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부산영화’ 대가 곽경택 감독에게 부산영화의 길을 묻다

내 ‘부산영화’, 자랄 적 감수성·경험+영화적 도시·열정 결실
‘영화도시 부산’, 당당하게 되묻자! “부산이 서울 시다바리가?”

내용

내 ‘부산영화’, 자랄 적 감수성·경험+영화적 도시·열정 결실
‘영화도시 부산’, 당당하게 되묻자! “부산이 서울 시다바리가?”

영화감독 곽경택은 ‘부산영화’의 특출한 상징이다. 부산에서 성장하며 작가적 감성을 한껏 키운 뒤, 제작영화 11편 중 8편을 부산에서 촬영했다. 그는 영화에 정감 있는 부산적 풍광과 함께, 걸쭉한 부산 사투리까지 그대로 담아내는, ‘메이드 인 부산’ 영화의 대가이다. 한국영화사에 기념비적 흥행기록을 남긴 ‘친구’가 대표적. “친구 아이가?”, “내가 니 시다바리가?” 같은 대사를 온 국민에게 알리며, 방송에까지 경상도 사투리를 득세시킨 진원이다.

요즘 ‘부산영화’ 붐 속에서 곽경택, 그가 돋보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누구보다 각별한 애정으로 부산의 영화적 얼굴을 잘 찾아내고, 누구보다 적극적인 의지로 부산의 얼굴을 화면에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부산시민의 영화 열기에 불을 지피고,  ‘영화·영상도시 부산’의 바탕을 다져온 견인차다.

‘부산영화’로 부산의 얼굴을 널리 알려온 감독, 고향에의 남다른 열정으로 ‘영화도시 부산’을 부추겨온 감독, 그 곽경택은 부산영화, 나아가 영상산업 중심도시 부산의 미래를 어떻게 볼까? 부산이 자랑해야 할 부산영화, 부산이 추구해야 할 그 목표에 넘치고 모자라는 것은 무엇인가? 부산영화가 걸어야 할 그 큰길은 정녕 어떠해야 할 것인가?

곽경택 감독은 제작영화 11편 중 8편을 부산에서 촬영했다. 곽 감독은 부산이 가진 여러 특징이 여러모로 ‘영화적’이라고 말한다.

‘영화적’ 얼굴 간직한 도시 부산

곽경택과 부산영화, 그 끈끈한 인연을 알기 위해 몇 가지 코드를 확인한다. 우선 그가 영화제작지로 부산을 특별히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산에선 마음 푹 놓고 영화를 만들 수 있다. 부산이 가진 여러 특징, 이건 여러모로 '영화적'이어서 촬영에 굉장히 유리하다. 부산시·부산영상위원회 같은 기관의 각별한 지원, 특히 '영화도시 부산'에 대한 부산시민의 열기 역시 독특하다.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온 부산토박이기에 여러모로 익숙하고, 영화적 밀도를 높이는데 쉽게 상승효과를 얻는 곳, 바로 부산이다.”

그의 부산예찬은 구체적이다. 부산은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 높고 낮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번화한 신시가지와 함께 30여 년 전 풍경을 간직한 달동네가 아직도 남아 있다, 영화보다 더 걸쭉한 토종 사투리들이 흘러넘치는 재래시장과 골목골목 남아 있는 진한 향수 역시 대규모 영화 세트장 그대로다. 그래서, 그는 부산의 영화적 얼굴을 기막히게 찾아내며, 작품마다 부산의 공간을 넘어, 도시의 문화, 역사, 정서까지 잘 녹여내고 있다는 것이다.

부산이기에 가능했던 영화 ‘친구’

Q. 영화감독 곽경택을 얘기하며 대표작 ‘친구’를 빼놓을 수 없다. 부산을 배경으로, 4명의 친구가 성장하며 겪는 사랑과 고통, 배신을 그려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연 영화, 2001년 당시 870만 관객을 동원, 청룡영화상 한국영화 최다관객상을 수상한 영화다. ‘친구’는 어떻게 구상했으며, ‘부산’을 어떻게 담아냈는가?

