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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생사기로에서 맞은 조국 광복

일제말 등화관제로 부산은 암흑천지… 폭격으로 불면의 밤
이야기 한마당 - 일제말 부산과 부산항

내용

일본이 패전할 것이란 말과 연합군은 제주도가 아니면 부산으로 상륙할 것이란 말이 퍼져들고 있었다. 부산주민이 입어야 할 위기가 눈앞에 다가왔다. 부산 주민은 부산을 빠져나야 한다고, 시골 연고지로 피난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것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맞는 그 벼락을 피하자"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그 날의 부산항은 일제에 내맡겨져 있었고, 일제는 부산항을 우리나라와 중국대륙을 침략하는 교두보(橋頭堡)로 삼고 있었다. 처음은 경제적 침탈이 중심이 되었다가 1937년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으로 부산항은 군사적 교두보로 바뀌어 갔다.

중국과 싸울 전쟁물자와 군사적 인력이 일본 본토에서 부산항을 거쳐가게 됐다. 그러했던 중·일전쟁이 확대되고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 되자 부산항은 태평양전쟁의 군수물자와 인력 수송의 병참기지가 되어 갔다. 병참기지가 된 부산항은 상대방의 공격목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상대방은 연합군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 그 가운데도 미군의 공격목표가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일본군은 부산항을 방어하기 위해 부산요새사령부(釜山要塞司令部)를 두었다. 그만큼 부산은 연합군의 공격을 받을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태평양전쟁과 부산항

부산요새사령부는 지금의 용호2동 동남단인 지난날의 나병환자수용소이자 용호농장으로 일컬어진 바닷가 언덕 위에 바다를 향한 포대(砲臺)를 설치했다. 바다 건너 영도의 태종대 언덕에도 바다를 향한 포대를 설치했다.

오륙도에는 일본군이 상시로 바다를 지켰다. 이 시설들은 바다에서 침공해 올 연합군의 해군에 대비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우암동과 문현동의 경계지점이 되는 산과 감만동의 산, 그리고 중구의 용두산 정상에는 하늘에서 침공해 올 공군기를 막기 위해 고사포(高射砲) 진지를 두었다. 지금의 동구 자성대에는 대공 감시대(對空監視臺)가 설치돼 있었다.

한국해양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영도의 아치섬 산 중턱에는 강력한 조명시설이 상하좌우로 회전하는 서치라이트가 밤의 바다와 하늘을 비추며 침공해 올, 밤의 해군력과 공군력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들 군사시설들은 하늘에서는 판별하기 어렵게 위장(僞裝)되어 있었고 군 종사원 이외의 접근을 엄격히 통제했다.

부산항의 부산요새사령부

지금의 부산 북항 주위에는 높은 철조망이 둘려지고 차폐막(遮蔽幕)으로 가려져 밖에서는 항만 안을 볼 수 없게 했다. 그렇게 가려진 안에서는 일본군 수송부대인 아까쯔끼(曉)부대와 아카사기(赤旗)부대 병사들이 군수물자들을 실어들고 실어내렸다. 그 물자들은 부산 북항 배후에 시설된 철도로 옮겨져 우암지역에 보관되기도 하고 지금의 서면 하얄리아부대가 군수물자 야적장이 되어 그곳에 쌓여지기도 했다.

그와 함께 지금의 국제시장 자리와 경부선 철도 시·종점인 중앙동의 옛 부산본역 앞은 1944년에서 45년 사이 시가지 소개(疏開:철수)를 단행해서 집이 없는 빈터가 되어 있었다. 이 또한 연합군의 폭격에 대비한 일이었다. 밤으로는 등화관제(燈火管制)라 하여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게 단속했다. 이 등화관제로 일제 말기의 밤은 암흑천지였다.

등화관제는 전국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연합군의 폭격에 대비한 일이었다. 만일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이 있으면 단속기관은 적에게 불빛으로 알리는 간첩이란 극단적 죄명까지 덮씌워졌다.

일제말 부산은 암흑천지

집집마다에는 땅을 파고 위를 덮은 방공호(防空壕)를 짓게 해서 적기(敵機:연합군의 비행기를 말함)가 올 때는 그 방공호에 들어 몸을 피하게 했다. 그야말로 전전긍긍의 일제말기였다. 보도관제(報道管制)도 철저했다.

보도관제란 일본군의 전황(戰況)에 관해서는 일본군부를 총괄하는 대본영(大本營)의 발표 이외의 말은 일체 말못하게 했고 그 발표 이외의 말을 할 때는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날조했다 하여 일본 군경의 무서운 제재를 입어야 했다.

1945년 4월,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한 이후 미공군 함재기의 부산지역 폭격은 심했다. 광복 직전인 7·8월이 더했다. 1945년 6월 9일에는 2대의 미군 함재기 '그라만'이 여수에서 부산으로 오는 여객선 '가모매마루'를 낙동강 하구에서 기총소사로 쏘아댄 뒤 폭탄을 떨어뜨려 침몰케 했다.

이때 배를 탄 사람은 군인도 아니고 한국인 양민 약 300명이었다. 그 가운데 20명 정도가 살아 남았을 뿐 모두가 배와 함께 수중고혼이 됐다. 이것이 부산지역 첫 폭격이었다.

연합군의 부산 폭격

7월 하순의 밤중에는 구포의 만덕고개 인가도 없는 산길에 미군 폭격기가 한 개의 폭탄을 떨어뜨리고 사라졌다. 이 폭격은 부산지역의 정황(情況)을 탐지하기 위한 연합군의 정찰적 행위로 보고 있다. 일본이 패망하는 10일 전쯤부터 미군 함재기는 계속 부산지역을 정찰하고 있었다. 그런 때는 적기(敵機:연합군 비행기) 내습(來襲)의 사이렌이 울리고 부산요새사령부의 고사포가 쏘아졌지만 맞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럴 무렵 영도에 있었던 조선중공업(지금의 한진중공업 자리)은 선박수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조선중공업에 폭탄이 떨어졌다. 용호동의 부산요새사령부자리에는 정찰기가 자주 오갔는데 그 어느 때는 B29가 4발의 폭탄을 떨어 뜨렸다.

8·15광복 나흘 전인 8월 11일의 수정동공습은 인명피해가 컸다. 이 수정동공습은 지금의 부산일보사에서 경남여고로 올라가는 길 중간에 미공군기가 밤중에 7발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폭격으로 한국인 일본인 모두 15명이 폭사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보도관제로 일체 입밖에 낼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도 일본이 패전할 것이란 말과 연합군은 제주도가 아니면 부산으로 상륙할 것이란 말이 퍼져들고 있었다. 부산주민이 입어야 할 위기가 눈앞에 다가왔다. 부산 주민은 부산을 빠져나야 한다고, 시골 연고지로 피난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것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맞는 그 벼락을 피하자"는 것이었다.

'생과 사' 기로에서 맞은 해방

그래도 일본 군부의 대본영은 일본군이 연전연승(連戰連勝) 하고 있다고 거짓 보도를 하고 있었다. 그 무렵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마침내 연합군에 무조건항복을 했다. 부산주민은 사지(死地)에서 살아난 환희였다. 9월 16일에는 미군 24군단 제6사단이 부산에 진주했다. 그 동안 부산요새사령부가 구축한 부산의 방어시설은 진주한 미군이 접수했다. 미군의 전리품(戰利品)이 된 것이다.

만일 일본의 패전이 얼마라도 늦어졌으면 그 긴박 속의 부산은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8·15광복은 생사(生死)의 기로(岐路)에서 얻은 값진 것이었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5년 9·10월호
작성일자
2013-07-2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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