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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쿨부산 스토리텔링 공모전 가작]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내용

나는 부산이 싫었다. 1982년부터 4년 동안 부산에서 살았지만 잠시 머물다 떠날 곳이라는 생각으로 부산에 정을 주지 않았다.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서울로 진학을 원했으나 보수적인 부모님께서는 장녀인데다 평소 몸이 약했던 나를 가까이 두고 싶어 하셔서 고향에 있는 대학진학을 권유하셨다. 한동안 서로의 입장이 팽팽하다가 결국은 친척집에서 기거하는 조건하에 고향에서 가까운 부산으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산자락에 위치한 캠퍼스는 아름다웠고 전공과목도 내가 좋아하던 국문학이어서 조금만 마음을 열었다면 재미있는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스스로 이방인을 자처하고 호시탐탐 부산을 떠날 기회만 엿보았다. 가지 못한 서울에 미련이 남아 학교생활 자체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친척집에 기거하는 것도 어쩐지 눈치가 보이고 싫었다. 학과 활동이나 동아리 모임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휴일이나 방학이면 고향에 가기 바빴다. 부산에서 진주까지 시외버스로 2시간 걸리는 그 길을 4년 동안 거의 매주 왕복하다보니 나중에는 길가의 어느 집에 지붕을 새로 한 것까지 알아차릴 정도가 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부산의 매력에 눈을 감아도 몇 가지 좋은 점은 있었다. 전공과목이 적성에 맞다보니 좋아하는 책만 하루 종일 읽어도 취미가 바로 공부로 연결되어 성적이 잘 나오는 것이 신통방통했다. 전 과목 A학점인 아름다운 성적표와 성적우수 장학금, 학과 수석의 영예가 4년 간 나를 따라 다녔다. 그리고 지선이가 있었다.

지선이는 여고동창이었지만 고등학교 때는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고 대학 때 같은 과에서 만나 혈육 같은 친구가 되었다. 반농반어의 시골마을 출신인 지선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자취생활을 했던 터라 대학 때는 이미 살림 솜씨가 제법이었다. 학교 뒷문 근처에 있던 지선이의 자취방은 항상 깔끔했고 갓 스무 살 처녀의 향기로운 냄새가 배어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지선이네 자취방으로 가서 석유난로를 켜고 금방 부르르 끓어오르는 냄비 밥을 해먹었다. 고소하고 따끈한 냄비 밥은 김과 김치만 있어도 어느 성찬 부럽지 않았다.

대체로 지선이가 해주는 점심을 먹었지만 가끔씩은 구내식당이나 학교 근처 음식점에서 내가 지선이에게 밥을 사주기도 했다. 구내식당에서는 비빔밥을 즐겨 먹었고 여름철이면 인기 메뉴인 냉면을 사 먹느라 길게 줄을 서기도 했다. 때로 특별한 날이면 학교 근처 식당에서 수중전골을 먹었다. 수중전골은 조개, 미더덕, 굴, 꽃게 등 각종 해산물에 당면 사리를 넣어 약간 매콤하게 끓여내는 부산의 대표 음식으로 바다의 향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국물 맛이 혀에 착착 감겨들었다. 친자매인 듯 사이가 좋던 우리는 수중전골을 먹을 때만큼은 서로에게 그만 먹으라며 아귀처럼 달려들곤 했다.

여고시절 우리는 단발머리를 했는데 내가 졸업도 하기 전에 짧은 커트로 머리를 자른데 반해 지선이는 그 머리를 그대로 길러 대학 입학 무렵에는 제법 어깨에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지선이는 얼굴도 참 고왔다. 눈망울이 사슴처럼 크고 맑았고 피부가 투명하리만치 하?R다. 옷차림도 얌전해서 무릎길이의 치마를 즐겨 입는 지선이가 바람결에 긴 생머리를 날리며 캠퍼스를 지날 때면 뭇 남학생들의 눈길이 머물곤 했다. 동양적인 매력의 지선이에 비해 나는 키가 크고 선이 굵은 외모로 지선이와는 상반되는 분위기를 가졌지만 둘 다 학교에서 이름을 날리는 미인에 속했다.

수업이 없을 때면 우리는 주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언덕 위에 위치한 도서관은 마치 유럽의 성처럼 위엄 있는 모습으로 우뚝 서있었는데 특히 해질 녘이면 주변의 잔디밭이 온통 황금색으로 물드는 경치가 꿈인 듯 아름다웠다. 도서관 앞에는 라일락꽃이 많아 봄날이면 향긋한 라일락냄새가 교정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라일락꽃 향기 흩날리던 어느 아름다운 봄날, 교정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만났다.

