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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용의 전설이 전하는 마을 이름들

부산의 지명유래 - 남구의 대연동·용당동·용호동

내용

남구는 높고 가파른 황령산이 북쪽 배산(背山)이 되고 그 황령산이 문현동고개 고지(高地)로 이어내려 우암동·용당동의 우룡산(牛龍山)이 서쪽을 막으면서 남쪽의 용마산(龍馬山)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용호동의 장산봉(長山峰)이 에워싸서 원형(圓形)이 된 그 안은 오목한 분지(盆地)가 되었다.

이 분지에서 트인 자리라고는 동쪽의 남천동과 장산봉의 북쪽끝 동생말 사이 좁은 바다목을 지낸 수영만이 된다.

그런데 조선시대 중기까지만 해도 오늘날 육지로 바뀐 대연동의 시립박물관 북쪽과 남부운전면허시험장 북쪽은 바다로서 배가 드나드는 선착장이 있었고 그 바닷가는 돌자갈이 많은 개<포(浦)>가 되어 “돌개” 또는 “석포(石浦)”라 하여 석포리란 마을이 있었다.

대연동의 1960년대 말(왼쪽)과 현재 모습.

그러니 오늘날의 대연1동 용호1동의 평지지역은 수영만쪽에서 오목하게 만입(灣入)한 바다였다. 그 바다에 비가 쏟아질 때면 주위를 둘러싼 황령산, 우룡산, 용마산, 장산봉 산비탈에서 흙모래와 돌자갈을 실어내어 오랜 세월 동안 바다를 메워갔다. 동쪽으로 트인 좁은목 바다의 밀물 때면 한목에 쏟아지는 물을 감당할 수 없어 흙모래가 쌓이는 것을 더하게 하면서 곳곳으로 웅덩이와 못이 만들어졌다.

오늘날 남구의 분지인 낮은 지역에 형성된 대연동(大淵洞)의 못 연(淵)이나 용당동(龍塘洞)의 못 당(塘)이나 용호동(龍湖洞)의 호(湖)는 모두 시가지 형성 이전에 있었던 못에 연유한 마을이름이다. 이 가운데 대연5동을 ‘못골’이라 하는데 그 못은 황령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모인 산비탈의 못으로 대연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다.

오늘날에 형성된 동명(洞名) 이전의 300년 전쯤의 이 분지지역 마을 이름은 대연리, 석포리, 용당리, 분포리였다.

그런데 이 지역의 동명과 산명에 용(龍)자가 많은 것이 특이하다. 龍塘洞(용당동), 龍湖洞(용호동)의 용은 물론 오늘날의 부경대학교 대연캠퍼스(전 수산대학교)를 남하면(南下面)의 용소동(龍沼洞)이라 행정동명으로 쓴 때가 있었고 용당동의 바닷가 옛마을을 용두촌(龍頭村)이라 했으며 동명불원이 있는 산을 飛龍山(비룡산)이라 하고 신선대가 있는 산을 龍馬山(용마산), 용호동에서 용당동으로 뻗은 독립된 산을 神龍山(신룡산), 우암동의 牛龍山(우룡산), 용이 머무는 臺(대)라 하여 龍貸(용대)란 별칭을 가진 오륙도, 1910년 이곳을 龍珠面(용주면)이란 행정단위의 面(면)이었던 사실들에서 용자돌림이 유독 많음을 알 수 있다.

용은 물 속이나 육지나 하늘로 자유자재로 오가지만 물 속에서 쉰다고 한다. 여기저기에 있었던 시퍼런 깊은 못 너머에는 바다가 펼쳐지고 하늘 천공(天空)은 가이없다. 그 못과 바다와 하늘에서 옛 사람은 용의 생성과 비상을 상상했고, 그 상상이 이 지역 정서에 맞아든 게 아닐까?

용호동 바닷가 이기대(二妓臺) 반위반석에서 공룡(恐龍)의 발자국화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남구는 연(淵)·당(塘) 호수(湖水)의 자리요 상서(祥瑞)로운 용의 발상지이자 비상의 터라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1년 3·4월호
작성일자
2013-02-1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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