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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부산 ‘예인탐방’ ④ 연극연출가 故 홍성모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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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부산|예인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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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모 1954년 5월 10일 출생. 2008년  8월 25일 사망…

누군가 인생이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 죽음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경지를 아직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죽음은 인생의 연속이며 삶과 죽음이 하나의 고리로 묶여 마치 화면의 다음 장면처럼 연속되어지는 것이라는 차분하고 지적인 말을 수용하고 싶지 않다. 그냥 슬프다. 울고불고 악을 쓰고 거부하고 싶다. 우리 선생님이 너무 보고 싶기 때문이다.

홍성모 선생님은 연극 연출가이다. 그리고 부산에서 최초로 뮤지컬을 올린 분이다. 선생님의 연극은 언제나 실험적이고, 남과 달라서 많은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하기론 파 라이트의 연극화를 실험적으로 올린 분이기도 하고, 언제나 뜬금없는 행동으로 보이는 독특한 언행들이 무대 위에 연출되어지기도 했다.

내가 처음 홍성모 선생님을 만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그때 나는 [극단 say]에서 처음으로 연극을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 극단에서는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극단 현장]에서 동일 작품을 비슷한 시기에 올린다고 해 이슈가 되었었다. 이를 두고 KBS에서 같은 작품 두 색깔이라는 테마로 방송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그때 홍성모 선생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그저 연극하는 꼬맹이로 방송국에 가 선배들의 인터뷰를 구경하는 수준이었다. 우리 극단에서 준비하는 <고도>는 원전 해석에 충실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홍성모 선생님의 <고도>는 오지 않는 고도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고고와 디디가 찾아나서는 실험적인 것이었다. 선생님 극단의 <고도>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고도였다. 베케트를 향한 것인지 고도를 향한 것인지 총을 들고 다니며, 트램펄린 위를 뛰며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인간적인 디디와 고고였다. 공연이 끝나고 인터뷰가 시작되어야 하는데 시원한 야자수 그림의 셔츠를 입은 큰 아저씨 한 분이 밀짚 중절모를 쓰시고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기다리다 못한 - 워낙에 선생님은 음식을 천천히 드시는 분이셨다. PD가  “음료수를 다 마시면 인터뷰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말을 하자 먹던 음료수 캔 위에 자신의 모자를 씌우며 “자, 이제 시작합시다. 진작 말을 하시지” 라고 해서 촬영 스튜디오에 한바탕 웃음이 일어났었다.

이후 나는 1995년도에 다시 선생님을 만나 지금까지 사제지간으로 지내오면서 우연히 그때 그 밀짚모자의 아저씨가 선생님임을 기억했고, 인연의 소중함과 함께 선생님의 타고난 독창성과 엉뚱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인연이었는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나의 첫 작품인 <고도를 기다리며>는 선생님과의 인연을 시작하게 했고, 선생님과 내가 함께한 우리 극단 [바다와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정 테마가 되었다. 물론 우리 고도가 극단에서 올려질 때마다 재해석되고 변형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연극인으로서의 홍성모 선생님은 기이한 사람으로, 친구 많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워낙에 독특하게 살았던 분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다 알지 못하고 함께하지 못했던 선생님의 인생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진 선생님의 인생은 세월과 더불어 더욱 기이하고 독특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부산을 너무나 사랑했던 선생님도 한때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인 적이 있으셨다 한다. 강원도 춘천으로 올라가신 선생님은 지금의 닭갈비 골목이 있는 명동 한복판에서 [양산박]이란 술집을 운영하셨는데 주인 없는 가게를 운영했다 한다. 손님들이 오면 냉장고를 열어 적당한 찬거리로 안주를 만들어 먹고, 내고 싶은 만큼의 돈을 올려놓고 가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그 당시 소설가 이외수 씨와 함께 그저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사셨다 한다. 소설가 이외수 씨는 그 당시 잘 씻지도 않고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 소설가로 유명했는데, 그 시절을 함께하셨던 분들의 말을 빌면 소설가 이외수를 능가하는 지저분함과 기이함이 늘 따라다녔다 한다. 그때 함께했던 분들은 홍성모 선생님과 동고동락하면서 평생의 지기가 되기도 했다. 선생님의 독특한 인생은 거기서도 두드러졌던 모양이다. 무인가게를 운영하거나 독특한 차림이거나 술을 많이 먹거나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국의 무속인을 모아 무속인축제를 기획했던 것이다. 요즘이야 별의별 축제가 다 만들어지는 세상이지만, 기획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한 시절에 무속인을 모아 축제를 여는 독특한 아이디어를 구상했던 것이다. 물론 그 인연으로 선생님의 친구분 중에는 내로라하는 무속인들도 있다. 그리고 강원도 식구들 중 한 동생분의 주례를 서기도 하셨다, 30대의 나이에. 이런 사실은 그냥 젊은 시절의 에피소드로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선생님의 사람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강원도 분들과 만나 술자리를 하면 그때의 홍성모 선생님 이야기를 하며 울다 웃다 한다. 무속인, 정치인, 깡패, 약물 중독자, 전과자, 한량백수, 재즈가수, 그냥 가수, 의사, 변호사, 일수인, 스님, 목사님, 식당 할머니, 할아버지, 동네 아줌마, 20대 대학생 등 선생님의 친분과 인간관계는 끊임이 없다. 그것은 선생님께서 얼마나 사람을 사랑한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다. 위아래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마음이 통하면 누구나 지기일 수 있는 선생님의 사교관은 아직도 본받고 싶은 높은 덕이다.

