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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스승의 그림자

예술부산 ‘예인탐방’ 21. 고故 심봉섭 선생님

내용

사람에게 있어서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워지고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평생 예술가로 살아온 나에게 있어서도 그런 분이 계신다. 스승이자 조각가인 심봉섭 선생이다. 선생은 부산예술계, 특히 조각 분야의 기초를 다지신 분이시다. 부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초창기 조각사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래서 예술계에서 선생을 부산조각계의 큰별, 한국조각계의 원로라고 말하고 있다.

고故 심봉섭 선생은 1929년 6월 9일에 진주시 진양면에서 태어나셨다. 본적은 부산직할시 동래구 연산동 1268번지이고 진주사범학교에서 부산의 경남상업중학교(6년제)로 전학을 오게 되면서 부산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1955년 국립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부산사범대학 미술과 강사(1956~1957)를 시작으로 부산공업고등학교 교사(1958~1964), 부산공업전문학교 교수(1964~1974)로 재직하면서 부산한성여대, 동아대 문리대, 부산여대 등에서 미술과 강사를 겸임하셨다. 이후 부산상업고등학교, 부산공예고등학교 석공예 주무교사, 부산교육대학 미술과 교수직을 끝으로 정년을 맞아 퇴임하면서 교단을 떠나셨다.

선생은 한평생 교사로서 또 교수로서 많은 제자들을 키워내셨고 또 그의 제자들이 현직 교단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으며 중진작가들로 활동하고 있다.

선생은 작가로서도 교수로서도 어떠한 야욕을 품지 않으셨고 조각가로서 출세하고 조각활동을 통해서 영화를 누릴 욕심을 전혀 갖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도 예술가로서 선생의 인품은 참으로 대단하셨다. 특히 존경스러운 것은 스승도 선배도 눈에 보이지 않는 패역한 세대를 탓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부끄러운 마음으로 조용히 피해 가셨던 슬기와 지혜로운 참덕스런 인격의 소유자이셨다.

선생은 20세기 정신적 혼란기의 난세에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셨다. 세계 제2차대전, 8.15광복, 남과 북의 분단, 미군정 6.25전쟁, 4.19 민주항쟁, 5.16군사혁명. 참으로 혼돈의 세상을 건너며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다. 그런 속에서도 교육자로서, 예술가로서의 길을 꿋꿋하게 걸으셨다. 급변하는 현대미술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직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구축해가는데만 전념하셨다. 얼마나 많은 고뇌와 헌신이 요구되었을까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러한 선생에 대해 혹자는 무디다, 둔하다 라는 표현으로 흠이 되는 언어들을 거침없이 쏟아내었지만, 오물통 같은 입술들을 쥐어박지 아니하시고 미소로만 넘기곤 하셨다. 지금도 그럴 때의 얼굴 모습이 떠올라 가슴을 찡하게 한다.

선생의 작품제작의 주재료들은 나무, 철재, 용접, 석고, F·RP, 스텐리스, 청동 등으로 다양하다. 각종 재료의 성질과 형태들을 잘 살려 깎고 붙이고 새기고 연마하여 어떤 표현형식이나 이념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초기의 구상적 표현에서 크고 작은 개체들의 유기적 관계를 생략하여 단순화하는 구성형식의 추상적 작품으로 변화되는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표현기법이 다원화되고 있는 현대미술 흐름의 어떤 시류에도 지배받지 않고 나름대로의 변화와 발전을 시도하며 꾸준히 자신의 영역 외에는 눈길을 보내지 않으셨다. 스승의 작품세계를 감히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한마디로 맑고 깨끗한 교육자요 청빈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사신 분이셨다.

선생이 부산조각계 및 향토문화발전에 기여한 업적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쉽지 않다. 1962년 부산에서 첫 개인전을 여셨다. 당시만 해도 조각활동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개척자적인 의미와 그 위치를 동시에 지니고 계셨다. 평면 전시와는 다른 하기 힘든 입체전시인 조각전시회를 5회나 여셨으니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다.

