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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소리따라 소리가 된 동래의 마지막 소리꾼

예술부산 ‘예인탐방’ ⑦ 동래학춤 구음 예능보유자 유금선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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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부산|예인탐방
내용

2009년 12월 7일 부산시민회관 소극장에서 민족미학연구소(소장:채희완)가 주최하는 유금선 소리 인생을 짚어보는 공연이 마련되었다. 숨은 예인 한마당으로 기획된 이 프로그램은 ‘소리가 소리를 불러 소리따라 소리가 된 동래의 마지막 소리꾼’이라는 부제를 단 공연이었다. 이 공연이 열리기 얼마 전에 유금선 선생을 만나 가슴속에서 울려나오는 구음의 뿌리를 찾아보고자 선생의 지난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은 1931년 3월 31일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온천동에 살고 있으니 동래를 떠나서 살아본 적이 없는 동래 토박이다. 아버지는 유정술 씨로 농사일을 했었고 어머니는 김광조 씨였다. 4녀 1남 중 셋째였다. 당시의 사회적 환경이 그러했던 만큼 가난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서민 집안에서 자랐다.

소리는 어디서 배우셨나요?

내가 열네 살 때이니까 1944년쯤인가 아마도 해방되기 전으로 기억이 되는데 동래권번에 들어간 것이 소리공부를 시작한 동기지요. 가난한 집안이라 당시의 주위 분위기로는 여자가 교육을 받을 환경은 못 되었고 먹고 사는 방도를 찾는다는 것이 동래권번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대동아전쟁 때라서 사회분위기는 엉망이었지만 화려한 의상을 입고 인력거를 타고 다니는 기생들이 참 보기도 좋았고 부럽고 동경의 대상이었어요. 거리에서 기생들을 볼 때마다 어린 나이에 나도 저렇게 돼야지 하는 생각을 많이 했고 결국 어느 날 내 발로 동래권번을 찾아갔지요. 돈벌이가 된다는 것이 권번을 찾아간 가장 큰 이유이고 내가 열심히 돈 벌어서 두 동생들 공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들어갔었고 그게 나의 꿈이었으니까...

선생은 동래권번에서 소리공부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권번의 수업 내용 중에 동래학춤 구음이 들어있을 리는 만무하여 질문하였다.

동래권번에서의 수업은 어떤 것들이었나요

박기채 선생으로부터 처음 배운 것이 단가 함평천지와 만고강산이였지요. 함평천지는 호남가인데 그 가사 첫머리를 보면 (노래를 하신다.) ‘함평천지 늙은 몸이 광주고향을 보려하고 제주어선 빌려 타고 해남으로 내려갈 제’ 무릎장단을 치며 첫 소절을 읊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만고강산을 잇는다. ‘만고강산 유람할 제 삼신산이 어디메뇨. 일봉래 이방장과 삼영주가 아니더냐. 죽장竹杖짚고 풍월실어 봉래산을 구경 갈 제 경포 동령의 명월을 구경하고…’

조각배로 물결을 타넘듯 유량하게 넘어가는 단가 한마디에 흥이 저절로 살아난다.

권번의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으며, 당시 어울린 분들은

권번에서 처음 만난 선생은 얼굴도 못 생겼고 가르치는 소리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이름도 기억이 잘 안 나고 여튼 인연이 안 되었지요. 두 번째 만난 선생이 박기채 선생이였는데 잘생겼지요. 물론 앞 선생보다 소리도 잘했고... 송계 정응민 선생의 제자인 박선생이 북을 앞에다 놓고 소리를 하면서 북을 치면 우리는 무릎장단을 치면서 소리를 배웠지. 그 뒤에 최장술, 강창범 선생에게도 소리를 배우고 최소학 선생에게서는 조선춤을 배웠지요. 원옥화(강태홍류 가야금산조를 전수받은 가야금 산조의 명인 1928~1971?), 김강남월(판소리 명인), 안향연(판소리 명인) 씨 등과 어울렸는데, 그 시절 참 재미(?)있었어요.

선생의 권번 시절 이야기를 듣다보면 동래학춤 구음을 배운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동래권번에 들어가서 단가와 민요를 배웠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선생은 동래학춤 구음을 어디서 배운 것일까?