“이 영화는 나의 경험과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구상했다. 영화에 나오는 ‘상택’(서태화 분)의 캐릭터에 나의 경험을 많이 담아냈고…. 당대를 경험한 관객과 함께, 젊은 관객도 그 시절의 정서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영화다.” 그는 기억한다, '친구'는 배우보다 도시가 더 많은 얘기를 해 준 영화였으며, 그건 오직 부산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범일동 철로 변, 산복도로 집 옥상 같은 영화 촬영지도 머릿속에서 바로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고.

'친구'는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한 걸쭉한 대사도 일품이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니가 가라, 하와이”, “마이 무웃따 아이가, 고마해라” 같은 명대사들을 떠올려 보라. 당시, 다른 지역의 젊은 사람 모임에선 경상도 사람의 인기가 오르는 재미있는 현상도 있었다고. 대사의 해석에 더러 애로를 느낀 다른 지역 사람들의 빗발치는 문의(?) 때문이다. 배우 중 공동주연 유오성과 장동건은 서울 출신이라 영화를 위해 곽경택 감독에게 경상도 사투리 과외를 받았다. 실제 영화 상영 때도 이들의 사투리 구사가 좀 어색하다는 부산·경남지역 관객의 평도 있었다는 뒷얘기다.

“난, 이 사투리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다. 아무리 부산을 무대로 한 영화라지만, 배우들이 경상도 사투리만 쓰는 건 너무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름 마음을 졸여야 했다.” 결국 DVD 판의 경우 한글 대사의 한국영화에 표준어를 한글자막으로 삽입, 대사를 재해석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부산, ‘야구사랑’ 못지않은 ‘영화사랑’

Q. 당대의 걸작 ‘친구’가 부산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친구'는 스스로 생명력으로 한국영화사를 새로 쓴 작품이다. 이 영화로 부산의 매력을 골목 구석구석까지 세상에 알렸다. 부산시는 '친구'에서 영화가 지닌 매력과 위력을 깨닫고 영화촬영을 지원하고 유치하기 시작했다. 부산은 쓰나미 영화 ‘해운대’를 찍을 때 광안대교를 여섯 시간이나 막아줬다. 서울 같으면 난리가 날 일이다. 부산사람들이 영화에 쏟는 애정이 ‘야구 사랑’ 못지않은 덕분이다.” 곽 감독 역시 '친구'를 촬영할 때 부산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옛 조방 국제호텔 앞 버스 노선을 사흘이나 돌려주고….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부산시는 자갈치 건어물시장, 기장 대변항 방파제, 범일동 국제호텔 앞에 ‘친구’ 촬영을 기념하는 현판을 내걸었다. 범일동 철길 육교에서 삼일극장까지 ‘친구들의 질주’ 6백 미터 길을 ‘친구의 거리’로 명명했다. 결국 '영화영상도시 부산'을 각인시킨 것은 부산시·영상위·시민의 한결같은 노력의 결실이다.

곽경택 감독은 “부산만큼 좋은 영화촬영지가 없다”며 “앞으로도 부산에서 촬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부산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촬영 당시 모습.

부산 촬영환경, 무조건 서울보다 낫다

부산예찬론자 곽경택도 최근작 ‘통증’(2011)과 ‘미운오리새끼’(2012)는 서울에서 촬영했다. ‘영화촬영지’로서, 서울은 부산보다 어떤 비교 우위적 강점이 있을까?

“영화촬영지에 관한 한, 서울의 강점은 없다. 서울사람에게 부산처럼 ‘영화를 만드는데 내가 좀 불편해도 참아주자', 그런 배려가 있나? 없다. 이번에도 촬영지만 있었다면 당연히 부산에서 찍었을 것이다. '통증' 때 서울 지하철 장면, '미운 오리새끼' 때 사용 않는 군부대 장면, 이런 장소를 찾아 어쩔 수 없이 서울에서 촬영했을 뿐이다.” 그는 촬영지만 있다면 부산 촬영이 가장 좋다는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새삼 강조한다. 이번에도 그가 영화 촬영을 시작한다고 할 때 스태프들은 하나 둘 부산행 채비를 차렸단다. 그게 부산과 곽경택의 특수(?)한 관계다.

