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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이야기 한마당 - 세관장 딸의 로맨스

내용

조선말 부산 개항기 (1876∼1910)에 있었던 오늘날의 세관(稅關)을 그 당시는 해관(海關)이라 했다.

이 해관을 관장하는 해관장(海關長)을 조선정부는 한동안 우리나라와 통상 조약을 맺은 나라인 영국·미국·독일·프랑스 등 일본인을 제외한 외국인을 고용해서 해관의 일을 맡기고 있었다. 조선정부가 그렇게 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세관 업무에 능숙한 사람이 없다는 점도 있었지만 일본의 간섭을 막기 위함도 있었다.

그러한 외국인 해관장으로 1888년께부터 몇 해 동안 영국인이 부산 해관장으로 있었는데 그 이름은 G·H·Hunt로 우리말 방식의 이름은 하문덕(何文德)이었다.

이 영국인 해관장이 산 곳은 지금은 바다를 메우느라 산이 깎여 없어진 영주동의 영선산(營繕山) 기슭의 영국 영사관 조차지 안의 관사였다 (이 자리는 오늘날의 중구 동광동 쪽으로 중부경찰서와 부원아파트 남쪽의 높은 산비탈쯤이었을 것이다).

이 영국인 해관장 관사는 숲이 우거진 가운데 외떨어져 한적했다. 그 한적한 관사에 해관장 헌트 부부와 외동딸 등 세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헌트가 출근을 하면 여자 두 사람만 집 안에 남게 되었다. 그러니 더욱더 한적해지고 쓸쓸해졌다. 하루 동안 오가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그래서 집 안 일을 보는 잡역부(雜役夫) 겸 서생(書生)으로 젊은 사람을 두려했다.

그때 헌트집 서생으로 든 사람이 양산군 상북면 대석리의 권순도(權順道)였다. 권순도는 잘 생긴 미남으로 활달하면서도 지성적이어서 부산으로 가서 새로운 문물을 익히려 양산에서 내려와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해관장댁에 잡역부 겸 서생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영국인이라면 영어를 배우고 새로운 구미(歐美)문화에도 접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그 집에 든 것이었다.

그 때 권순도의 나이 23세였는데 해관장 헌트의 외동딸은 19세였다.

그들이 젊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그랬을까? 그건 알 수 없으나 권순도와 헌트의 딸은 시속말로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그 국경을 넘어서고 말았다. 그 때까지 언어도 잘 통하지 않았을텐데도 그리 되었는가 보았다.

그러자 사랑의 징표인 씨앗을 가지게 되고 부모가 눈치를 채게 된 것이었다. 권순도가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그 집에서 쫓겨나는 일보다 그녀와 헤어질 수 없었다.

그건 권순도의 일만은 아니었다. 그녀도 권순도와 남모를 정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있었다. 권순도는 궁리에 궁리를 모아도 묘안이 없었다. 그녀에게 고향 양산 대석리로 가자고 했다. 그녀는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부모 몰래 두 사람은 관사를 빠져나왔다.

권순도와 헌트의 딸이 밤중에 몰래 관사를 빠져나오고 있다.

딸을 놓친 헌트는 노발대발이었다. 헌트 혼자서는 찾아낼 길이 막연했다. 구한국 관헌에게 수색원을 내었다. 수색원을 받은 감영은 외국인 고관의 일이었다. 성의를 보여야 했다. 권순도는 고향에서 관헌에 잡혀 부산으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히고 그녀는 외국인 고관의 딸이 되어 그랬는지 가마 타고 부산의 해관장 관사로 돌아갔다.

일이 이렇게 확대되자 헌트는 남새스러워 부산에 있을 수 없었다. 서울에 있는 영국공사의 알선으로 홍콩(香港) 해관으로 전근발령을 받고 딸을 데리고 홍콩으로 갔다. 딸은 홍콩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권순도는 감옥에서 나오고 그녀에게서는 사내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왔다. 그와 함께 그녀는 홍콩에서 돈과 물자를 보내왔다. 그 뒤도 계속 돈과 물자를 보내주었다.

권순도는 부산에서 상점을 내었다. 권순도상회는 동광동4가의 번화가에 있었는데 주거래 상품은 포목이었다. 권순도상회는 흥성했다. 돈도 모았다.

그러나 한일합방이 되자 권순도는 부산의 자기 상점을 거두고 양산 상북면 대석리로 돌아갔다. 고향에 돌아가서는 고향을 위해 일도 많이 했다. 그가 고향을 위해 한 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양산 상북면 대석리가 되는 천성산 아래 홍룡폭포 곁에 ‘가홍정’(駕虹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홍룡폭포로 가는 길목에 홍룡폭포를 알리기 위해 ‘第一江山(제일강산)’이란 석비(石碑)를 세웠다. 그 석비는 현재도 남아 있는데 석비 아래 ‘順道’(순도)라 새긴 그 글자가 그를 말한다.

석비가 있는 서쪽 시냇가에는 ‘勉庵 崔先生 春秋大義 日月高’(면암 최선생 춘추대의 일월고)라고 최익현(崔益鉉)의 충절을 추모하는 글을 새기고 그곳을 추모소로 삼으면서 주위 근동에 항일사상을 고취한 바도 있었다.

양산에서 명사로 알려진 그는 양산군수가 찾아들 때면 영국식 프록코트로 갈아입고 접대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했던 권순도는 1934년 1월13일 작고했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2년 1·2월호
작성일자
2013-03-14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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