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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의 기회 놓친 하단포

이야기 한마당 - 하단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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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오늘날의 사하구 하단동은 부산이 개항(1876년)되는 그 전후 무렵에는 낙동강의 수운을 이용한 하단포(下端浦)라는 이름으로 해륙(海陸)산물의 집산지였다.

海陸산물·소금 집산지

남해안의 해산물과 갈대로 만든 수공품과 김해지방의 곡물이 모여들 뿐 아니라 명지(오늘날의 강서구 명지동) 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이곳으로 모였다.

그렇게 모여든 물자는 낙동강 수운을 따라 삼랑진·창녕·고령·왜관·구미·상주·안동으로 올라갔다. 올라간 배들은 물품을 낙동강 연안지역에서 나락(벼)과 교환하여 하단포로 돌아와서 하단포에서 정미(精米)가 되어 부산으로 실려나거나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하단장 物産交易 중심지

당시는 상업의 중심지이자 요지로써 김해평야의 나락까지 하단포로 배로 실려와서 도정(搗精)되어 객주업(客主業)이 번창하면서 쌀 도매와 소매도 크게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5일장인 하단장은 해산물 농산물에 의해 성시(盛市)를 이루었다.

그 때의 하단포 포구는 오늘날의 에덴공원(원래 이름은 강선대) 남쪽으로 괴정천의 토사(吐瀉)와 낙동강의 물길 따라 밀려드는 토사로 포구가 메워지기 이전에는 바다를 가까이 한 낙동강 맨 끝자리의 포구로서 수많은 배들이 오고 갔다. 하단장은 그 포구 주위에서 열렸다.

이 같은 물산교역(物産交易)의 중심지가 되고 보니 그 교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내륙교통도 원활해야 했다.

그래서 하단과 부산을 잇는 부하철도(釜下鐵道) 부설에 힘을 기울인 사람이 부산 출신으로 개화기의 선각자 박기종(朴琪淙) 씨였다.

釜下鐵道 건설 주민반대로 무산

박기종 씨는 1898년 5월 부산과 하단 사이 약 6㎞의 경편철도 부설을 대한제국의 농산공부의 허가를 받아 그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착공 후 곧 중단되고 말았다. 중단 원인은 자금부족과 하단 주민과 객주들의 반대운동, 그 뒤에 등장한 경부선 부설 계획 등을 들고 있다.

이 원인 가운데 하나인 주민들의 반대는 부하철도가 부설 운영되면 하단으로 모여드는 물자가 부산으로 바로 직송되어 집산지로서의 상권(商權)을 잃는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중단 원인인 경부선철도계획은 부하철도 착공 당시 실제로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었다.

이 경부선철도는 일본이 이른바 대륙으로 진출하여 대륙을 경영하려면 교통이 신속하고 편리해야 한다는 저의 아래 1898년 9월 대한제국과 일본이 경부철도합동조관(京釜鐵道合同條款)을 맺고 철도회사를 설립한 것이었다.

그래서 1901년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그 이전인 1896년 일본 영사(領事)가 비밀리에 사전답사를 하느라 사냥꾼으로 가장하여 기술진을 보내 철도 놓기에 적합한 곳을 점검하느라 둘러보고 있었다. 그렇게 점검을 위한 답사반은 네차례나 서울과 부산을 오르내렸다고 한다.

일제에 저항 쇠퇴길로

그 때의 계획은 삼랑진에서 낙동강 동쪽 기슭을 따라 원동, 물금, 구포, 사상에서 하단까지 내려 하단에서 괴정동을 거쳐 지금의 대티터널 쯤에 굴을 뚫고 대신동을 거쳐 동광동에 종착역을 삼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하단지역 사람들은 몇 차례나 지세 지형을 살피러 온 일본 기술진의 저의를 눈치채고는 철도가 하단을 지날 수 없다고 저항을 하였다. 그 때의 주민들은 “쇠말(鐵馬)이 들어오면 동네가 망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때는 그러한 미신적인 생각도 작용했지만 내면으로는 개항 이후 일본의 국토침략을 눈으로 보고 있던 터라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이 깔려 있었다.

그 이후 일본 기술자가 측량하러 왔을 때는 그 측량행위를 주민의 힘으로 방해했다. 그러자 일본측은 방향을 바꾸어 오늘날처럼 사상에서 부전동을 지나 범일동을 거쳐 초량을 종점으로 삼았다가 뒷날 중앙동으로 뻗쳤다.

이 같은 하단 주민의 저항은 차치하고라도 그 이후 수운교통이 쇠퇴하고 육상교통이 융성하는 과정에서 하단지역은 강가 변두리의 강마을로 전락하여 상권마저 잃게 되었다. 그 반면 철도가 지나는 부전동·범일동·초량 지역은 발달을 보게 되었다.

1930년에는 하단이 분뇨처리장(糞尿處理場)이 되자 그 냄새로 해서 거주기피지역으로 또 한차례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같은 일들로 하단지역의 개발은 늦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1년 5·6월호
작성일자
2013-02-14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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