“흥행 실패한 작품 애정 많이 가더라”

Q. 제작 작품 중 가장 애정이 큰 작품은? 아쉬운 작품은?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나, 다 아프다. 그 중 관객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흥행에 실패한 작품에 아무래도 많은 애정이 간다. 내 할머니도 다섯 딸 중 가장 힘들게 사는 딸에게 가장 많은 애정을 주시더라. 나에겐 ‘닥터K'가 그런 작품이다.”

Q. 부산에서 작업하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내가 그저 부산에서 영화 찍다 보니, 영화 ‘해운대’도 내가 찍은 것으로 아는 분들이 적잖다. 드라마 ‘친구, 우리들의 전설’을 한창 찍을 때 한 아주머니가 그러시더라, ‘감독님, 드라마 찍으며 ’해운대‘는 또 언제 만들었느냐?’고. 윤제균 감독이 들으면 참 섭섭할 일이다.”

부산에서 영화 ‘태풍’ 화물선 씬 촬영 중 곽경택 감독과 배우 장동건이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부산의 의대생에서 영화감독까지

곽경택의 원래 진로는 의사였다. 아버지와 사촌 형제, 집안사위까지 주변 사람이 모두 의사였다. 그도 의사여야 밥 먹고 사는 줄 알았다. 6·25전쟁 때 월남하신 아버지 역시 전쟁 재발의 두려움 속에, 아들에게 “전쟁통에도 의사는 죽이지 않더라”라고 얘기했다. 그는 고3 때 확인한 ‘문과성적 우수’ 적성을 확인하고도 고신대 의대로 진학했다. 그는 어떻게 의대를 그만두고 영화공부로 돌아섰나?

“의대를 다니다 보니 의사인생이 참 답답하겠더라. 찡그리는 환자 얼굴을 평생 보고 살 생각을 해 보라. 난, TV 광고 찍는 일을 하고 싶었다. 삶이 다이내믹해지고, 멋진 남녀와 어울리며 살 수 있을 것 같고….” 그는 1991년 미국행을 결행, 뉴욕대 예술대 영화연출과에서 5년을 공부했다. 늘 한국적인 것을 찍으려고 애썼다. 졸업작품으로 단편 ‘영창’을 찍을 때도 그랬다. 부산헌병대 방위병으로 복무할 때 이발병부터 감방간수까지 온갖 일을 다 했던 경험을 살린 작품이다. 이때도 믿을 곳은 부산뿐, 자갈치에서 군복과 군대 소품을 사가서 찍었다.

Q. 졸업 후 미국에서 활동할 생각은 없었나?

“졸업작품 ‘영창이야기’는 상당한 화제였다. 아카데미상 스튜던트 파트 수상을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미국 국내 영화제여서 외국인은 수상 대상이 아니었다. 알고 보면 미국은 문화적 장벽도 높은 나라다. 특히 엔터테인먼트 부분, 열린 시장 같지만, 굉장히 폐쇄적이다. 사회적 신분(영주권·시민권)을 해결하며 일을 하기엔 벽이 높았다. 과감하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곽경택 감독은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영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진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로케이션 촬영 중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곽 감독 모습.

Q. 영화계 연고도 없었을 텐데 조감독 경력 없이 어떻게 감독으로 데뷔했나?

“1995년 ‘영창이야기’로 제2회 서울 단편 영화제 우수상을 받으며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다. 첫 상업영화 ‘억수탕’도 부산에서 찍었다. 서울엔 아는 사람, 연고도 없었고 조감독도 한번 안 해본 처지였다. 다행히 평단과 관객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단, 두 번째 작품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의대를 다닌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았던 ‘닥터K' 때문이다. 공교롭게 일본 만화 ’슈퍼닥터‘와 제목이 비슷한 바람에 욕도 많이 들었고….”

