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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빼앗긴 땅을 찾는 농민의 함성

이야기 한마당 ‘처녀지 강서구의 과거사’
농민항쟁으로 김해·마산교도소 부산사람으로 넘쳐나

내용

일본제국주의자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유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얘기로 '부산형무소는 김해사람 빠지면 형무소가 텅텅 빈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이 김해사람의 형무소 이야기는 일제(日帝)때 일제에 항거한 소작쟁의(小作爭議)와 농민운동을 한 나머지 감옥에 간 것이지 파렴치범이 되어 간 것은 아니다.

농민운동으로 억울한 옥살이

그때 소작쟁의와 농민운동을 한 김해사람은 오늘날의 부산 강서구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오늘날의 강서구는 가덕도를 제외하고는 삼각주(三角洲) 평야지대다. 지금은 제방(堤防)이 쌓이고 수리시설이 갖춰져 농사짓기에 적당한 곳이 되었지만 지난날에는 갈대밭인데다 낙동강 홍수로 농사일을 옳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농토가 귀한 우리나라고 보면 비록 홍수에 무방비상태라 해도 오늘날의 강서구 지역 곳곳으로 둔치도(屯致島)가 형성되어 갔다.

둔치도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농토를 일구어 자리잡았다' 하여 모일 '둔(屯)' 이를 '치(致)'의 둔치도였다.

이렇게 물길 따라 형성된 둔치도는 언제 섬이 홍수로 실려 내릴지 아니면 더 불어날지 몰랐다. 말하자면 불안정한 하천부지(河川敷地), 고수부지(高水敷地)들이었다. 그러니 토지대장에도 지적도(地籍圖)에도 올릴 수 없는 불안정한 땅이 많았고 그러한 땅을 경작하는 가난한 우리 농민이 많았다.

그런데 1912년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통해 토지조사령을 공포하여 우리나라 사람에게 자기 소유토지를 관에 신고하게 했다. 그때 오늘날의 강서구에서 삼각주 갈밭을 임의로 일구어 경작하던 사람들은 그 땅이 토지대장에도 지적도에도 없는 터라 소유토지로 신고할 수도 없었다.

일제 강제로 국유지 편입

일제는 그러한 삼각주 토지인 하천부지, 고수부지에 측량을 하여 지번, 지적을 올려 국유지로 삼았다. 그렇게 국유지로 삼은 땅을 일제는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에 팔아 넘겨 동양척식회사가 수리시설을 하고는 소작을 주거나 개인에게 팔아 넘겼다.

동양척식회사의 땅이 된 그 땅의 거의 대부분은 일본정부로부터 이주금(移住金)을 받고 온 일본인 또는 일본인 거부(巨富)에게 팔렸다. 일본인이 우리 땅을 많이 가져 이 곳을 일본땅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일본인들이 경작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동안 그 땅을 경작하던 우리나라 사람이 소작인이 되거나 소작료를 많이 줄 우리나라 사람에게 소작을 맡겼다. 이 때부터 강서구 지역에서는 일본인과의 토지소유권 다툼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감옥에 드는 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동양척식회사의 횡포

우리나라 농민이 소작인으로 전락한 것도 서러운데 해마다 소작료가 많아지는 게 문제였다. 이 소작쟁의는 개인 또는 집단으로 일어났는데 이 쟁의를 일본의 식민지정책이 부채질하고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정책이란 일본사람을 우리나라에 이주시키는 일이었다. 자기나라 국민이 식민지로 옮겨가야 그 지역을 세력화한 뒤 자기나라로 굳힐 수 있었다. 그러려면 식민지의 농민을 피폐케 하여 농토를 잃게 하는 대신 자기나라 사람을 재벌화해서 식민지의 땅을 많이 갖게 하는 일이었다.

그 예로 부산에서 부동산왕으로 불린 일본인 하사마(迫間)만 해도 1931년에 소유한 토지가 4천435정보(町步)였다고 한다. 1정보를 9천917㎢으로 잡으면 어마어마한 면적이다.

그러면 그 하사마와 강서구 가락동 해포(海浦 : 가락동의 둔치도 위쪽) 지역 하사마농장 소작인 사이에 일어났던 소작쟁의를 예로 들어 그 날의 양상을 생각해 보자. 일본인 하사마농장의 농민시위이자 소작쟁의는 1930년 6월이었다.

6월 중순이라면 모내기를 해도 늦을 판인데 모내기 나온 우리나라 농민들은 한낮이 넘도록 모내기를 하지 않고 농민조합의 깃발을 앞세운 채 논두렁에 둘러앉아 있었다.

소식을 들은 일본인 농장장과 한국인 지배인이 달려 왔다. 농민 대표인 배종철(裵鐘哲)과 허성도(許晟道)씨가 농민들을 대표해서 소작료를 줄여 줄 것을 요구한 요구서를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논두렁을 뭉개 물꼬를 헐어버리는 등의 집단 저항행동으로 들어갔다. 이 집단행위는 김해 시가지까지 진출한 시위로 발전했다.

소작료 인상에 집단 항쟁

1931년 11월에는 소작인 200여명이 부산에 있는 경남도청과 하사마농장 본점에서 3일 동안 돗자리를 펴고 항의를 했다. 이 같은 소작인 항쟁은 장날과 노동절, 광주학생의거일 등 기념일을 택한 군중시위로 계속되었다.

이 항쟁이 계속되는 사이 일본경찰에 잡혀들어 형무소 신세가 되고 보니 부산형무소건 마산형무소건 부산사람은 계속 이어져 곤욕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했던 그 날의 강서구지역 농토는 지금 부산시의 발전전략으로 공업단지 원예단지 등 갖가지 청사진이 '그려졌다, 지워졌다' 하는 가운데 처녀지처럼 과거를 숨긴 채 고운 청사진만 그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2년 9·10월호
작성일자
2013-03-28
자료출처
다이내믹부산
제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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