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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일본 사신 맞은 ‘연향대청’에서 유래

부산의 지명 유래 - 중구 대청동(大廳洞)

내용

중구 대청동에는 용두산 주위에 초량왜관(1678년∼1876년)이 있을 무렵 연향대청(宴饗大廳)이 있었다. 그 위치는 광일초등학교 자리가 된다. 연향대청은 일본에서 사신이 올 때면 부산첨사나 동래부사 또는 일본측 사신의 위계(位階)를 따라 그에 합당하게 경상감사나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이 상대방 사신을 맞아 국가간의 외교적 상담에 임하는 자리였다.

그러한 외교적 회담 이전 또는 이후 사신들을 접대하는 향연이 있어서 연향대청이란 이름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 사신은 한양(서울)까지 올라갈 수 없어 일본과의 외교절차는 동래부가 전적으로 맡고 있었다. 그러한 국제회의 자리다보니 우리 정부는 웅장하고도 화려하게 왜관 밖인 오늘날의 대청동에다 크게 지었다.

1876년에는 부산 개항과 함께 지난날의 왜관지역이 일본인전관거류지가 되고 1890년에는 일본인전관거류지의 일본인이 부민동 지역을 사들여 시가지를 확대하면서 동래부에 동명(洞名)을 이름지어 주기를 요청해서 동래부는 이를 승낙하여 연향대청이 있는 자리라 하여 대청동(大廳洞)이라 이름한 것이다.

혹들 이 대청동이나 보수동 부평동 대신동 부민동 들을 일제(日帝)가 지은 동명이란 말이 있으나 그게 아니다. 그런 이름이 지어진 것은 1890년으로 한일합방 20년 전이다. 개항으로 일본인전관거류지의 일본인이 땅을 사들여 가며 살았다 해도 우리 국토다. 그래서 우리 정부의 동래부가 동명을 짓고 조선 정부의 동래부 관할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대청동에 일제강점기 진짜 일본식 이름이 비록 일부이기는 하나 동명으로 끼여든 적이 있었다. 그것은 일본인 갑부 후꾸다 조오베에(福田增兵衛)가 1920년에 죽고 난 뒤 그가 살던 대청동의 일부 지역을 후꾸다마찌(福田町)라고 일본인들이 이름을 붙여 행정구역으로 삼은데 있었다.

마을 이름에까지 등장했던 후꾸다 조오베에는 1874년 대마도에서 빈손으로 건너온 사람인데 신창동에서 양조장 향양(向陽)을 세워 갑부가 된 사람이었다. 오늘날의 대청동4가 지역에 향양원(向陽園 : 지금의 가톨릭센터 자리쯤)이란 별장을 지어 이 나라 침략의 주동자인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부산으로 오면 이 향양원에서 머물었다. 그런데 그 후꾸다가 죽자 지금의 대청동4가 지역을 후꾸다마찌(福田町)라 했다. 이 후꾸다마찌의 땅은 그 당시는 거의 후꾸다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이 후꾸다마찌는 광복 후 일본식 동명을 우리말 동명으로 고칠 때 복병동(伏兵洞)이라 했다. 복병동이란 오늘날의 남성여고와 옛 부산기상청이 있는 산에 용두산 주위에 있는 왜관의 왜인을 지키는 우리나라 군사의 복병막(伏兵幕)이 있어서 복병산이라 했고, 그 복병산을 이웃한 마을이기에 복병동이라 했다. 후꾸다마찌가 복병동이 된 이 복병동은 1982년 행정동리조정으로 대청동에 병합되어 대청동4가가 되었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2년 5·6월호
작성일자
2013-03-20
자료출처
다이내믹부산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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