Q. 데뷔작 ‘억수탕’은 개봉 당시 부산에서 상영하지 않았던데?

“그렇다, 서울 극장 네 군데인가 개봉해 일주일 만에 내렸다. 독립영화 감성이어서 흥행에 실패한 것이다. 부산에선 ‘아들 영화 언제 개봉하느냐’고 묻는 주변 사람 등쌀에 부모님께서 계 모임을 못 나가실 정도였다. 아버지는 ‘필름 사다가 우리끼리라도 보자’고 하셨다. 너무 부끄러웠다. 할 수 없이 한 동시상영 한 극장을 찾아갔다. 끈질긴 부탁 끝에, 아무런 PR 없이 1주일 상영했다. 가족적 만족에 불과했지.”

Q. ‘억수탕’ ‘닥터K’,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다시 시나리오를 들고 다니니 아는 형이 ‘염치없다. 그만 돌아다니라’고 하더라. 사람들이 실패의 기억을 잊을 때쯤 돌아다니라고.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철저히 견디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만든 것이 대박 ‘친구’였다.”

Q. 11편의 작품, 어떻게 생각하나?

데뷔작 ‘억수탕’, 그때 내가 참 용감하고 무모했다는 생각이 든다. ‘닥터K’는 안타깝고 미안한 작품이다. 갖고 있던 이야기 중 제일 좋은 이야기인데 그것을 살리지 못했다. ‘친구’는 ‘잔인하게 영화를 찍었네!’라는 생각이 들고. ‘똥개’는 배우 정우성한테 너무 고마운 영화다. ‘태풍’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필사적으로 찍은 영화여서 아직 진한 애정이 남아있고. ‘사랑’은 첫 멜로 장르를 찍으면서 힘들었던 나 자신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다. 그때 배우의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징글징글하다.”

영화 ‘통증’으로 정통멜로 도전

그는 ‘닥터K’의 실패를 뒤로하고 2001년 ‘친구’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친구’, 그의 대표적 흥행작이라는 점과 함께, '곽경택 스타일'의 출발점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의 이미지는 주로 '남성영화', 또는 '부산사나이 영화'다. 그는 선이 굵고 강한 영화를 많이 만든 것이다. 그 ‘부산 사나이’가 최근 정통멜로 '통증'(2011.09)을 제작했다. ‘통증’은 그 특유의 어두운 색채를 유지하되 남녀 주인공의 조화로운 비중과 정통멜로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동안 내로라하는 미남 배우와 숱한 작업을 한 끝에 이제 권상우를 선택했다.

“권상우와는 한 번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배우라고 생각했고, 내가 연출한 작품 중 최고의 남자 배우라는 생각도 든다. 여자 주연 정려원 역시 배우라는 직업을 감사하게 여기는 심성 고운 연기자더라. 연기를 잘하면서 소탈하기까지 해 흡족했다.”

그 ‘통증’ 역시 흥행성적은 좋지 않았다. 추석 때 개봉했으나, 가족과 함께 명절을 즐길 제목으론 좋지 않았던 탓이다. 다행히 일본에서 3개월을 상영, 체면을 살려준 경우다.

영화 ‘미운오리새끼’, “내 20대 담았다”

Q. 20대 시절을 담은 자전적 영화 ‘미운오리새끼’가 화제다. ‘영창 이야기’를 확장시킨 작품이라던데?

“맞다. ‘영창 이야기’는 내가 영화판에 들어올 수 있게 물꼬를 터준 영화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이 영화를 꼭 장편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사실 ‘미운오리새끼’는 여러 투자사에서 퇴짜를 맞았다. 결국 나와 모든 스태프의 인건비를 투자해서 만들었다. ‘친구’ 이후 관객층을 넓히기 위해 시나리오를 다듬으며 현실과 타협을 해오기도 했다. 이번에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보여주고 싶은 단 한 장면을 위해 전혀 타협하지 않았다.”

‘미운오리새끼’는 그의 20대 시절을 회상하며 만든 영화다. 1987년 민주화 항쟁이 뜨거웠던 시절 6개월 방위, 소위 '육방'의 이야기를 담았다. 군대에서 ‘육방’의 존재는 부대의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는 잡병. 영화는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그때, ‘육방’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주인공을 통해, 당시나 지금이나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미운오리새끼’들의 힘찬 발돋움을 유쾌하게 그려냈다. 오는 8월 관객과 만날 예정.

