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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쿨부산 스토리텔링 공모전 장려] 환상속의 부산, 한 번도 떠나지 않았던.

내용

“부산에는 서울에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거대 프랜차이즈 간판, 대규모 통신사의 간판 등 중앙의 자본이 지역 곳곳을 침투해 들어와 지역의 풍경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부산의 풍경은 그 지배를 거스릅니다. 항구가 만들어내는 바다의 풍경들, 뱃사람들 특유의 패션까지. 모든 지역이 서울의 아류가 되어 가고 있는 서울중심주의가 만연한 대한민국에서, 부산은 중앙의 지배를 거스르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이것이 제가 부산에 오고 싶은 이유입니다.”

부산의 한 언론사에 입사 면접을 보러 내려와서 던진 이 대답의 비밀은 사실 누가 해 준 말을 그대로 읊었다는 데 있다. 서울생활 20년, 이젠 '다마내기 서울내기' 다 되었다는, 하지만 고등학교까지는 부산에서 졸업해 아직은 서울을 다 받아들이지는 못했다는 선생님이 부산을 추억하며 내게 해준 이야기였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나는 이 선생님식 부산묘사에 반해서, 여름에도 겨울에도 부산을 내려가지 않고 일부러 아껴놓았었다. '언젠가 선생님과 함께 이곳에 와야지. 부산에서의 첫 기억은 선생님과 함께하게 될 거야.'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오는 상상이지만, 당시의 나는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했던 우리 선생님의 '다마내기 빠순이'였다.

세상과 유리된 공간이 내게도 있던 시절, 선생님의 연구실은 언덕에 위치해있던 학교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있었다. 걸어 올라가면서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던 그 호흡들이 순전히 가파르던 계단 때문만은 아니었으리. 한 층을 올라가서 화장실에 들어가 립스틱을 찍어 바르고, 다시 또 한 층을 올라가서 더 이상 고칠 것도 없는 화장을 다시 고치느라, 연구실에 다다를 때쯤 분가루가 먼지처럼 뚝뚝 떨어지며 가관도 아닌 장관을 연출했다. 헉헉거리며 마침내 연구실 문을 열었을 때, 인사 대신 건넨 선생님의 한 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나. “니 화장했나.”

취업일변도로 변한 대학에서, 상경계열 복수전공도 아니고 '국어국문학'을 복수전공 하고 싶었다는 내게서 선생님이 무엇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진학상담을 빌미로 선생님에게서 매주 한 번 특별과외를 받을 수 있었다. 매 주 자신의 논문이나 연구서를 던져주시고 그에 대한 독후감을 써 오면 평가를 해주는 식이셨다. "니 퇴고는 하나." "많이 무식한데.." 냉정하게 지적은 하셨지만, 그래도 오지 말란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늘 해외 출장이 잦았던 아빠를 둔 나로서는 아빠를 자주 보지 못한 성장과정과 억지로 짜맞춰보자면, 선생님에게서 알게 모르게 부성을 느꼈던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연구서는 내겐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애꿎은 화장만 더 열심히 했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늘 흘러넘치고,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하듯, 선생님을 향한 내 마음도 늘 과한 화장처럼 촌스럽고 서툴렀다. 나는 매일 밤 나의 무식을 원망하면서, 짧은 지식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던 연구서를 싸매면서 자연스럽게 선생님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에필로그'나 '프롤로그'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가끔 연구서 본문에서도 문학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이 예시로 등장하기도 하였는데, 나는 보물찾기 하듯, 퍼즐의 조각을 찾아 맞추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사생활을 수집하면서 지금의 선생님을 만든, 선생님의 젊은 시간들의 형체를 제 멋대로 그려 나아갔다.

그 조각들은 늘 부산에 관한 얘기들이었다. 자연스럽게 부산에 대한 많은 것들이 내 무의식에 아로 새겨졌다. 예컨대 사직구장에 관한 선생님의 추억은 이러했다. 80년대 말 운동권이 소멸되고 본인도 부산으로 내려가 군 입대를 기다리던 터, 갑갑한 마음을 달래려 사직구장에 갔던 날이 있었는데, 거리의 정치를 일으켰던 부산 사나이들이 모두 그곳으로 도피한 채로 '다함께 차차차'를 부르며 울부짖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아 '대중'에 관련된 연구서를 집필했다는 식이었다. 나는 연구내용은 관심도 없이, 부산사나이들과 함께 섞여 '근심을 털어놓고 다함께 차차차'를 부르짖는 20대의 선생님을 상상하며, 당시의 혼돈의 시국 속에서 어리고 여린 문학청년이 느꼈을 법한 좌절, 열패감 같은 것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머리를 굴렸었다. 이해 못 할 어려운 문학작품을 감상하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젊은 날을 수놓은 동지애, 사랑, 고독과 허무함 같은 것을 이해하려고 나는 이 책을 찾아보고 저 책을 찾아보며 제법 분주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도대체 왜 부산 야구를 기업 롯데로부터 되찾아 와야 한다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부·마항쟁이 선생님에게 어떤 원경험으로 다가왔는지 알지도 모르면서, 아니 부마항쟁의 기승전결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참 많이 모르면서도 오뚝이 인형처럼 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를 다 아는 척, 이해하는 척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부산 사람이 아닌 이상 알리가 없는 경험들을, 내 좁은 지평으로 제멋대로 이해하려고 하면서 나는 선생님의 지난 청춘이 나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기를 바랬었던 것도 같다. 주제넘지만 나에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 있었다. 그것이 궁극에는 부산의 언론사에서 입사 면접을 보는 나를 지금의 나를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면접을 마친 후 택시를 타자마자 기사아저씨에게 나는 다짜고짜 부탁했다. “가장 가까운 항구로 가주세요.” 항구에 도착해서 나는 허겁지겁 물가로 달려갔다. 바로 발을 담글 수 있을 만큼 아찔한, 물가 가까운 곳에 앉아 나는 흥분한 감정을 진정시키고 부산앞바다의 광경을 천천히, 천천히 관조했다. 비록 선생님과 함께 오진 않았지만, 풋사랑의 추억과 함께 내려와 드디어 환상 속의 부산항과 대면 한 것이다.

