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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나라 잃은 젊은이의 애달픈 사연

이야기 한마당 - 강서구 녹산동 ‘항일무명용사 위령비’ 유래

내용

인류 역사에 자기 나라 젊은이에게 총칼을 주어 남의 나라를 침략 강탈하게 하는 위정자처럼 무도(無道) 악랄한 경우가 어디 있을까? 더욱이나 그 젊은이에게 팔굉일우(八紘一宇 : 온 세상이 한집)라는 둥 동양평화라는 둥 사리를 왜곡한 엉뚱한 말로 한창 팔팔한 기상의 젊은이를 현혹케 하여 전쟁마당의 죽음터로 보내는 그 무자비가 또 어디 있을까?

인류애 짓밟은 일본제국주의

인류는 평화와 자유를 근본이념으로 한다. 그 근본을 짓뭉갠 것이 20세기 전반기의 일본이었다. 그들은 우리나라를 무력을 앞세워 1910년 무혈점거를 한 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지역을 석권하고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동남아지역까지 무력을 뻗쳤다.

그럴수록 젊은이의 소모는 많아지면서 인력이 모자랐다. 마침내는 우리의 젊은이까지 전쟁마당에 보낼 계략을 세웠다. 반대의견도 없지 않았다.

한국인에 총칼을 줄 때 그 총칼을 그들 일본을 향해 되돌릴 수도 있다는 불안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확대되는 전쟁을 그들 젊은이만의 소모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1938년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조선지원병제도를 공포했다. 우리나라 젊은이도 일본군에 지원할 수 있다는 제도였다. 그들로 보아서는 시험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지원하는 지원이 아니라 강제가 작용했다. 그들은 강제이자 관권(官權) 지원병의 수가 생겨나자 일제의 눈이 어두운 고위직 위정자는 강제성을 띤 사실을 모른채 한국인 젊은이도 그들에 동조한다는 착각을 하게 됐다.

1943년 3월 일제는 조선인(한국인)에게도 징병제도를 공포하여 우리나라 젊은이도 20세가 되면 일본군에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1943년 10월에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전문학교와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에게도 학병제를 실시하여 군에 들게 만들었다.

그만큼 일제는 전쟁마당에 보낼 인력보급이 다급해지고 위험부담을 느끼면서도 우리나라 젊은이까지 전쟁마당에 보내게 되었다.

강제로 끌려간 우리의 젊음들

그렇게 전쟁마당에 끌려가는 건 조국에 총칼을 겨누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피할 곳도 숨을 자리도 없었다. 일본의 경찰과 헌병의 경계와 수사가 철통같았기 때문이었다.

요행히 대륙전선으로 끌려간 젊은이는 그곳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 들기도 하고 대륙을 전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만에 일의 요행을 얻는 일이었다.

강서구 녹산동에 세워진 항일무명용사 위령비(抗日無名勇士慰靈碑)는 이 나라 젊은이의 뼈저린 아픔을 대변하고 있다. 그 일은 1945년 8월15일 오전 10시쯤이었다.

그 때 입은 군복으로 보아 가덕도에 있던 일본군 육전대(오늘날 우리 군대의 해병대) 훈련소 훈련병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젊은이가 이대로 훈련을 마치면 조국에 총부리를 겨누는 일이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 훈련병이 밤을 이용하여 탈출을 감행했다.

그는 바다를 헤엄쳐 육지에 닿았다. 그러나 허둥지둥 달려가는데 그 탈출병 뒤를 일본 헌병 둘이 뒤따라 쫓았다. 달려가는 탈출병은 피할 곳도 없었다.

강서구의 장락마을 처녀골 바위벼랑 뾰죽바위(이 바위는 1970년 김해비행장 공사 때 없어졌음) 위로 치달아 올랐다.

뒤쫓던 일본 헌병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총소리와 함께 탈출병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몸을 공중으로 날렸다. 그들에게 잡히는 것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결심한 것 같았다. 탈출병은 50길이나 될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광복 두시간 전 목숨건 탈출 시도

시체는 일본군이 임시로 만든 들것에 가마니를 덮고 가덕도 뱃길 나루터로 향했다. 그것은 연합군(미국 영국 프랑스)에 일본 왕이 항복을 알리는 1945년 8월15일 정오에서 2시간 전의 일이었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도 애달픈 일인가. 그때 그 상황을 본 녹산동 사람은 그날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한다. 그럴수록 그 탈출 거사(擧事)가 하루만 늦었다고 해도 그 젊은이는 진정의 "대한민국 독립만세"로 환희작약 했을 것 아닌가. 아쉬움이 더하다.

그 아쉬움과 애달픔 그리고 그의 조국애를 기리어 1995년 8월15일 광복50년을 맞아 녹산문화회관(당시 관장 황규성) 회원이 중심이 되어 그날의 현장인 녹산동 산 2의 4번지 처녀골 입구에 '항일무명용사 위령비'를 세우고 해마다 이름도 고향도 알 수 없는 그를 8월15일이면 동민들이 위령제를 올려 그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3년 7·8월호
작성일자
2013-04-18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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