

그런 가운데 해마다 철쭉꽃이 붉게 피는 3월 보름, 달 밝은 밤이면 아홉 공주는 어머니 무덤으로 모였다. 공주들은 어머니의 무덤이 초라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치마폭에 흙을 담아 무덤 위 봉분을 쌓았다. 그리고는 각자 정성으로 장만하여 온 화전과 음식을 차려놓고 제문을 지어 어머니 넋을 위로했다.

그 일이 해마다 계속되고 보니 어머니 무덤을 공주들이 치마폭으로 쌓아올린 그 흙이 높이 쌓여져 왕릉처럼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왕비가 묻힌 왕비릉인데도 "왕이 묻힌 왕릉 같다" 하여 '아홉공주가 쌓은 왕릉'이라 했다.

전설로 전해 온 그날의 자취

세월이 흘렀다. 아홉 공주의 효성과 자매간의 우애가 아홉 마을에 흩어져 살던 그 아홉 마을 부녀자들을 감동케 했다. 아홉 공주가 이승을 떠난 뒤는 공주들의 행위가 아홉 마을 부녀자의 귀감으로 어울려 들었다.

아홉 마을 부녀자들은 해마다 3월 보름, 달 밝은 밤이면 아홉 공주가 효성을 모은 왕릉으로 모여 화전과 음식을 차리고 아홉공주의 아름다운 행실을 기리는 제문을 올리고 제(祭)를 지냈다. 그렇게 올리던 제의(祭儀) 모임은 부녀들의 계모임으로 발전했다. 그 계모임은 아홉 공주를 기리는 글을 짓고 시도 쓰며 후세 부녀자들의 풍속으로 바뀌었다.

그 풍속은 연연세세 이어왔는데 몇십년 전부터 아쉽게도 끊어지고 말았다. 그때의 계모임과 지은 글모음이 어느 할머니가 보관하고 있다는 얘기가 전해졌지만 그도 찾을 길이 없다. 아홉 공주의 왕릉도 뜻하지 않은 어느 해의 폭우 때 냇물에 휩쓸려 간 뒤 자취를 잃었다.

지난날을 헤아릴 수 있는 길은 역사적 기록이다. 그러나 이 지역의 역사적 기록은 드물기 짝이 없다. 아홉 공주의 왕릉이야기는 구전(口傳)으로 내려온 전설이지만 아득한 옛날 신라와 이 지역 부족국가 사이의 연관관계를 알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그날에서 이어왔던 부녀자들의 풍속은 미풍 양속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서는 그 전통적 미풍이 단절된 게 아쉽기만 하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6년 5·6월호
작성일자
2013-08-19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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