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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그 많던 보물은 다 어디로 숨었을까

이야기 한마당 ‘사라져 버린 적기만의 해저보물’

내용

일제 때 오늘날의 중구·동구·영도구에서 남구 우암동 쪽을 보면 우암동의 배산(背山)이 되는 우룡산(牛龍山)이 벌거숭이산이 되어 벌겋게 보였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붉게 바다로 내밀린 곳'이라 하여 아까사끼(赤崎 : 적기)라 했는데 그 말을 따라 그 앞의 바닷가 오목하게 들어간 곳을 적기만(赤崎灣)이라 했다.

이 적기에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군 아까쯔기(曉)부대가 군수물자를 관리하고 있었다. 이 군수물자는 일본에서 들어와서 대륙의 전쟁터로 가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 때의 부산항(오늘날의 북항)은 부산요새사령부의 요지로 둘레는 철조망이 둘리고 차폐장치가 되어 바깥에서 항구를 볼 수 없는 비밀지대였다. 그래서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어 부산항 내부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다.

일본 군수물자기지 적기만

그런데 광복 후 적기만에 해중동굴이 있어 그 동굴에 금은보화가 감춰져 있다는 풍문과 함께 신문에도 여러 차례 보도되어 세간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그것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만주와 중국지역에서 일본군이 강탈한 수조원대의 금은보화가 일본으로 가져갈 기회를 놓쳐 적기만의 해저 잠수함도크에 매몰돼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보물을 파묻은 당시의 부대사령관은 기지의 내부지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도망쳐 갔는데 20여년이 지난 1960년대 후반 김모씨가 그 지도를 입수했다는 것이다. 지도를 입수한 김씨는 일제 때 일본 항공대를 나와 일본 자위대에 근무하다 당시의 잠수함기지 사령관 다카시마의 여동생과 결혼한 뒤 처남으로부터 지도를 입수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그 지도를 따라 보물찾기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산만 탕진한 채 1977년에 작고했다.

김씨가 작고하자 김씨와 함께 보물탐사를 하던 정모씨가 다시 탐사를 벌이게 되었는데 1979년 12월 수중통로·인공굴 등으로 짐작되는 해저시설물을 발견하고 해저에 설치된 레일과 어뢰 1정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런데 매장물을 발굴하려면 당국의 발굴허가를 받아야 했다. 정씨가 1982년 육군본부에서 발굴허가를 받자 재력가들의 자본이 모여들었다.

발굴팀은 연합철강 매립지와 주위 매립지 등 여러 곳을 시추했으나 이렇다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는데 ○○단 영내에 들자 지하기지 출입구로 추정되는 철판과 지하콘크리트 구조물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구조물을 발견한 때는 발굴허가기간이 끝난 뒤였다. 그래서 1983년 9월15일로 탐사작업이 중단되었다.

탐사를 중단한 탐사팀은 미련을 버릴 수 없어 1990년 발굴을 계속할 수 있도록 육군본부와 당시 발굴업무를 관장했던 부산군수기지사령부 그리고 청와대에 여러 차례 탄원서를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적기만 보물에 관한 풍문

한동안 수조원대의 노다지 보물창고란 말이 오가던 적기만의 보물창고는 미결(未決)의 아쉬움을 남긴 채 잠잠해졌다.

그런데 그러한 보물은 과연 있었을까(?). 그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일본은 1937년부터 중국 영토에서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전역을 석권하다시피 하고는 동남아지역으로 전쟁을 확산,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으로 발전시켰다.

이 전쟁은 일본의 세력화를 위한 영토확장이자 자본탈취였다. 이 두 가지 일을 일본 군부가 전횡했는데 군인으로 하여금 살육의 침략으로 진격하면서 군속(軍屬)이 뒤따르며 동적자산을 약탈하였다. 말하자면 총칼로 휩쓸고간 뒤를 군속들이 그 지역의 금은보화를 탈취했다.

그렇게 탈취한 물품들은 계속되는 전쟁의 군자금 일부가 되어갔기에 일본 군부의 군속이나 시조오해이(輜重兵 : 치중병)는 전쟁터의 후방에 있다해도 그 임무는 막중했다.

그때 중국 전토에서 착취한 귀금속은 한곳으로 모아져 비밀리에 수송됐는데 중국과 만주의 철도를 거쳐 경의선·경부선을 통해 일본으로 수송됐다. 말하자면 고가의 전리품(戰利品)이 수송된 것이다.

그런데 적기만에 묻혀졌다는 전리품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승산이 없자 중국에 있던 모든 금은보화를 몽땅 모아 맨 마지막으로 가져왔을 것으로 본다. 그렇게 부산까지 가져왔으나 패전으로 대한해협이 연합군에 봉쇄되어 운반의 길이 막히자 적기만의 동굴에 넣고는 묻어버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영원한 수수께끼 적기만 보물창고

그런데 이 이야기 가운데 잠수함도크라 하고 지도를 가졌던 일본인이 잠수함기지 사령관이라 하는 데는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적기만이 있은 오늘날의 북항은 수심이 얕아 물 속에 잠기는 잠수함이 오갈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잠수함도 크다 하는데 잠수함 한 척이 도크에 든다해도 높고 넓은 면적이 소요될 것이다. 적기만의 수심은 10m 정도다. 더욱이 잠수함도크가 있었다면 도크가 위치한 위의 육지는 시가지이다. 시가지 아래 잠수함도크를 구축했다는 것도 의문스럽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종전 무렵 그날의 적기만에 해중 시설물을 구축한 사실은 있은 것 같다. 지난날 보물매장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될 때 그때의 적기인 오늘날의 우암동 사람들은 잠수함도크인지 무언지는 모르지만 일제 말기에 큰공사가 있은 것은 사실이라 한 그 말이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후 바다의 매립이 거듭되어 그때의 지세와는 크게 다른 그날의 적기만(현재의 우암만)이 되었다. 만일 그 보물창고가 있었다해도 현재는 바다에서 아주 멀어진 상태일 것이다. 적기만의 보물창고, 어쩌면 영원한 수수께끼에 묻힐지도 모를 일이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2년 7·8월호
작성일자
2013-03-25
자료출처
다이내믹부산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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