Q. '미운오리새끼‘에 신인 배우를 기용했다. ‘친구’ 장동건, ‘똥개’ 정우성, ‘사랑’ 주진모를 생각하면 파격적 캐스팅이다. 특히 연기자 오디션 프로그램 ‘기적의 오디션(SBS, 2011)’을 통해 ‘발견’한 김준구, 정예진이 열연했다는데?

“감독이라면 누구나 그림에 덧칠하기보다는, 백지장에 새로운 뭔가를 그리고 싶은 욕망이 있다. ‘기적의 오디션’에서 그들을 보면서 그런 욕망이 생기더라. 김준구는 가장 어렵다는 코미디와 정극을 자유롭게 구사했다. 정예진은 시나리오 속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표현했다. 참 잘한 선택이다.”

‘미운오리새끼’는 곽경택 감독의 20대를 담은 영화다. 곽경택 감독이 모델로 참가한 ‘미운오리새끼’ 포스터.

Q. ‘기적의 오디션’에서 독설가로 명성이 높았다. 멘토로서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격려 또는 질책의 얘기였나?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영화계가 얼마나 힘든 곳인가? 최소한의 갑옷은 입혀서 내보내고 싶다. 젊은 친구들이 꿈은 참 많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감수해야 할 부분에 대한 각오는 약하다. 지금 ‘88만 원 세대’, 너무 힘든 시절이다. 그 힘든 시절, 선배세대들도 다 겪고 극복했다. 그런 생각을 전하려, 뒤집어 표현한 부분이 많다.”

Q. 살아가며 평소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얼마 전 작품작업을 마치고 경제적으로 참 힘든 시절 얘기다. 택시를 탔더니 기사분이 날 알아보시더라. ‘영화 모두, 잘 봤다. 너무 감사하다’고 격려하시며, 택시비 6,000원을 안 받으려 하시더라. 그저 내 영화 좋아하는 분더러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정을 담아 격려해 주는 팬 만나면 정말 힘이 난다.” 그는 ‘태풍’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릴 때,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해군사관학교 학생이 자기 고교생 때 ‘태풍’을 보고 해군 장교 될 결심을 했다는 사연이다. 기분이 너무 좋아 만나 밥도 먹고 하는 사이를 유지한다. 영화 한 편이 한 인생의 좌표였다는 것, 참 행복한 일이다.

Q. 다시 태어나도 영화감독을 할 것 같은가?

“당연하다. 난 영화에서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그냥 영화 만드는 일이 너무 좋다. 어차피 인생은 꿈처럼 살다 가는 것 아닌가. 여러 사람의 삶을 영화를 통해 고찰하고 묘사하는 것, 남보다 풍족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내내 그지없이 겸손한 자세와 목소리를 유지했지만, 이 부분에선 굉장한 확신을 당당하게 드러냈다.

곽경택 감독은 영화에서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영화 만드는 일이 좋다고 말한다. 그는 늘 영화 만드는 것이 참 행복하다.

부산에서 상상력 키운 ‘광복동 키드’

알려진 대로, 그는 초등에서 대학까지 부산에서 성장했다. 어릴 적 태종대 앞바다에 떠가는 배들을 보며 풍부한 감성을 키웠다. 특히 초등 4학년-토성중-부산고 졸업 때까지 토성동에 살며, 집 건너 광복동 극장가에서 살다시피 했다. ‘광복동 키드’다. 그 부산의 성장기는 그의 정서 형성과 작품 제작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한 인터뷰에서 그는 “고향 부산은 내 상상력의 모태”라고 말한 적도 있다.