포항이 고향이라는 사회학과의 선배와 후배는 같은 하숙방을 쓰면서 마치 나와 지선이처럼 절친한 사이였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오던 내가 덜렁거리다가 역시 커피를 들고 오던 사회학과 선배와 부딪히면서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윤형주의 노래 '우리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가사처럼 '긴 머리에 말없는 웃음'을 짓고 있던 지선이와 사회학과 후배가 새로 커피를 뽑아오면서 우리는 도서관 앞 언덕에 앉아 노을이 지고, 저녁 어스름이 깔릴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우리와 같은 학년인 후배가 마음에 들었고 지선이는 듬직한 선배가 멋있다고 했다. 남자들의 마음은 잘 몰랐지만 우리가 마음을 정했기에 아마도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리라 생각하면서 한동안 우리는 그들과의 만남을 즐겼다.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로 대학가요제에서 수상을 한 '썰물'이 운영하는 커피숍에서 음악을 듣기도 하고, 금정산에서 학교로 내려오는 계곡에 모여앉아 물을 튀기며 놀기도 하고, 시험 때면 도서관에서 서로 자리를 잡아주기도 하고, 하숙집에 놀러가서 마음씨 좋은 아줌마에게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어느 날 선배가 해운대에 가보자는 제안을 했고 우리는 모두 환성을 지르며 100번 버스를 타고 해운대로 향했다. 온천장, 동래, 안락동을 지나서 해운대에 도착한 우리는 백사장을 향해 달려갔다. 지금은 상전벽해로 해운대 근처가 고층빌딩숲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야트막한 집과 노점상, 솔밭이 많아 제법 한적한 분위기가 있었다. 설탕을 잔뜩 묻혀 막 튀긴 도넛과 짭짤한 번데기, 고소한 고구마 스틱 등을 먹으면서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넓디넓은 백사장에서 놀았다. 가물가물 보이는 오륙도 너머로 선홍색의 태양이 붉게 내려앉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하나 둘 별이 떠오르는 밤바다는 더욱 아름다워서 지선이와 나는 신발을 벗고 해안을 거닐며 밀크커피 빛 모래와 발끝을 스치는 바닷물을 즐겼다.

모두가 흥겨운 분위기에 젖어있던 순간, 갑자기 선배가 나를 덥석 안아들고 해변을 달리기 시작했다.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경황이 없는 중에도 과도한 스킨십에 마음이 상한 나는 내려달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선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칫하면 물에 떨어져서 옷이 젖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 곱게 내려줄 때까지는 나는 어쩔 수없이 매달려있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나를 내려준 선배는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모르니?”라며 고백을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돌아오는 100번 버스 안에서는 모두가 마음이 편치 않은 듯했다.

선배에게 마음이 있었던 지선이는 상처받은 듯 했고, 나는 지선이에게 마음이 쓰이는 한편으로 괜히 후배의 눈치가 보였다. 그런데 눈빛이나 말투를 볼 때 후배는 지선이에게 마음이 있는 듯해서 우리 4명은 서로가 좋아하는 사람이 각각 다른 참 어려운 관계가 된 것 같았다. 모두가 상처받기 전에 인연을 정리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에 지선이도 공감했고 마침 여름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던 터라 우리는 사회학과 선후배에게 이별을 고했다. 잠시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디어지다가 나중에는 그저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자락으로 남았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직장을 구해서 서울로 왔고 지선이는 부산에 남았다. 정들지 않는 도시라고 여겼던 부산이 그리워진 것은 참 뜻밖이었다. 눈을 감으면 항상 캠퍼스가 있던 산자락, 해운대의 푸른 바다, 지선이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몸만 서울로 오고 마음은 부산에 두고 온 듯 허전했고 자꾸만 생각은 남쪽으로 향했다.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지선이는 착하고 잘생긴 남자를 만나 나보다 먼저 결혼을 했다. 그런데 포항출신인 지선이의 남편은 한때 우리가 만났던 사회학과 선후배와 고등학교 동문으로 지선이의 결혼식에서 우리는 그들을 다시 만났다. 청춘의 어느 날, 나를 안고 해운대 백사장을 달렸던 선배의 옆에는 제법 배가 부른 아내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고 우리는 연신 “세상 참 좁다!”는 말을 했다. 내가 잠시 좋아했던 후배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닌다면서 명함을 주기에 우리는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는 얼마 뒤에 나의 남편이 되어 우리는 휴가철이면 항상 부산에 간다. 이제는 제법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그 날의 그 멤버들이 지난여름에도 해운대 백사장에 모여 옛날 이야기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작성자
이현숙(서울시 잠실동)
작성일자
2012-10-31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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