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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1488호 기획연재

부산 1977년 … 마침내 ‘지하철 건설’ 결단

부산시정 현대사 숨은 얘기를 찾다- 제1화 · 부산지하철 뚝심으로 뚫다 ③

내용

“듣고보니, 부산에도 지하철을 놓긴 놓아야겠구먼.”

박영수 시장의 이 한마디에 몇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부산에는 지하철을 놓을 수 없다며 반대하던 기술직 국장들이나, 자리를 함께 한 구청장들은 더 이상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 회의장은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침묵이 찾아들었다. 박 시장이 침묵을 깼다.

“임 과장, 그럼 무엇부터 하면 되겠소? 요구사항이 뭐요?”

“예 시장님, 우선 두 가지를 해결해 주십시오. 하나는 지하철건설을 전담할 기구를 만들어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하철 기본계획을 수립할 용역비 2억원을 책정해 주십시오.”

박영수 부산시장은 현안에 대한 결단이나 결정이 대단히 신중했다. 하지만 가야할 방향을 정하고, 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린 다음에는 추진력이 남달랐다. 지하철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보고도 안 받고 매몰차게 내몰았으나 결심을 굳힌 뒤로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업무를 지시하고 추진했다.

마침내 부산에 지하철을 놓겠다는 박영수 시장의 결단이 내려졌다. 부산지하철 건설을 기안하고, 뜻을 관철시킨 임원재 씨는 박 시장에 대한 첫 보고에서 2천650억원을 들여 구서동∼구덕운동장간 22.5㎞ 구간에 지하철을 놓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부산시는 지하철 건설에 앞서 시민들에게 이같은 기본구상 설명회를 열었다. 1979년 가을 서면극장 앞 대로변에서 당시 부산지하철 기획단장이었던 임 씨가 기본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박 시장은 ‘지하철 건설’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회의장에서 바로 업무지시를 내렸다.

“기획관리실장, 전담기구 설치는 내무부에 상신하고, 기본설계 용역비 2억원은 내년도 예산에 반영하도록 하시오.”

4시간이 넘는 보고와 토론, 끈질긴 설득 끝에 부산에 지하철을 건설한다는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1977년 여름쯤의 일이다. 부산지하철 건설을 기획하고, 보고하며, 시장의 최종판단을 끌어낸 임원재 씨(당시 부산시 도시계획과장)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실 용역비는 5억원 정도 들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용역비를 많이 요구하면 부산시 재정여건상 안 줄까 싶어 줄이고 줄여 2억원을 요구했습니다. 2억이면 대충적인 기본계획과 1호선 건설기본계획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하철 기획단은 정원 25명을 요구했구요.”

부산지하철 건설 결정이 내려진 날 임원재 씨는 도시계획과 직원들과 모처럼 만에 회식자리를 가졌다. 그의 머리 속에는 지금도 특별히 생각나는 두 사람이 있다. 계획1계장을 맡았던 윤종문 씨(훗날 부산시 건설본부장)와 계획1계 직원이었던 송기원 씨다. 부산지하철 건설 구상에 생각을 함께 했고, 외국의 지하철 건설사례 같은 자료수집에도 열심이었다. 특히나 송기원 씨는 10여년 뒤 영도구청 건설국장으로 발령받은 뒤 6개월여 만에 순직, 안타까움이 더하다. 그는 원래 간염이 있어서 술을 마시면 안 되는데, 환영파티서 부구청장이 저간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술을 먹여 돌이킬 수 없는 건강악화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을 기획하고 추진한 사람은 양택식 서울시장이었다. 철도청장을 하다 서울시장으로 부임한 양 시장은 부임과 동시에 ‘대서울 건설’이라는 시정목표를 내걸었다. 재임 4년간의 업적 중 첫 손가락 꼽는 것도 바로 지하철 건설이다. 서울은 말하자면 서울시장이 주도해서 지하철을 건설했다. 그러니 일사천리였다. 철도청장 출신이라 철도청에서 가장 우수한 직원 26명을 차출해 서울지하철본부를 구성했다. 서울도 그렇게 했는데, 부산으로선 당연히 지하철 건설을 전담할 기구가 필요했다.

해가 바뀌자 박영수 시장은 임 과장을 기획관리실장 직속의 설계기술단장으로 승진 전보했다. 직원은 25명이었다. 1978년 4월의 일이다.

내무부에 요청한 기구승인 결재가 나기까지는 1년이 넘게 걸렸다. 1979년 초반인데, 문제는 인원이었다. 25명을 요구했지만 13명으로 반토막 기구승인이 난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해 1월에 부산시가 예산반영한 지하철 건설설계 용역비 역시 2억 요구에 1억으로 딱 절반뿐이었다.

그럭저럭 하는 사이 박영수 시장은 서울시장으로 발령이 나 부산을 떠났다. 후임은 최석원 시장. 임원재 씨로선 기댈 언덕도, 자신의 요구를 귀담아 들어줄 ‘우군’도 잃어버린 모양새였다. 1979년 초 내무부의 기구승인에 따라 부산지하철 기획단이 발족했다. 어느날 최 시장께서 임원재 설계기술단장을 불렀다.

“임 단장, 지하철 기획단장 발령을 내야겠는데, 본청 과장들을 다 불러 의사타진을 했지만 전부 거절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임 단장이 좀 맡아주시오.” 인원 12명에 여직원 1명, 직급은 같더라도 이만저만한 좌천이 아닐 터였다. 업무가 낯선데다, 기술에 대한 이해조차 없는 지하철 기획단장을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을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최 시장께선 이 사안을 가지고 저를 3번이나 불렀습니다. 결국 마지막엔 엄포까지 놓더라고요. 내무부 기구승인 난 것을 없애던지, 당신이 맡던지 양자택일 하시오. 그러는데 어쩝니까. 결심을 굳히고, 한 계급 강등 당하다시피 자리를 맡을 수밖에요.”

작성자
박재관
작성일자
2011-08-17
자료출처
다이내믹부산
제호

다이내믹부산 제1488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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