“난 태종대에서 정을 알았고 광복동에서 상상력을 키웠다. 영화감독 제임스 캐머런도 그의 상상력의 깊이는 호주에서 바다를 보고 자라며 얻은 것이라고 하더라. 난 영화 ‘친구’를 찍을 때 장동건, 유오성과 출연자들을 태종대부터 데려갔다. 바다를 따라 함께 걸으며 누구든 마음을 터놓고 친해질 수밖에 없는 곳이 태종대다.” 그는 뉴욕대 공부 때 그림이나 사진 한 장을 내주고 발표를 시키는 ‘상상수업’의 강의방식이 어릴 때 태종대의 배를 보며 상상했던 방식과 똑같았다고 기억한다.

그는 학창시절 영화를 엄청나게 봤다. 당시 광복동은 부산의 대표적 극장가였다. 왕자·국도·제일·부산·대영·부산, 자갈치 쪽 동명극장까지. 그는 휴일 아침 극장 간판을 보며 걷다 내키면 들어가 조조할인 영화를 봤다. ‘보디 히트’나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처럼 진한 영화는 앉은 채로 몇 번씩 보기도 했다.

‘영화감독 곽경택’을 키운 데는 아버지도 큰 몫을 했다. 집에 컬러TV를 들여놓으면서 그간 쓰던 흑백TV를 아들 방으로 넣어 주셨다. 그는 주말마다 신바람 나게 영화를 봤다. 안테나를 잘 맞추면 일본 방송도 잡혔다. “이제 생각해보니 영화감독 된 것도 다 어려서 정해진 운명이었구나 싶다”, 그의 생각이다.

“난 부산 DNA 배어 있는 천상 부산사람”

Q. 부산사람이 보는 부산사람 기질, 어떤가?

“부산사람들은 뒤끝이 없다. 화끈하다. 거칠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소리만 클 뿐, 음흉하지도 않고 숨겨둔 셈도 없다 ‘됐나? 됐다!’ 두 마디면 끝이다. 응어리를 바다에 다 토해내고 살아서 그런가 보다.” 부산의 뜨거운 야구열기 앞에 그도 예외가 아니다. 경기장에 나가 시구도 하고, 응원 맥주파티도 여는 부산 야구광이다.

Q. ‘인간 곽경택’에게 ‘고향 부산’은 어떤 의미인가?

“온몸 세포 구석구석까지 부산의 DNA가 배어있는 것 같다. 난, 천상 부산사람이다.” 그는 영화촬영이 없어도 한 달에 일주일은 부산에 온다. 어릴 적 익혔던 부산 음식가게부터 달려간다. 가야와 남포동의 밀면 집, 국제시장 안 돼지국밥집까지.

Q.앞으로도 부산에서 계속 영화를 제작할 생각인가?

“당연하다. 여러모로 일하기 편하고 맘도 편하고, 부산 일을 안 할 이유가 없다.”

부산은 한국 영화중심도시로 도약하고, 세계 속 좋은 브랜드 이미지를 키워가고 있다. 사진은 부산대학교에서 영화 ‘태풍’ 크랭크인하던 날. 왼쪽부터 배우 김갑수, 정보석, 이정재, 곽경택 감독.

영화도시 부산 알리기 공격적 마케팅 필요

최근 플레이스 스토리텔링(Place Storytelling)이 새 화두다. 우리 삶에서 만나는 여러 공간은 다양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 그 공간은 머무르다 떠난 사람에 의해 공간의 스토리로 전해질 수 있다. 결국 스토리를 통해 공간의 브랜드 가치를 만드는 과정이다. 곽경택 역시 많은 부산영화를 제작하며, 많은 플레이스에서, 많은 스토리를 낳을 수 있었을 터, 부산은 과연 그 플레이스 마케팅을 잘하고 있을까?

