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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1518호 기획연재

“광안대교 놓자했다 맞아죽을 뻔했다”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 제2화·원시인이 낳은 최첨단 다리, 광안대교ⓛ

내용
광안대교는 부산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처음 광안대교를 놓는다고 했을 때 언론을 비롯한 일부 전문가들의 반대여론은 만만치 않았다(사진은 광안대교 야경).

처음 광안대교를 놓겠다고 했을 때, 언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일부 대학교수들은 언론에 그럴듯한 반대 논리를 제공하며 극렬하게 반대했다. 이해관계가 얽힌 주민들은 시청으로 찾아와 집기를 던지고 때려 부쉈다.

조창국(曺昌國·70) 당시 광안대로 건설사업소장은 시청으로 몰려온 주민들에게 수없이 멱살을 잡혔다. 밤이면 집으로 몰려와 대문을 걷어차고, 마당에 오물을 던졌다. 수영구 남천동 삼익아파트 주민들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 바다 위에 다리를 놓으면 매연과 소음 감당을 어떻게 하느냐, 집값이 떨어질 게 뻔한데 누가 책임질 것이냐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삼익아파트에는 당시 검사, 의사, 고위 공무원, 사장 같은 사회지도층 인사와 잘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니 목소리도 컸다. 전면에 나선 것은 아주머니들이었다.

“오죽했으면 그러더라고요. 당시 김진만 부산시 부시장의 사택이 삼익아파트에 있었는데, 제발 광안대교 안 놓으면 안 되겠느냐고요. 주민들이 집에 몰려 와 고함을 질러대는 바람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고.”

광안대교 건설 당시 조창국 건설사업소장(오른쪽)이 최형우 내무부장관과 문정수 부산시장에게 공사진행 과정을 설명하는 모습.

조 소장의 이야기다. 그는 설계와 초창기 공사를 진두지휘하며 광안대교를 국내 최대·최고의 다리로 만들어낸 주역으로 손꼽힌다. 지금이야 광안대교는 부산의 랜드마크로 손색이 없지만, 당시로서는 무모할 정도로 원시인이 최첨단 교량에 도전한 셈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만큼 헤쳐내야 할 난관은 수두룩했다.

광안대교, 남항대교, 북항대교는 모두 그가 설계했다. 1969년 4급을 토목기사보(오늘날의 7급)로 건설부 근무를 시작한 그는 1970년부터 1996년까지 26년을 부산시에서 근무했다. 그 26년 중 본청근무는 5년, 나머지 21년을 모두 현장에서 보냈다. 제1, 제2도시고속도로건설사업소, 지하철건설본부, 광안대로건설사업소, 종합건설본부, 건설안전관리본부가 그의 공직 삶터였다. 그 기간, 그는 제2도시고속도로사업소장, 광안대로건설사업소장, 건설안전관리본부장을 맡았다. 오늘날 부산의 굵직굵직한 교통 뼈대 상당부분이 조창국 씨의 현장지휘 아래 틀을 갖춰온 셈이다.

“일단은 지역 사회의 반대여론을 잠재우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당시 언론은 연일 반대 기사를 썼습니다. 학계는 부정적 여론을 그럴듯한 논리로 뒷받침했고요. 그러니, 내용을 모르는 시민들은 뉴스를 통해 반대여론에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론회에 나가 그렇지 않다는 논리를 수없이 폈습니다.” 언론이나 학계의 반대논리는 이랬다.

왜 땅을 두고 바다로 가려느냐. 바다 위에 다리를 놓으면 예산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 재원조달 방법이 있느냐. 무엇 때문에 현수교를 놓으려 하느냐. 툭 트인 바다조망을 망치지 않느냐. 그냥 돈이 적게 드는 콘크리트 다리를 놓으면 되지 않느냐. 강교(쇠다리)로 하면 1년도 안돼 녹이 슬 텐데 수명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 한번도 안 해 본 것인데 기술은 있느냐.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설계를 하기 전부터 세계적인 해상다리를 빠짐없이 시찰하고, 공법들을 차근차근 공부한 상태였습니다. 선진국의 대부분 다리는 강교입니다. 바다 위에 콘크리트 다리를 놓으면 30년을 버티기 어렵습니다. 태평양과 만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은 금문교는 1937년 완공된 세계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강교입니다. 금문교가 준공된지 75년이 지났지만 끄떡없습니다. 앞으로 100년도 더 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저는 광안대교를 ‘100년 설계 수명에, 200년 기대 수명’을 자신했습니다. 제때 도장(페인트칠)을 하고, 볼트와 너트를 조여 주는 등의 관리만 잘 이행해 준다면 말입니다.”

광안대교 건설은 해운대신시가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25년 전인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두환 대통령의 뒤를 이어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은 주택 200만호 건립정책을 선언했다. 용적률은 높이고, 동간 거리는 줄여 건축기준과 절차를 대폭 간소화했다. 고질적인 주택난을 풀고, 데모로 시끄러운 국민여론을 잠재우겠다는 뜻도 깔려 있었다.

부산은 해운대신시가지 건설로 가닥이 잡혔다. 해운대 뒤편 장산에 있던 051탄약창 군부대를 이전시키고, 그 자리에 3.3㎢ 규모의 신시가지를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 문제는 교통대책이었다. 늘어나는 교통량을 수영로 만으로는 감당할 길이 없었다. 당시 수영로는 아침, 저녁 출퇴근 때 주차장을 방불케 할 만큼 정체가 극심했다. 진입도로를 별도로 확보하지 않고는 신시가지 건설을 추진할 수 없었다.

“수영로 확장, 고가도로, 해변도로 개설 방안 등을 검토했으나 답이 없었습니다. 대연동, 남천동, 광안동, 수영동, 남천만 매립지 7㎞ 구간을 관통하는 해안도로를 건설하면 엄청난 보상비에다 소음, 매연, 진동 같은 공해를 피해갈 길이 없었습니다. 인접 주택지나 삼익아파트  주민들의 민원, 거기다가 슬럼화에 따른 지역발전 저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광안대교를 놓으면서도 수없이 멱살잡이를 당했는데, 만약 그때 해변도로 개설방안을 추진했더라면, 저는 남천·광안동 주민들에게 맞아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작성자
박재관
작성일자
2012-03-28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1518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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