잠시 동래권번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동래관광호텔에서 발행한 「동래온천소지」를 뒤져보았다. 동래지역의 기생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송상현 부사의 애첩 금섬부터 시작해서 동래 출신 과학자 장영실의 어머니가 동래 관기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동래권번의 약사이다. 기록에 의하면 1898년 일본 영사가 조선의 궁내부에 동래온천 임차계약을 요구하는데 이때 일본 기생들을 공동관리하는 [오끼야권번]이 생기고 게이샤(藝者를 일본식으로 발음)들의 조직인 권번을 본 따 1910년 [동래기생조합]을 결성했는데 사무실은 동래세무서 옆 중앙의원 자리였다. 1896년 공사노비철폐제도가 시행되어 관기가 없어진 이후 14년 만이다. 동래구 명륜동에 있는 영보단은 노비와 기생의 호적을 소멸시킨 은총을 영원토록 기념하는 비석으로 세운 것이다. 1912년 [동래예기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하는데 게이샤가 예자藝者를 뜻하므로 조선기생들도 예기藝妓로 표현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1920년 명칭을 [동래권번]으로 바꾼다. 권번은 교방敎坊의 일본식 발음이라 한다. 1940년대 사무실을 온천동으로 옮긴다. 1945년 해방을 맞은 동래권번은 또 다른 고객인 미군들과 함께 어울리며 서양 사교춤과 팝송과 재즈, 그리고 대중가요의 물결 속에 휩싸인다. 1961년 군사구데타와 함께 권번은 활동의 제재를 받으며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1962년에 [동래국악원]으로 명칭을 개칭했다. 1968년에 온천동 210번지, 부산시 소유 낡은 일본식 목조건물을 불하받아 사무실을 이전하고 [동래국악진흥회]라는 법인체로 변신한다. 현재는 [동래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다시 유금선 선생의 이야기로 돌아가본다. 선생은 결혼 때문에 스물일곱 살에 동래권번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1957년 무렵이다. 전쟁 이후의 피폐한 한국사회의 모습을 상상하면 화류계가 당면했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겠다.

운명은 비켜가지 않는다. 1960년대 초 [금정]이라는 일식집을 개업하였는데 복어 식중독사고가 일어나 그야말로 쫄딱 망하는 입장에 처한다. 그리고 하늘의 뜻은 어느 후원자로 하여금 동래세무서 뒤에 [오미장]이라는 요정을 운영하게 만들고 소리를 계속하게 한다. 80년 봄과 함께 오미장은 역사의 뒷길로 사라졌다.

선생이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의 회원이 된 것은 1984년 1월 22일이다. 동래학춤은 1972년 9월 19일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고 유금선 선생 이전에는 김계향 씨가 구음을 맡았었다. 선생이 동래학춤 구음으로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은 것은 1993년 4월 20일이다. 정리해보면 유금선 선생의 동래학춤 구음은 권번에서 배운 것은 아니다. 권번에서 배운 소리 바탕에 자신의 삶을 묻혀서 만들어 낸 영혼이 담긴 소리가 오늘날의 동래학춤 구음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학춤 추는 사람을 보면서 즉흥으로 만들어 낸 독창적인 구음 시나위라고나 할까? 추측컨대 앞서 동래학춤 구음을 담당했던 김계향 씨(작고)나 김석출 씨(작고:동해안 별신굿 예능보유자)와도 교분이 깊었던 것으로 보아 소릿길은 다르지만 동해안별신굿을 연희했던 김계향 씨의 소리가 유금선 선생에게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정착되어서 오늘날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독보적인 소리인 현재의 유금선 동래학춤 구음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동래학춤 구음의 특징을 말씀해주신다면

학춤을 추게 만드는 구음은 내 속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지요. 내가 살아오면서 들은 악기소리들을 입소리로 바꾸어 풀어낸 것이 구음이다. 대금과 아쟁, 피리와 같은 악기의 소리를 내어 춤을 추게 만든 것이 내 소리의 특징이지요. 입으로 삼현육각의 소리를 낸다고 생각하면 된다. 참 어렵다. 대금소리는 띠이띠--- 피리는 나아--너---- 가야금은 당기당당 이렇게 풀어내어 조화를 이루어야 하니 영혼으로 부를 수밖에 없지 않겠나? 악보로 채보를 해서 부르면 맛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동래학춤 구음을 하려면 소리목도 타고 나야 하지. 나는 목하나 잘 타고나서 얼씨구 절씨구 하면서 잘 먹고 살고 있지요.

그렇다면 동래학춤 구음을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천부적인 소질이 있거나 타고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동래학춤 구음 공부를 하려면 우선 기본적으로 판소리나 단가, 민요 같은 소리공부를 할 필요가 있겠지요. 그 다음에 자신의 삶을 담아내는 영혼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체득해야 해요. 많이 듣고 많이 부르는 방법도 좋겠지.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품을 닦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착하고 선한 사람의 소리와 악한 사람의 소리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천사의 소리와 악마의 소리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 안 된 것들이 부르는 소리가 듣기 좋을 리 없지요.

전수교육은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요

현재는 김신영 김영숙 허애명 공정희 주영란 구옥자 같은 제자들이 있습니다. 열심히들 하고 있어요. 이런 친구들이 동래학춤 구음 속에 영혼을 담아야한다는 뜻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따라준다면 앞으로 자기들만의 구음세계를 만들 수 있겠지요만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천천히 차근차근 자기개발을 해 나가야겠지요. 자신감을 가지고 전력투구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죽기 살기로 해보는 것이지요.

동래학춤 구음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유금선 선생의 구음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소리이다. 다음 세대 누군가가 이어받겠지만 이미 유금선 선생의 소리는 아니다. 다행히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서 CD음반으로 남겨 기록하고 있어 후세에까지 소리는 전해질 수 있겠다. 영혼의 소리 동래학춤 구음을 누가 이어 받을지 궁금하다.

글 _ 김경화 / 연극연출가

작성자
예술부산 2010년1/2월호
작성일자
2012-05-15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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