“어떤 일이든 완벽하긴 어렵다. 부산 역시 ‘영화도시 만들기’의 의지는 분명히 살아있다. 이런 의지와 애정이 없었다면 많은 영화·영화인이 부산으로 몰려들었겠는가. 그 결과, 부산은 한국의 영화중심도시로 도약하고, 세계 속에 좋은 브랜드 이미지를 키워가고 있다. 단, 그 마케팅 작업은 좀 더 공격적이었으면 좋겠다.” 앉아서 영화제 손님을 맞는 단계보단, TF팀을 만들어 중국·일본과 동남아에서 ‘영화도시 부산’을 PR 하는 직접적 마케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는 예 한 가지를 든다. ‘반지의 제왕’ ‘킹콩’을 만든 뉴질랜드 피터 잭슨(Peter Jackson) 감독은 고향 뉴질랜드에서 영화를 하고 싶어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끌고 갔다고, 만나보니 1시간 중 59분을 뉴질랜드 영화의 장점을 얘기하더라고. 부산도 영화촬영지에 관한 한, 그 뛰어난 환경과 역량을 힘껏 ‘팔’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세계 속 명작 '부산영화‘, 그가 맡아야 할 남은 숙제

Q. 부산은 영화의 전당을 짓고 영화·영상 클러스터를 조성하며 ‘아시아 영상산업 중심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그 미래는 어떨까?

“그 도시 비전, 오직 영화의 힘만으론 한계가 있을 것이다. 영화 영상에의 뜨거운 의지와 함께, 도시의 경제적 역량도 맞물려야 하지 않을까? 영화의 전당, 너무 훌륭하고 자랑스럽다. 그러나 결국은 콘텐츠 싸움 아니겠나.” 부산의 독자적 노하우에 의존하지 말고, 다른 도시가 따라오지 못할 내·외형적 내용을 더, 공격적으로 갖춰가야 하리라는 것이다.

Q. 영화·영상도시 부산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부산시-부산시민-영화계에, 각자 넘치고 모자라는 것은 무엇일까?

“부산시민에겐 무엇을 더 바라겠나. 부산처럼 영화를 애호하는 분위기가 어디 있나. 다만, 정부나 부산시 입장에선 공공기관 이전·센텀 클러스터 조성 같은 기반 굳히기와 함께, 좋은 영화를 끌어오는 노력이 더 필요할 듯하다. 영화계 역시 이젠 ‘정치’에 휘둘리지 않도록 정치에 의존하는 습관을 버릴 때가 아닌가 한다.” 그는 이 부분에서 “잘 알아서 정리해 달라”는 부탁을 붙였지만, 역대 대통령 또는 부산시장의 의지가 영화산업의 성쇠를 가름하는 상황은 극복해야 하리라는, 그런 생각이다.

“영화·영상에 관한 한, 부산의 경쟁력은 서울을 넘어, 도쿄 상하이 베이징을 초월한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가 내린 결론이다. 부산은 더 이상 서울의 ‘시다바리’가 아니라는 확신이다. 모든 분야가 그러하듯 영화 역시 서울중심의 발전 흐름을 보였지만 이제 그 중심은 부산으로 옮겨오는 흐름이라는 것이다. 그 바탕은 당연하다, 부산시의 적극적 의지와 지원, 부산시민의 열광적 애호의식이다.

그는 부산에서 성장하며 얻은 ‘부산 DNA'를 온전히 ’부산영화‘의 발전에 쏟아 넣고 있다. 부산사나이의 기질대로 고향에 화끈하게 보은하는 과정이다. 그 역시 그 과정을 그렇게 즐기며 혼을 쏟아 매달리고 있으니, 보는 사람 역시 즐겁지 아니한가? 그래도 그에겐 남은 숙제가 있을 터이다. 영화 ’친구‘로 한국을 흔들었듯,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부산영화‘를 제작하는 것이다. 그 ’메이드 인 부산‘ 명작을 기다리는 일 역시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의 즐거움 아니겠나?

영화 ‘친구’의 인기의 흥행비결은 기념비적이었으며,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사진은 초등학생들이 영화 촬영 중간 쉬고 있는 곽경택 감독에게 사인을 요청하고 있는 모습.

작성자
차용범
작성일자
2012-06-18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첨부파일
부산이라좋다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이전글 다음글

페이지만족도

페이지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평균 : 0참여 : 0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를 위한 장이므로 부산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부산민원 120 - 민원신청 을 이용해 주시고, 내용 입력시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광고, 저속한 표현, 정치적 내용, 개인정보 노출 등은 별도의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부산민원 120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