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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도깨비까지 잡아먹는 왜놈들

이야기 한마당 - 홰바지에 얽힌 사연

내용

오늘날 연제구의 부산교육대학 동쪽에서 연산로터리로 이어지는 주위 지역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줄풀과 갈매가 우거지고 수련이 자생한 늪의 저습지대(低濕地帶)였다.

그 늪지대가 형성된 것은 큰비가 와서 홍수가 질 때면 동래구 남쪽과 연제구 북쪽으로 흐르는 동래천의 수위(水位)가 높아졌는데 동래천의 물이 빠지는 수영천 아래 수영만(水營灣)이 만조(滿潮)가 될 때면 동래천 수위가 더욱 높아져 물이 잘 빠지지 않았다.

거기다 오늘날의 연제구를 둘러싼 황령산, 금련산, 배산, 화지산에서 쏟아진 물은 동래천에서 어울렸는데 그 동래천 수위가 높아지면 연제구에서 빠져야 할 물이 빠지지 않아 오늘날의 거제1동 동쪽과 연산5동 북쪽의 저지대는 구덩이로 된 못이 되었다가 평상시는 늪지대가 되었다.

그런데 늪지대는 홍수때 물이 빠지지 않고 물굽이를 친 곳이 되어 연약한 흙모래의 수렁이 되어 있는 곳이 많았다. 그 수렁 주위로 잠자리 메뚜기 개구리를 잡으러 간 아이가 빠져 곤욕을 치르거나 생명을 잃는 경우까지 있었다.

횃불로 장꾼 맞던 ‘홰바지’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동래쪽 어른들도 범일동에 있었던 부산장에 갔다가 밤으로 오다가 그 수렁에 빠지는 수가 있었다. 그래서 장날 밤이면 동래사람들은 홰바지(현 거제리시장 서쪽, 동해남부선 거제역 동쪽)까지 횃불을 들고 나가 장에서 돌아오는 사람의 길을 비춰주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어서 지금도 횃불로 맞았던 그곳은 ‘홰바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도깨비가 사람 해코지

그러면서 그 늪지대에는 도깨비가 있어서 사람을 해코지한다는 말이 나오고 자기가 경험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실제 수렁에 빠져 생명까지 잃는 경우가 있고 보면 그게 도깨비가 홀려서 그런다고 할만 했다.

그 늪에는 줄풀이나 억새가 밤으로 바람따라 서걱거리는 소리가 밑도 끝도 없는 도깨비 수군덕거리는 소리로 들리기도 하고 그 늪지대에 버려지거나 그곳에서 죽은 개나 고양이같은 짐승의 썩다남은 뼈에서 비라도 올 음습한 밤이면 파란 인광(燐光)이 번쩍거려 도깨비불로 보일만도 했다. 그 말은 그곳에는 사람을 홀리는 도깨비가 나오니 가지 말라는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겁을 주어 경계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홰바지에 동해남부선 놓여

그러했던 주위로 동해남부선철도가 부설되어 1935년에는 우렁찬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지나게 되었다.

동해남부선이 부설되기 이전에는 철도부설을 위한 기술자와 공무원(工務員)들의 주택으로 화지산 동쪽이자 동해남부선 서쪽인 거제4동 비탈과 연산2동과 5동 지역에 집단적으로 철도관사와 사택이 지어졌다. 거제동쪽은 비교적 지위가 높은 일본인 기술자의 관사 136동(棟)이 지어지고 연산동쪽에는 일본인 공무원들의 사택 57동이 1930년대 초에 지어졌다.

그러니 일본인이 별로 없었던 오늘날의 연제구지역에 일본인이 집단으로 와서 살게 되자 동래구지역의 동래토박이들은 경계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지역(오늘날의 중구, 서구, 동구 지역)에서 동래를 향해 일본인의 세력이 확장되어 오는 게 실제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래지역 특히 동래온천장으로는 일본인이 개항기부터 들어서서 온천장을 개발하여 고층건물과 요정을 지으면서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민족감정이 강한 토박이들의 동래지역마저 잠식될 처지에 있었다.

동래 古老들의 저주

그런 가운데 동해남부선의 완공을 보자 기차가 우렁찬 기적을 울리며 밤낮으로 귀청 따갑게 치달아 다녔다. 연제지역의 늪지대 주위도 지난날과는 달리 큰둑이 쌓이고 철둑길과 찻길이 생겨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 부산장날이면 횃불을 들고 마중나갈 필요도 없어졌다. 늪지대 수렁에 빠졌다는 얘기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럴 그때 동래지역의 고로(古老)들에서 생겨난 말이 있었는데 그게 “도깨비까지 잡아먹는 왜놈들”이었다. 그 말은 기차 불통(기관차)이 비명같은 기적소리를 내지르고 거제리와 동래 앞을 마주 달리면서 그 무서운 도깨비마저 잡아먹었다는 뜻이었다.

도깨비는 사람을 해코지하는데 일본사람의 침략성은 사람을 해코질하는 무서운 도깨비마저 잡아먹을 정도로 모질다는 저주였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1년 7·8월호
작성일자
2013-02-19
자료출처
다이내믹부산
제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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