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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외유내강의 지성인 살매 김태홍

예술부산 ‘예인탐방’ ⑥ 故 김태홍 시인

내용

김태홍金泰洪은 1925년 3월 20일 경남 창원군 창원면에서 태어났다. 호를 살매라 했다. 해인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마산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부산고등학교 교사가 됨으로써 부산으로 옮겨왔다.

1947년 3월 문예신문에 시 ‘고향’ 을 발표한 것이 첫 작품이었다. 이 문예신문은 주간週刊으로 부산의 대교로(지금이 중앙동)에서 1946년 12월 염주용廉周用이 발간했는데 우리나라 문예전문 신문으로서는 맨 처음이었다.

염주용은 동래 복천동 출신의 시인으로 유치환柳致環과 생리生理동인이었다. 염주용이 발행한 문예신문은 4년간 발행되었는데 김태홍은 문예신문에 여러 편의 시를 발표했다.

김태홍은 1950년 시집 『땀과 장미와 시(흥민사)』가 발간됨으로써 시인의 위치를 굳혔다.

1954년에는 제2시집 『창窓』을 자유문화사에서 발간했는데 자필로 씌어진 국판 반양장의 107쪽 부피였다. 지은이는 시집 후기에 시가 널리 읽히고 대중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시가 귀족성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58년에는 제3시집 『조류潮流의 합창』을 인간사에서 발간했다. 제3시집에서는 제2시집이 가진 서정성보다 사회성이 드러나는 시를 볼 수 있다. 65년에는 제4시집 『당신이 빛을』을 청구문화사에서 발간했다. 이 제4시집에서는 인생을 관조하는 경지를 보이고 있다. 후기에는 제2시집 후기와는 달리 “어쩌면 시는 스스로 선택한 허영이었는지 모른다. 사치奢侈, 아니 낭비였는지 모를 일이다.” 고 했다. 제2시집에서 10년을 지낸 뒤 역시 10년 전 시가 가진 심서心緖가 일반인에게 두루 미치지 못하는 일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73년에는 제5시집 『공空』을 시문학사에서 발간했다. 이 제5시집에서는 선적禪的 경지로 나아가는 그의 시정신의 추이를 볼 수 있다.
수필집으로 63년 『고독을 강물처럼』을 인간사에서 발간했다.
1960년 그는 부산시문화상을 받았다.

그는 꾸준히 시작업을 이어가면서 동도 시인과 어울려 시의 기능과 정서를 갈고 닦는 동인회도 조직 참여했다. 그 시동인회가 1950년대 초에 형성된 시문詩門이었다. 동인으로는 손동인孫東仁 안장현安章鉉 김태홍金泰洪, 세 사람이었다.

이 동인들은 그 당시 부산 시내 고등학교 교사로 자주 만나는 사이였고 시의 경향이나 나이도 거의 같아 의기투합한 사이였다. 이 동인들은 1953년 동인지 시문을 내고 54년에는 제2시집을 내었다. 이들은 6·25전쟁 당시의 피난문인들이 떠난 남포동의 쓸쓸한 막걸리 집에서 시대를 한탄하고 문학과 시를 얘기했다. 손동인이 시문동인 출범 당시를 회고하는 글에서 “우리는 목소리를 같이 하여 전쟁을 저주하고 인간 회복을 절규했다. 우리는 이때 부정否定의 미학을 배웠고 거부의 철학을 배웠다.” 고 했다.

손동인의 글 그대로 이들은 젊은 지성인이었다. 나라와 시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교육자이자 문학인이었다. 그 심서心緖를 사무사思無邪의 정관靜觀으로 다스려야 하는 두 갈래 길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의 정의파적正義派的 기질은 나라와 겨레의 어려움을 방관할 수 없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저항성은 때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한 일은 김주열金朱烈 군의 죽음에 항거한 김태홍의 시로써도 알 수 있다. 그건 1960년 4·19혁명의 7일 전인 4월 12일이었다.

마산의 김주열이 자유당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3·15 학생마산의거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그 시체 사진과 함께 김태홍의 시 ‘마산은!’ 이 부산일보에 크게 실렸다. 그 사진과 시가 실증적 동기가 되어 민주화의 횃불이 노도怒濤 같은 기세로 번지는 계기가 되었다. 4·19 민주혁명을 성취하는 촉매제적 역할을 했다. 그날의 그의 시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마산은 
고요한 합포만合浦灣 나의 고향
..........