나는 선생님과 20년 가까운 세월을 동고동락하면서 개인의 감정으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흉보는 일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설혹 내가 투덜거리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저 그렇게 소주만 마시며 웃고 계셨다. 선생님의 지위를 이해하고 싶었으나 작은 내게는 아직 잘 되지 않는 부분이며, 동시에 내가 선생님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말로 시작해서 끝나는 연극판에 선생님처럼 말없이 말하시는 분을 나는 뵌 적이 없다. 진정이 있는 분만이 가능하리라. 결국 선생님의 객기와 같은 기이한 행동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선생님의 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제자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분이셨다. 어디에나 단체가 있고, 단체장이 있는 우리에게는 ‘홍 패밀리’ 가 있다. 선생님은 늘상 ‘빼밀리’라 하셨는데, 당신께서는 그 말을 매우 좋아하셨다. 더 좋은 건 나도 끼워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꼬봉이다.(ㅎㅎ)

선생님은 제자를 먼저 내친 적이 없으신 분이다. 물론 그런 것이 어느 상황이든 긍정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니겠지만, 선생님께는 그것이 삶이었다. 새끼라고 부르는 당신의 제자들을 내칠 수 있는 분이 아니셨다. 그렇기에 상처가 많으신 분이기도 했다. 인간이란 영악해서 상호 동질적 관계를 형성하기는 힘든 것인지, 자기 배가 부르면 스승을 버리는 일들이 많았다. 나 역시 선생님과 함께했던 날들이 모두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선생님의 행동과 말씀에 투정부리고 화내고 벗어나려 했었다. 선생님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용당한다고 생각했고, 화가 났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당신을 버린 제자라도 다시 돌아와 도움을 요청하면 이유가 없으셨다. 남아서 뒷처리를 도맡아야 했던 나는 속상하고 슬펐다. 선생님께 대들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 역시도 선생님껜 면죄부였다. 그저 이뻐보이셨는지 그냥 고개만 끄덕일 뿐 술만 잡수시지 바뀌는 건 없었다.

2007년 2월 8일 홍 패밀리는 사이판으로 여행을 갔다. 홍성모 선생님은 이렇게 식구들과 함께하는 여행을 좋아하신다. 영화를 찍던 김윤석 선배도 시간을 내고, 서울서 뮤지컬 감독을 하고 있는 김미경 선배도 시간을 내고, 부산 시립에 있는 이현주 선배도 바쁜 틈 속에 시간을 내어 단출하지만 알찬 사이판 여행을 다녀왔다. 밝은 햇빛, 투명한 바닷물, 따뜻한 날씨 속에서 우리는 계속 웃고 마시고 놀았다. 선생님은 바다를 바라보며 새끼들을 그저 바라보시는 것만으로 흐뭇해하시고 좋아하셨다. 그것이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아직도 그 바닷가 새벽별을 보러가 모두들 입을 헤 열고 쏟아질듯 박혀있는 무수한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때가 생각난다.

새끼들이 당신의 어깨를 밟고 일어서는 것이 소망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선생님이셨다. 그렇기에 제자들을 위해서라면 무엇도 아끼지 않으셨다. 선생님의 그런 사랑 덕인지 선배들 모두 자기 분야에서 훌륭히 자신의 몫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얼마 전 끝난 부산연극제에서 홍성모 선생님은 희곡상을 수상하셨다. 대리 수상을 했던 나는 너무도 뜻밖의 수상에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이 가시고, 우리 극단의 대표를 내가 맡으면서 사람들은 걱정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말들로 우리 극단 식구들을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극단의 존폐를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와는 무관하게. 선생님이 안 계신 극단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었기에 불안하고 무서웠지만, 우리는 홍성모 선생님의 제자다. 우린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킬 것이고, 그럴 정도의 신의를 우리는 선생님께 배워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희곡상의 수상은 선생님을 추억할 아름다운 순간이기도 했지만, 우리 극단 식구들의 단합과 앞으로 나아갈 기점에서의 좋은 선물이기도 하다. 너무나 좋았다.  

<2008. 4. 27. 02시 10분 부산의료원 610호에서>라고 적힌 선생님의 마지막 대본. 이날 선생님은 내게 대본을 쓰자마자 전화하셨다. 빨리 와서 대본 읽어보라고. 나는 잠결에 받아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고는 다시 잠을 잤다. 그 대본이다. 그 대본이 사실상 선생님이 안 계시면 연극을 접으려 했던 나를 다시 연극 무대에 서게 했고, 극단을 이끌게 했고, 선생님께 희곡상을 수상하게 했다.

홍성모 선생님은 미술을 전공하고, 노래를 했던 가수이며, 연극 연출가이며, 탁월한 공연 기획가이며, 극단 바문사의 대표이며, 지독한 술꾼이며, 발가락도 하나 잘라버린 당뇨 환자이며, 30대에 주례선생이었으며, 30대 부산연극협회장이었으며, 친구이며, 어버이였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선생님의 초상은 이것 외에도 그분의 말씀으로 살아 숨 쉰다.

이제야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음을 안다. 선생님의 연극적 삶은, 선생님의 사랑은, 그 삶과 사랑을 받은 이로부터, 아는 이로부터, 추억하는 이로부터 다시 시작될 것이다.

글. 최은영/연극배우

작성자
예술부산 2009년 5/6월호
작성일자
2012-04-24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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