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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광복의 희비 잘 나타낸 광복동

부산의 지명 유래 - 부산의 중심 ‘중앙동’…

내용

오늘날 중구 중앙동에 해당하는 지역의 옛 토지대장이나 가옥대장 또는 일제강점기 지도를 보면 大倉町(대창정:오호구라마찌), 高島町(고도정:사또오마찌), 京釜町(경부정:게이후마찌) 등 지명이 나온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이름으로 바다가 메워져 육지가 된 중앙동 지역 이름이다. 비록 욕된 시절의 욕된 이름이라도 장부나 대장 같은데 그런 이름이 박혀서 지워지지 않으니 어쩌랴. 치욕의 역사도 역사란 이 말인가. 그러나 알아둘 일은 알아두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중앙동은 거의가 바다를 매축할 때 산기슭은 깎이고 바다는 메워져 평지가 된 지역이다. 이 매축의 시초는 개항기 때의 북항매축(1902년 7월)이었는데 그렇게 매축을 할 때 공사를 맡은 일본의 청부업(請負業)인 토목회사에 대창조(大倉組), 좌등조(佐藤組), 고도조(高島組)가 있었다. 그 청부회사들이 매축을 한 자리를 따라 대창정, 좌등정, 고도정이란 동명(당시는 町名)이 되었고 경부정(京釜町)은 경부선철도의 시발점이라 하여 그런 이름을 가졌다.

그러다 1945년 광복을 보고 1946년 10월 동(洞) 이름을 우리말로 바꿀 때 중앙동이란 이름으로 바꾸었다. 중앙동이란 당시의 부산시청, 국제부두, 경부선철도, 부산국제전화국, 부산본부세관 등 부산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 되어 중앙동이라 한 것이다.

옛 문서 가운데 오늘날의 광복동 지역에는 辨天町(변천정:벤덴죠오), 琴平町(금평정:고도히라마찌), 抒情(서정:니시마찌), 行政(행정:사이와이마찌) 등의 이름이 있다.

변천정(辨天町)과 금평정(琴平町)은 1876년 개항(開港)으로 용두산 주위인 왜관터가 일본인전관거류지(日本人專管居留地)가 되었을 때 용두산에 왜관시절부터 그들 일본의 지역 신(神)을 모신 辨天神社(변천신사)와 琴平神社(금평신사)가 있었다. 그래서 변천정, 금평정이란 일본식 마을이름을 일본인이 지었고 西町(서정)은 왜관 때 西關(서관)이라 한 곳이 되어 서정이라 했다.

이 광복동 지역의 일제강점기 이름은 1946년 10월 우리말 이름으로 바꿀 때 辨天町(변천정)과 琴平町(금평정)은 광복동(光復洞)이 되고 行政(행정)은 창선동(昌善洞), 西町(서정)은 신창동(新昌洞)으로 고쳤다.

그러다 1956년 법정동(法定洞)인 창선동과 신창동은 행정동으로 광복동에 병합되었다. 광복동은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밀집해 살던 곳이다. 이 곳이 광복을 보자 썰물 밀려가듯 일본사람은 한사람 남기지 않고 물러난 대신 광복을 맞아 귀환동포가 환희 속에서 찾아들었다. 그러니 광복이 보인 희비가 가장 잘 나타난 곳이 이곳이 되어 광복동이라 했다. 오늘날의 동광동(東光洞)은 1678년 용두산 주위로 왜관(倭館 : 초량왜관이라고 했음)이 들어서기 전에는 초량지역에 속해 있어서 용두산을 초량소산(草梁小山)이라 했다.

초량소산 동쪽 자리 산비탈을 깎아 왜관을 세울 때는 이곳이 중심지가 되고 개항이 되고 한일합방이 되어도 중앙동과 함께 동광동이 일본 도시의 중심지가 되어 본정(本町 : 혼마찌)이라 했다.

동광동은 광복 후 우리 이름으로 고쳐진 이름이다.

53년 부산역전 대화재 이후 폐허화된 동광동 40계단.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2년 3·4월호
작성일자
2013-03-19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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