봄비에 눈물이 말없이 어둠속에 피면
눈동자에 탄환이 박힌 소녀의 시체가
대낮에 표류하는 부두
......

정치는 응시하라 세계는
이곳 이 소년의 표정을 읽어라
이방인이 아닌 소년의 못다한 염원들을 
생각해 보라고.

그때는 자유당의 독재정권 아래 보안법과 계엄령으로 군부의 시퍼런 칼날이 번득이고 있었다. 보도견제도 극심했다. 부산일보도 사운社運을 건 보도였을 것이고 그 시를 쓴 김태홍도 신변의 위험을 각오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같은 정의파적 기질은 61년의 5·16군사쿠데타에서 파탄으로 나타났다. 5·16으로 김태홍과 시문동인인 손동인이 교직에서 파직되면서 구금되었다. 김태홍은 부산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부산일보 논설위원을 겸해 있었는데 그 논설이 문제가 되어 구금되었다. 손동인은 그동안 쓴 글도 글이지만 교원단체에 있으면서 교육정책에 관해 그 나름의 비판과 행동을 한 일이 있었다.

김태홍은 구금에서 풀려나서 부산일보 상임논설위원이 되었다. 교직으로는 63년이 되어서야 부산고등학교에 다시 복직할 수 있었다. 그는 한성여대(경성대학의 전신), 부산여대(신라대학의 전신)에 출강도 했다. 그가 맡은 강의는 시문학이었다. 한때는 부산교육연구원의 연구부장을 한 바도 있었다. 그때 교육자는 문예적인 소양도 갖추어야 한다고 교사들에게 시조와 문예작품을 투고케 하여 입선 교사들에게는 등급에 따라 점수를 주어 그 점수를 승진점수에 가산해 주는 제도를 만들어 실행한 적도 있었다. 그는 다재다능했다. 그러나 그  다재다능을 밖으로 내세우는 일이 없었다. 눈이 부리부리하여 황소눈 같다 하여 그의 별명은 황소였다. 별명 황소처럼 묵묵히 제 소신을 밀고나가는 외강내유外剛內柔의 지성인이었다. 그의 호 살매도 그랬다. 누가 붙여준 호는 아닌 것 같았다. 가까운 친지들에게도 자기 호에 대해서는 일체 말이 없었다. 그런 어느 때 가까운 친지끼리 모인 자리서 그 누구가 “살매라면 살아있는 매지, 저 부리부리한 눈은 사나운 매 그대로야.” 고 했더니 김태홍이 “에끼. 사람” 하고 되받더란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살매 좋은 아호지, 살아있는 회초리, 교편敎鞭을 쥔 자로서는 더할 수 없는 호지.” 하고 그 매를 교편을 말할 때의 회초리로 말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김태홍이 빙그레한 회심會心의 웃음을 웃었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의 살매는 교직자로서 살아 있는 매(회초리)가 되고자 하는 다짐에서 오는 호일 수도 있다.

시인이 가진 시정신은 나아가는 시업에 따라 변천한다. 그 변천이 진전이다. 그의 시도 변천을 거듭해갔다. 그 변천 끝에는 노자老子의 무위無爲사상에 어울려드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그의 시 ‘산사山寺에는’ 을 옮겨본다.

山寺에는 
홈으로 내리는 물소리 뿐이로다

山寺에는 
흰 구름과 바람이 
쓰르라미 소리를 들으면서 

山寺에는 
홈대에 잠자는 잠자리에서
고요가 스미어 나오고 

부처는 
이 정적靜寂을 숨쉬고 사는가 보다

山寺에는 
사랑도 없고
다만 노승老僧의 마음만이 

山寺에는 
영원永遠처럼 가득하더라

그는 충렬고등학교 교장 재임 당시인 1985년 11월 4일 췌장암으로 향년 60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유명을 달리하자 문인장과 학교장을 겸한 장의절차를 거쳐 기장군 정관면의 백운묘지에 안장되었다.

작성자
예술부산 2009년 11/12월호
작성일자
2012-05-08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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