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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로의 생애와 문학

예술부산 ‘예인탐방’ ⑫ - 문학가 故 조유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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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조유로曺有路는 1930년 11월 21일 경남 창녕군 도천면 1리 532번지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8대조인 조명욱曺明은 경기도 광주 추현면이 고향이었으나, 이천부사로 재임 중 병자호란을 만나 순절한다. 졸지에 가장을 잃고 난리통에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자 가솔들은 조씨曺氏네의 본향인 창녕을 향해 떠났는데 성주를 거쳐 영산현 도천이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하고 마을에서도 외진 골짜기에 은둔하고 화전을 가꾸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나라에서 주는 일체의 녹을 거부한 것은 호란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걱정한 때문이다. 증조부인 조병문曺秉文은 식솔을 이끌고 도천면 1리로 이사를 하고 그곳에서 조유로가 태어나게 된다. 그는 이름난 학자로 2권의 시집을 남길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다. 부친 조규철曺圭哲은 부산한시회 회장을 역임한 이름이 알려진 문장가다. 그는 조유로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인 일제 말기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김구 휘하에 있다가 광복 후 귀국하였으며 임정기관인 ‘재중한인재산반입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모친인 김학수金洙는 김녕 김씨金寧金氏 집안에서 시집와 검소와 절약으로 창녕의 부잣집으로 불릴 정도로 가세를 일으켰다.   

조유로는 아명을 은동銀童이라 하였으며 호적명이 경현庚鉉이고 자는 천필天弼, 유로有路는 그의 필명이다. 부친이 매우 엄격해 막내인 그는 늘 자신에게 유독 모질게 대한다는 생각으로 불만이 많았다. 그는 3세에 한문으로 주소를 쓸 정도로 영민해 마을 사람들이 그를 ‘조창녕曺昌寧’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그것은 창녕의 이름난 천재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는 덩치가 작았지만 늘 가난한 아이들 편에 섰다. 8세에 영산소학교에 입학하고 일제강점기 교육을 받았다. 그의 부친이 중국으로 망명하고 가세가 기울면서 외로움을 타기 시작하는데 그때가 대동아전쟁 직전이었다. 소학교 4학년 때 창녕군에서 실시한 세금에 관한 글짓기 공모에서 1등을 차지해 창녕군수로부터 상장과 상품을 받기도 했지만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우리말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 한글을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일본말보다 우리말을 더 많이 사용해 주위에서는 간땡이가 큰 아이로 불렸다. 그가 헌병대에 잡혀간 것도 이로 인해 불령선인不逞蘚人으로 지목된 때문이었다. 헌병대에서 곤장 60대를 맞고도 꿈쩍하지 않고 왜 끌려왔는지 이유를 대라고 따져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면서 좌익 세력이 발호하고 그들이 만든 건국준비위원회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다가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마침 중국에서 돌아온 부친은 중국 내의 한인들의 재산을 들여오기 위해 [재중한인재산반입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을 하면서 좌익 세력에 맞서지만 중국에서도 팔로군이 득세하여 장개석 정부의 정국이 급변함으로써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조규철은 실망하고 그 뒤로도 좌익 세력이 지방으로 침투하여 그를 괴롭히자 하는 수 없이 도시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처음은 마산으로 갔다가 부산으로 옮겨 정착한다. 그 당시 창녕은 좌파 세력이 득세하여 면장이 남로당 남측 위원장인 면이 있을 정도였다. 오랫동안 정착했던 거처를 옮겨야 할 정도로 좌익 세력들의 위세가 당당했던 것이다.

그는 1957년 [자유신문] 신춘문예에 현대시 ‘굴뚝의 윤리’가 수석입선되어 등단한다. 그해 KBS를 통해 방송극 「이북은 살아있다」가 당선되고, 이듬해 1958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자유신문]에는 동화가 당선됨으로써 그는 문학의 전 영역에서 문재를 인정받은 우리나라 몇 안 되는 문학가 중의 한 사람이 된다. 1958년에는 첫 시집 『부동항』을 상재한 것으로 보아 신춘문예 이전에도 수많은 습작시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창작동화집 『시인 아저씨와 흰곰』 한 권을 빼면 모두 11권의 시집을 갖고 있다. 제1시집 『부동항』은 현대시로 성인을 독자로 한 시집이라면 나머지 10권의 시집은 이른바 ‘동심파’ 시집이었다. ‘동심파 문학’이란 그가 만든 독자적인 문학용어였다. 조유로의 동심파 문학론은 그의 문학 사상이며, 독특한 문학 논리다. 첫 시집 『부동항』은 성인을 독자로 의식한 모더니즘 계열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제2시집부터는 어린이를 독자로 의식한 것인데도 동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 어린이를 독자로 한 시를 동시라는 이름으로 하위 분류한 것은 아동문학을 격하하는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동시는 마땅히 시가 되어야 하고, 시로 불러야 하며 시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아동문학이라는 명칭도 편의적인 이름일 뿐 올바른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동시가 장르가 아니라 주제나 내용에 의해 분류되는 시의 한 갈래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어린이를 독자로 의식한 시는 주제나 내용으로 분류할 때 ‘동심파 시’라고 불러야 옳다는 주장이다.

