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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임금님 숭모 깃든 곳

부산이야기 ‘부산 지명유래’ - 망미동

내용

오늘날의 온천동 금강공원 입구에 망미루(望美樓)가 있다. 이 루는 1920년대까지만 해도 동래구 수안동에 현재도 남아 있는 동래부 동헌(東軒)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인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 : 현재는 금강공원으로 이전돼 있음)으로 들어가는 입구 길가에 있었다.

그랬던 것이 일제강점기 금강공원 입구로 옮겨졌지만 본래의 자리에 있을 때는 바깥에서 들어가는 쪽으로는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라는 현판이 걸리고 동래부사가 집무하는 동헌 안쪽으로는 망미루(望美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망미((望美)는 “임금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그때는 왕조시대고 부사는 왕명을 받들어 오고 보면 왕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도리로 여겼고 그 도리를 잊지 않게 항상 임금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을 가지기 위해 루의 이름을 그리 붙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정철(鄭澈)의 가사인 사미인곡(思美人曲)이나 속미인곡의 미(美)도 임금을 뜻했고 임금을 생각하며 읊은 것이다. 이러한 '미(美)'는 왕조시대 임금을 미칭(美稱)한 대유(代喩)가 된다.

오늘날의 수영구에 망미동이 있는데 이 망미동도 그 유연을 찾으면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시대 오늘날의 망미주공아파트 동북쪽의 수영강가 삼각주(三角洲)에 고려의 인종임금의 동서가 되고 의종임금의 이모부가 되면서 동래 정씨의 시조 정문도(鄭文道) 공의 증손자가 되는 정서(鄭徐)가 궁중과 정객들이 빚은 모함에 밀려 귀양을 와서 삼각주 모래밭에 오이를 심고 정자를 지어 정자에서 거문고를 타며 임금을 그리워하는 노래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읊었다. 이 노래는 고려가요에서 오직 작자를 알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값진 노래로 여러 문헌에서 볼 수 있고 그 귀양터의 위치 또한 여러 옛지도가 밝히고 있다. 그리고 과정(瓜亭)이란 정서가 오이를 심고 정자에서 귀양살이를 한다해서 스스로 오이 과 (瓜) 정자 정(亭)으로 호(號)를 삼은 것이다.

그렇게 과정은 귀양살이를 하면서 때때로 강을 건너 가까운 산으로 올라 임금이 계시는 북방을 향해 요배했다. 그때 오른 산이 지금의 망미주공아파트를 짓기 위해 깎여내려지기 전의 산인데 그 산을 과정이 북녘을 바라본다하여 뒷사람들이 망산(望山)이라 했고 그 망(望)에 임금을 상징하는 미(美)가 어울려 망산의 북쪽 강가에 자연마을이 이루어지자 그 마을을 망미라 하여 오랜날을 이어왔다.

오늘날의 망미동은 1979년 수영동에서 분리될 때 그 망미라는 자연마을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수영동 이전의 조선시대는 망미동지역을 동래부 남촌면 숭정리(崇亭里)라 했다. 이 숭정리의 이름도 과정(瓜亭)을 숭앙(崇仰)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지명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망미동과 연산동 주위에 있는 과정초등학교라든가 과정로(瓜亭路)라는 이름도 정과정에서 유래한 것이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0년 9·10월호
작성일자
2013-01-14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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