1968년에는 조각 동인 공간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1969년에 부산미국문화센터에서 창립전을 개최했다. 1995년까지 20여 년간 회장직을 맡아 정기적인 전시 및 타 도와의 교류전 등을 통하여 회원들의 창작의욕 및 제작활동을 돕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셨다.

올해 나이 71세인 필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훌륭하신 선생님과의 만남을 떠올리면 늘 감사한 생각이 든다. 필자의 일생은 귀한 선생님들을 만나는 참으로 복된 여정이었다.

선생과의 인연은 아스라한 세월 저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필자가 부산에 있는 초량초등학교 4학년 때 서양화가이신 김경金耕 선생님을 만났다. 당시는 6.25 전쟁 중이라 학교건물은 미군에게 징발되었고 학교 뒤 언덕 위에 세워진 천막교실에서 수업을 받을 때였다.

부산 개성중학교 때는 서양화가이신 김종식金種植 선생님을 만났다. 어느 날 야외수업 시간에 필자가 스케치하고 있는 그림을 보고는 “장상만이 니는 부산상고에서 끌어땡기겠다.” 하셨다. 그 한 말씀 덕분에 미술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수학을 싫어했고 수치로 계산하기를 싫어했던 필자는 결국은 부산공업고등학교 건축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미술시간이었다. 김경 선생님을 고등학교에 와서 또 만나게 되었다. 김경 선생님은 2학년 말까지 근무하셨다.

3학년 학기 초에 후임으로 오신 분이 심봉섭 선생님이셨다. 선생은 전임이셨던 김경 선생님의 부산공고 본교 담벼락 옆에 판자로 붙여지은 수상水上 가옥 작업실 겸 주거공간을 물려받아 사용하셨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시간이 훨씬 흐른 뒤에 알게 되었다.

부산공고는 실업계 학교라서 3학년이 되면서 진학반과 사회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받았다. 필자는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취업을 목적으로 사회반을 희망하였고 대학진학을 아예 포기하고 있었는데 학년 초 어느 날 미술 특활시간에 안광모라는 친구와 필자 두 사람이 새로 부임하신 심 선생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제자들을 너무 사랑하신 김경 선생님의 특별한 부탁이셨는지 심 선생님께서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목표 삼고 한번 도전해보라고 권유하셨다. 진지한 표정의 붉게 상기된 얼굴에 근엄한 모습은 그야말로 가슴 뛰게 하는 조언의 말씀이었다. 덕분에 안광모와 필자 두 사람은 1959년 서울대학교 미술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어려운 시대에 지방대학도 아닌 서울에 유학을 하게 되다니. 스승과 두 제자는 도전의 승리에 너무나 기뻤고 감격하였다. 마침내 서울대에 입학하여 심 선생님의 스승이신 조각가 김종영金鐘瑛 교수님, 조각가 김세중金世中 교수님, 데생 실기실에서는 서양화가이신 박득순朴得淳 교수님, 서양화가 장욱진張旭鎭 교수님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스승과 제자의 복된 만남이 무사히 졸업하고 오늘의 이 자리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보답하며 남은 생을 살아가야할지. 식물들이 태양 빛을 향하여 뻗어가듯 저 하늘을 바라보며 주어진 달란트를 잘 갈고 닦으면서 조용히 잊혀지지 않는 그분의 은혜를 생각하며 본향 향하여 감사하며 묵묵히 나아가는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선생께서는 평생을 후진양성에 힘쓰셨다. 또 작가로서 수십 회의 각종 전시회와 예술문화 행사의 운영 및 심사를 맡으셨고 앞장서 참여하여 척박한 부산문화의 불모지를 기름진 토양으로 바꾸어 놓았다. 제자들 그리고 후배들과 뜻을 같이한 동역자들의 리더가 되어 푸른 앞바다가 펼쳐진 중앙공원의 조각광장 조성 등 염원하던 큰일들을 이루시고 2001년 3월 17일 청룡동 작업실과 거닐고 명상하던 금정산 숲길과 사랑하는 이들을 다 두고 홀로 먼길을 떠나셨다.

작성자
예술부산 2011년 10월호
작성일자
2012-08-21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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