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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풍기문란 장본인 일본의 부랑인들

이야기 한마당 - 그 날의 일본인 그들의 여권(女權)

내용

일본의 바닷가 남정네들이 해적(害敵)이 되어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곡식과 가금(家禽), 심지어는 사람까지 약탈해 간 것은 신라에 이어 고려 때는 그 정도가 심했다. 그 해적떼를 우리 쪽에서는 '왜구(倭寇)'라 했다.

그 왜구를 유화(宥和:너그럽게 용서하고 화합함) 하기 위해 조선시대 초인 1407년 우리 정부는 부산에다 그들의 장사터인 왜관(倭館)을 지금의 동구 범일동의 자성대(子城臺) 서북쪽 자리로 정해 주었다.

그런데 그 왜인들이 장사물건을 가져오면서 놀아난 여자인 유녀(遊女)까지 데리고 와서 남녀가 어울려 술자리를 벌이며 추잡한 짓거리로 풍기문란을 일으키는 바 컸다.

왜구로 인한 '풍기문란' 심각

그러한 사실은 1418년 3월의 우리나라 기록인 태종실록에도 실려 있다.

부산에 둔 왜관은 임진왜란 뒤 지금의 수정동으로 옮겨지고 1678년에는 지금의 용두산 주위로 옮겨졌다가 1876년 부산이 개항되자 일본은 용두산 주위의 왜관자리를 1년에 50엔(圓)씩 조선정부에 내고 조차지(租借地)로 땅을 빌렸다. 그 자리를 일본인 전관거류지(專管居留地)라 했는데 지금의 광복동과 동광동 지역이 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부산에 머물면서 일본어로 부산부사원고(釜山府史原稿)를 쓴 일본인 도갑현경(都甲玄卿)이 쓴 글에 의하면 개항과 동시에 부산의 우리 땅을 빌린 3년 뒤의 1879년 7월 22일에는 일본인 거류지를 관리하는 관리관청이 주민의 대표가 되는 일본인 용번중(用番中)에게 예창기취체(藝娼妓取締)의 공문을 내고 있다.

그 공문 내용은 요리영업에 종사하는 작부(酌婦)에 창기(娼妓:몸을 파는 여자)에 유사한 여자를 고용한 업소가 있는데 이들이 매독(梅毒:성병)을 전염시키지 않도록 특히 유의하라는 것이다.

그 3년 뒤인 1882년 9월 27일에는 정식으로 일본 총영사가 예창기영업감찰(藝娼妓營業鑑札)이라 하여 허가를 받아 창녀영업을 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니 제나라 땅도 아닌 남의 나라에서 자기 나라 남성들을 위해 자기 나라 여성을 데리고 와서 인육시장을 차리는 일을 공식화했다.

그런데 그때의 그들도 공창으로 허가를 받은 매춘(賣春)의 창녀집이 그들만 사는 일본인거류지 주택가에서 벌어지다 보니 아이들 교육뿐 아니라 어른들 자체의 풍기에도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남의 땅에서 버젓이 매춘

그래서 그때로서는 주택가에서 얼마간 떨어져 있는 새티벌의 사안교(思案橋) 동쪽 벌판으로 1902년 7월에 유곽을 옮기게 했다고 한 기록이 있는데 그 자리는 오늘날의 부평동의 부평시장 아래쯤이 된다. 그 사안교는 승수천(繩手川:지금의 광복동을 흐르는 내·일본인은 '나와데가와'라 했음) 위에 놓인 다리였다. 말하자면 매춘업(賣春業)의 유곽을 주택가에서 멀어진 곳으로 한데 모은 것이다.

그런데 이 유곽거리가 또 번창을 하는 한편 일본인의 일반 주택가가 이곳까지 밀려들었다. 그게 그렇게 된 것이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에서 오는 일본인은 일본 본토에서 쫓겨난 무지렁이 부랑인이 많았다.

그 부랑인들이 외국으로 나와 번 돈을 계집과 놀아나는 유흥비로 마구 써댔다. 유곽이 번창할 만도 했다. 사안교 쪽으로 옮긴 유곽이 그렇게 번창해 오면서 몇 해가 지나자 일본인 거류지 주택이 사안 쪽으로 발전해 갔다.

일본거류민단에서는 사안 쪽으로 발전해 오는 주택가를 위한 풍기문제가 또 대두되자, 지금은 충무동이 되어 있는 옛 완월동(玩月洞)으로 유곽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때 옮기게 한 기한을 3년으로 한 결과 완전히 옮겨진 것은 1911년이었다.

완월동으로 옮길 그때의 완월동 주위는 집이라고는 없는 가파른 산비탈이었다. 그래도 유곽이 서고 술집과 가게들이 서고 보니 하나의 마을이 되어 그 마을을 '미도리마찌(綠町)'라 했다. 그 미도리마찌는 광복 후인 1947년 일본식 동리(洞里) 이름을 우리 이름으로 바꿀 때 완월동이 되었다. 이 완월동은 1959년 충무동에 병합되었다.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의 역사

그런데 그 날의 일본인이 가진 남성위주의 여성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할 점이 적지 않다. 그 하나는 우리 정부의 승인을 얻어 일본측이 경부선철도를 부설하는 1901년에서 1905년 사이의 일이다. 그 철도부설로 일본인 기술자와 노동자가 이곳으로 몰려왔다. 그런데 이 공사의 일본인을 위해 일본인 매음부(賣淫婦)까지 온 것이다.

그때의 이 얘기는 그때의 사실을 본 일본인 모리잇베이(森一兵)가 쓴 일기에도 나타나 있다. 글의 일부를 소개하면 "경부선철도부설 연변으로 온 일본상인은 철도공사를 하는 일본 일꾼을 상대했다. 여관과 하숙업을 하는 상인은 매음부를 두고 추업(醜業)을 겸한 바가 많다"고 했다.

그러니 그들은 남의 나라에서 철도공사를 하는 그 자리까지 그들 일본인 매음부를 데리고 왔다.

그런 그들이고 보니 그들이 억지로 내세운 팔굉일우(八紘一宇:세계를 통일하여 하나의 집처럼 한다)의 성전(聖戰)이란 태평양전쟁의 그때도 세계 전쟁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정신대(挺身隊)란 이름으로 여자를 전쟁터에 보낸 게 아닌가. 그 정신대도 자기 나라 여자가 아닌 식민지 또는 점령지 여성이었다.

이는 인류사상 유일무이의 패륜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인류사는 그에 대해서는 아직도 말이 없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4년 1·2월호
작성일자
2013-05-10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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