굴뚝이 높은 것은 / 저만큼 누구가 싫어진 게다 //  빨간 핏덩이를 태우듯 / 흡사 너는 火 葬幕 煙塔! //  觸角을 亡失한 나비떼들이 / 한 해를 파아래 온 하늘을 饗宴하면 / 都市는 隔離된 머언 流配地 / 항시 神의 憤怒를 戱弄하던 / 避雷針의 날카론 監視 아래 / 生命은 저렇듯 / 商品으로 쌓여 갔는데 // 굴뚝이 높은 것은 / 저만큼 人價가 낮아진 證據다.
-굴뚝의 윤리 전문-          

나무는 / 참 / 귀도 밝네요 // 철 오는 자욱 소리 /  뉘 먼저 듣고 // 나무는 / 참 / 손도 많네요 // 묻힐 듯 많은 꽃도 / 혼자서 들고 // 나무는 / 참 / 마음도 착하네요 // 시원 놀이터 마련도 주고 // 그러나 / 어른은 / 못되나 봐요 // 걸음마도 못 배운 / 아가야인걸!
-나무는 전문-

‘굴뚝의 윤리’는 제1시집 『부동항』에 실린 작품이고 ‘나무는’ 제2시집 『하이얀 칠판』에 실린 시다. 누가 보아도 전자가 성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후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쓴 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제2시집 『하이얀 칠판』의 후기에 해당하는 ‘책의 꼬리표’에서 ‘여기 실린 소년시들은 내가 중학교 때 쓴 것으로부터 나이 설흔이 몇 고개를 넘도록 써진 것 가운데서 될 수만 있다면, 어린이에게, 중·고등 학생에게 그리고 어른들도 함께 읽을 수 있는 것만 추려 모은 것’이라고 썼다. 그가 자신의 시를 동시라고 하지 않고 ‘소년시’라고 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학교 때 쓴 것도 있고 어른이 되어 쓴 것도 있지만 처음부터 어린이를 의식하고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세 번째 시집 『산 넘어 온 편지』의 후기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자식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들어있다. ‘영림아, 영려야, 사흘들이 엄마가 보내 주시는 편지에 영림이는 아빠 오면 뵈여 드린다고 그림을 모아 놓고, 영려는 아빠 사진만 보면 아빠 아빠하고 기다린다고 하셨다.’(중략) ‘책이 팔려 (올갠을)사게 되는 날보다 하루라도 당겨 너희들을 기쁘게 하여 주고 싶어서였지.’ 후기에는 ‘1963년 9월 15일 서울 스타호텔 17호실에서 아빠’라고 적고 있다. 제5시집 『씨씨한 시집』의 후기에서 ‘내에게 있어서 이제 실험은 끝난다. 종래 말하여지고 오던 동시, 이 분야에 나는, 나대로의 갖가지 시도를 꾀하여 왔던 것인데, 이제 이 시집은 거기서 얻어진 나의 문학, 나의 시관이 여물어진 셈이다.’고 했다. 제2시집에서는 갖가지 형태면과 내용면을 대담하게 시도하였고, 제3시집에서는 동시의 문학적 시도를, 제4시집에서는 시의 사회적 관심의 시를 시도했다고 적고 있다. 그가 동시에 대한 새로운 문학관을 피력하고 나선 것은 제9시집 『그래요 그래서』부터다. ‘그리하여 아동문학을 한다는 사람들 가운데는 나의 시를 두고 아동에게 어렵다는 말이 오간 적도 있다. 이는 내가 아동만을 대상으로 시작을 하고 있는 줄로 잘못 알고 짚은 말이다.(중략) 아동문학가가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독자의 대상을 아동으로 스스로 제한함으로써 마침내 아동문학이 어떤 특정 대상에서 존립되는 특수문학으로 전락하고만 그 명명에 만족 못한다는 것이다.’고 후기에 밝힘으로써 동시의 새로운 정의를 시도한다.

그의 제11시집이라고 할 수 있는 『그달이 방금』에서 표지에 ‘曺有路 童心派 詩集’이라는 한자로 된 부제를 붙이고 ‘童心派 詩의 宣言’을 한다. ‘원래 문학이란 머리 위에 그 문학을 규정하는 설명, 즉 아동이니 농민이니 서민, 민중 따위의 관사를 붙이는 문학이란 그만큼 부실한 문학임을 고백하고 자체존립의 불안을 입증하는 일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여기 이 시집에서 선언하는 나의 동심파 시는 바로 여기에 존재 의의를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의 전 시집은 아동문학 작품집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심파가 쓴 문학작품일 따름이다. (중략) 즉 이 동심파 시는 장르가 아니라 시의 한 갈래(파)라는 것이다.’ 조유로는 열한 번째의 시집에서 자신의 시는 동심파 시라고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신현득은 「한국현대아동문학작가작품론」 조유로 편에서 ‘조유로 하면 먼저 그의 다부진 모습과 올곧은 성격을 떠올린다. 아무리 강직하고 겁 없는 사람이라 해도 세상살이에서 다소는 자기 의견을 굽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에 눈을 감게 된다. 그러나 조유로는 작은 일에도 자기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다. 시집을 출판할 때는 ‘본 시집 일체의 상 심사대상을 금하며, 동시에 그 결정 또한 무관임을 이에 밝힘’이라고 선언하기도 하고, 정가를 높게 매겨 시집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꺾어 놓기도 하고, 서점에 책을 내놓는 일도 하지 않으며, 여간한 친구가 아니고는 책을 기증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집을 대할 기회가 없고 보니 부산에서 살다간 위대한 한 작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다.

제한된 지면에서 조유로의 문학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우선 조유로라는 위대한 시인이 향토 작가로 부산에서 살다갔다는 사실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일이 중요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따라서 본고는 그의 인생과 문학의 한 단면을 소개하는 정도의 글이 되고 말았다. 언젠가는 조유로 문학에 대해 깊은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작성자
예술부산 2010년 7/8월호
작성일자
2012-06-19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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