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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꼭 꼭 숨어라, 술 추러온다”

이야기 한마당-산성막걸리와 누룩전쟁

내용

오늘날 산성(山城)마을이라 하면 염소불고기와 오리불고기 그리고 산성막걸리를 떠올린다. 부산에서 산성마을이라 할 때는 금정산 산성에 휘둘린 440세대 1천350명을 수용하고 있는 산 속 마을 '금성동'을 말한다. 그런데 산성마을을 말할 때면 국씨(麴氏)와 두씨(杜氏)가 나오면서 이들이 아주 옛날, 산성마을에서 양주업(釀酒業)을 해 왔는데 임진왜란 때 전 마을사람이 왜군에 납치돼 가서 폐촌이 되었다(부산 변천사 : 박원표 지음)고 하고 있다.

금정산성 별미 '산성막걸리'

한데 하필이면 술을 빚는 누룩을 뜻하는 누룩국의 국(麴)씨에다 두강(杜康)이라 하여 중국 고대에 처음으로 술을 만들었다는 두강의 성인 두(杜)씨가 산성마을에 살았을까?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산성마을에서 양주업을 했다는데 임진왜란 이전에 그 산성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술을 빚었을까? 또 누가 술을 마시기 위해 그 산 속으로 올랐을까? 아무래도 산성막걸리가 이름이 나고 보니 후세 사람들이 짜 맞춘 말일 것만 같다.

그러나 산성막걸리는 그 풍미가 예로부터 이름이 나 있었다. 산성지역은 지하에서 솟는 물이 맑고 술을 빚는 누룩 또한 산간의 기후로 질이 좋게 띄워진다. 빚어진 술의 맛도 여느 막걸리에 비할 바가 아니게 뛰어나다.

그러면 산성막걸리는 언제부터 빚어졌을까? 그건 금정산성이 1703년에 준공을 보았다 하니 산성을 쌓는 그때부터 산성막걸리가 빚어졌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돌로써 석성(石城)을 쌓는 일은 중노동이다. 중노동에는 노동에너지를 촉진하는 술이 필요하다. 그런데 10리가 넘는 동래나 구포에서 술을 구해온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래서 성을 쌓는 그때부터 현지인 산성 안에서 술을 빚어 노동에너지를 보충했을 것이다.

길이 1만7천377m, 성벽 높이 1.5m∼3m의 방대한 성을 쌓는 그 몇 년 사이도 그렇거니와 성을 쌓은 뒤 성안에는 좌기청(座起廳), 군기고(軍器庫), 화약고(火藥庫), 내동헌(內東軒), 별전청(別典廳) 등이 있어 군사가 항시 주둔했을 뿐 아니라 성을 지키는 수비군사도 항상 있었다.

그들은 남정네들이다. 술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술을 공급하기 위해 성안의 산성마을에서 누룩을 띄우고 술을 빚는 일을 업으로 하는 집이 들어섰을 것이다.

산성 축조로 탄생한 산성막걸리

그런데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자 일제는 산성의 군사시설을 모두 파괴하고 무기를 압수했다.

주둔 군사도 성을 지키는 수비군도 없어졌다. 마을사람의 생계수단이던 술 양조가 필요없게 되었다.

거기다 일제는 주류 양조장을 허가제로 하여 주세(酒稅)를 무겁게 매겼다. 그러면서 일반인이 술을 빚을 때면 밀주(密酒)라 하여 법의 제재인 벌금 또는 인신의 구류를 입어야 했다. 세무서와 경찰의 단속으로 농사철의 농주도 허가 받은 양조장에서 받아 와야 했다. 제사나 잔치 술도 양조장 술을 써야 했다.

산성사람들은 큰 난관에 부딪쳤다. 그러면서도 설마 이 산성까지 밀주단속을 오랴 싶었다. 술은 팔리지 않는다 해도 술을 빚는데 원료가 되는 누룩을 띄워 팔기로 했다.

일반 시내 주거지에서는 밀주단속에 걸려 누룩을 못 띄우고 있었다. 누룩은 밀을 굵게 갈아 반죽을 해서 띄우는데 산성에는 집집마다 누룩 띄우는 흙집이 생겨났다.

그렇게 띄운 누룩은 산성을 오르내리는 길짬에서 때때로 지키는 세무서 직원과 경관을 피해 동래와 구포로 가져갔다. 가져갈 때는 풀짐이나 삭정이 나뭇단 속에 넣기도 하고 푸성귀를 이고 가는 푸성귀 속에 빻아 넣기도 했다.

누룩 팔아 학비벌이

산성이 누룩 생산지로 알려지자 세무서 직원과 경찰이 불시에 밀주(누룩) 단속을 나오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데 그때 산성으로 오가는 길은 큰 길이 아니었다. 오솔길인 외길이었다. 그 오솔길에서 단속반이 오는 것을 본 산성사람은 남녀노소 없이 누구나 되돌아 달려오면서 "술추러 온다!"라고 목이 터져라 마을을 향해 소리쳤다. 산언덕에 높이 올라 소리치기도 했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릴레이식으로 계속 전해 마을까지 닿게 했다.

마을에 그 말이 전해지면 가졌던 누룩을 집밖의 바위 아래나 나뭇짐 아래나 풀숲에 숨겼다. 단속반이 물으면 누구나 모른다고 시치미를 뗐다. 증거를 잡지 못한 단속반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산성누룩이 동래와 구포 지역의 밀주조성에 크게 역할을 했다. 동래 지역의 쌀값은 산성누룩에 따라 오르내린다고 할 정도였다.

산성에서 동래장이나 구포장으로 가는 아낙네는 만삭의 배를 가진 사람이 많았다. 그 배는 누룩장이 치마 안에 감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산성에서 동래로 중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책가방 속에 누룩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방 속 누룩까지 조사할 단속반은 없었던 것 같다. 그 가방 속 누룩은 시장에 넘겨지면서 그 학생의 학비가 되었다.

시장으로 간 그 누룩은 비밀리에 가정집으로 팔려 제사와 잔치를 위한 밀주 담기에 쓰였다. 광복 후에도 국세인 주세(酒稅)를 올리기 위한 술의 전매는 계속되었다.

그래도 산성마을 사람은 등산객 산유객(山遊客)을 위해 좋은 술을 빚고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오늘날 염소와 오리불고기 들도 산성막걸리의 명맥을 잇기 위한 방편이었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3년 1·2월호
작성일자
2013-04-09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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