그런데 찬찬히 앉아서 바라본 부산은, 환상속의 풍경과는 조금 달랐다. 무언가 조화롭지 않았다. 풍경의 반쯤은 서울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물가 근처에는 프랜차이즈업체의 로고나 간판들이 보이지 않았지만, 몇 걸음 나가지 않아서 그것들은 쉽게 눈에 띄었다. 몇 걸음 더 나아가면 서울과 똑같은 거리가 이어지기도 했다. 물론 정감 가는 구멍가게가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수놓고 있었지만, 그 경계를 넘어서자 대형마트의 간판도 보였다. 고층 건물들의 그늘이 고기잡이배들이 모여 있는 작은 항구의 풍경을 일부 가리기도 하였다. 부산에만 있다는 멸치쌈밥을 먹고 싶었지만, 결국 그 음식을 하는 가게를 찾지 못해 먹을 수 없었다. 다마내기 부산사람이었던 선생님이 서울사람이 되가는 것처럼, 부산도 그런 식으로 서울과 비슷해지고, 서울처럼 세련되어지고 있었다. 문득 나는 선생님을 잃어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덩그러니 바닷가에 꽂힌 비치파라솔처럼, 바닷가에 혼자 앉아 기운 채로, 반쯤은 서울처럼 변한 것만 같은 부산 앞바다를 바라 봤다. 여전히 바다의 물빛이 반짝이고, 밤하늘은 설탕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리고 그 풍경이 현대자동차나 KTF대리점, 맥도날드 같은 간판들 쯤은 단숨에 압도할 만큼 숭고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틈입한 자본의 상징들이 내 눈에는 어떻게든 눈엣 가시처럼 거슬렸다.

서울서 나고 자라 서울깍쟁이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느라, 주체적인 삶이 무엇이며 인간성이란 무엇인지 성찰할 기회가 없던 때 나는 선생님을 만났었다. 나는 부산 사나이의 직정直情과 의리에 기대 세상에 대한 나의 식견을 넓혀 나갔다. 그래서 많이 부족하지만 언론인이라는 가치 있는 직업을 꿈 꿀 용기를 가질 수도 있었다. 나의 무식을 냉정하게 지적해주시면서도, 연구서를 주시면 노력을 강조하셨던 선생님은 내가 가져보지 못한 아빠이기도 했고, 취업학교로 전락한 대학에서 찾지 못한 강직한 선배 같기도 했고, 이제는 또 다른 나이기도 하였다. 부산역에서 내려 부산항을 처음 바라본 순간, 나는 내 고향도 아니면서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뜨거운 감상에 젖어서 면접이 몇 시 인지도 잊은 채 얼마간 그 자리에 서있었다.

가 본 적 없던 부산이지만 내 청춘이 머물던 세계였다.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잠을 청하면서 나는 내 청춘을 쥐고 흔들었던 선생님이 변함없이 부산 사나이로 머물 수 있기를 바랬다. 외양이 화려하거나 세련되진 않아도, 오히려 거칠고 투박해서 조금 낯설어도, 그 직정直情이 정직正直을 돋보이게 해서, 그래서 더욱 더 신뢰가 가지 않았던가. 세상이 요구하는 규범이나 안전한 인생의 단계 따위는 넘어서라고 있는 거라고, 미묘하게 부당한 것들에, 지지 않아도 되는 집합들에 버티라고 늘 힘을 주어 말씀하셨던 선생님이야말로 '부산 사나이'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버스 창가에 몸을 기대 잠을 청하며 생각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고, 알은 새의 세계이고, 태어나려는 자는 알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나 또한 새가 되어 부산에 날아왔다, 다시 날아간다. '당신은 지금 부산을 떠나고 있습니다.' 천만에. 나는 한 번도 부산을 떠난 적이 없다.

작성자
장경혜(서울시 광장동)
작성일자
2012-10-31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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