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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우중한담(雨中閑談)- 세상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골목길에서 어슬렁 거리기 ⑭

내용

입춘(立春) 지나 첫 비 오신다.

그간 많이도 가물었다. 오죽했으면 부산시에서 가뭄대비 종합대책을 마련하고 T/F 팀을 가동해 가뭄에 적극 대응하고 있겠는가. 오늘로 만 56일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비 오지 않는 날 수로 따지면 역대 두 번째다. 하여, 산불도 잦았고 건조경보도 심심찮게 내려졌다. 그러니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단비인가. 물 튀고 질척이는 골목길일망정 나가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비 한 방울에 마음이 너무 앞서 내달린 것일까. 입춘(立春)도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고 우수(雨水)도 일주일 넘게 남은 걸 깜빡했다. 매화가 피기엔 아직 한참이나 멀었잖은가. 매화가지 끝에 꽃눈들이 열심히 살을 찌우고 있다.

입춘(立春)은 글자 그대로 아이가 걸음마를 하기 위해 땅을 짚고 서듯이 봄기운이 이제 바로 선 것이다. 우수, 경칩 지나면서 두 다리에 힘인 생긴 봄기운은 아장아장 내를 건너고, 언덕을 넘어서 산천(山川)에 꽃을 피우고 언 땅에 푸른 싹을 피우며 마을로 내려 올 것이다. 오는 길에 꽃샘바람에 넘어지기도 하겠지만, 우리는 안다. 겨울바람 제 아무리 매서울지라도 봄비 한 방울, 봄바람 한 줄기에 언 강 녹아 흐르고, 동토(凍土)엔 풀꽃들 피어나리라는 것을. 작은 꽃눈 맺힌 홍매화나무 아래서 조용히 불러본다. 불어라! 봄바람.

비 오는 날은 골목길 어슬렁거리기도 공치는 날이다. 집 나온 개도 비를 피해 처마 밑으로 기어들지 않는가. 게다가 어깨에 걸친 100만원도 넘는 카메라가 맘에 걸린다. 빗물이라도 튀면 어쩌나는 걱정에 마음 놓고 갈 만한 데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지하철을 탔지만 발길을 어디로 놓아야 할지 막막하다. 블로그 글이 때 맞춰 올라오지 않는다고 쌍심지 켜고 기다리실 분들을 생각하니 눈앞도 캄캄하다.

에라, 모르겠다. 절집 밑에서 막걸리나 먹자는 심정으로 천년고찰 범어사 가는 버스에 오른다. 산중 절집 정도라면 우중한담(雨中閑談)에 근사한 그림이라도 즐길만하지 않을까 하는 꼼수다.^^

예상은 적중했다. 앞자리에 앉은 할아버지 말씀에 귀가 솔깃해진다.

“정말 기가 막힌 사진이 있어. 경북대학교 교수가 찍어준 사진인데 누가 팔아라 해도 안 판 거야. 그 친구한테 집에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범어사)올라가서 보여줄게. 손바닥에 먹을 것을 올려놓고 있으면 새가 손바닥에 내려와서 그걸 먹어. 입에 물고 있어도 날아와서 그걸 받아먹지. 아, 그런 사진은 한 50장 찍으면 한 장 나올까말까 한 사진이라 그래.”

어쩌면 나도 오늘 대박 사진 한 장 찍겠구나 하는 욕심이 사알 생긴다.^^ 범어사까지 올라가는 짧지 않은 시간 내내 할아버지의 새 사진 자랑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할아버지 연세는 올해 여든 하나. 매일같이 범어사에 오르신단다. 그런데 한편으론 목소리에 불편한 심기가 역력하시다.

“아, 글쎄 어제 어떤 놈이 그 친구한테 폭언을 하고 그랬다잖아. 그 친구가 범어사 안에서 주차관리 봉사도 하고 있는데 노란선 안에 차를 대지 않고 마음대로 대는 걸 제지했더니 욕을 하고 그랬데. 내가 지금 올라가서 사실을 알아보고 이 놈을 찾아서 고발을 하든지...”

그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할아버지는 사진을 꺼내보라신다. 유리가 깨어진 액자 사진에 엿장수 할아버지와 새는 서로 빙긋이 마주보고 있다. 새가 엿장수 할아버지 손 위에 올라가 조잘대는 사진도 있다.

할아버지는 바로 이 자리에 20년을 계셨다. 범어사 일주문 오르는 이 길을 숱하게 다녔는데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이 길을 오갈 때마다 엿판만 보였지 사람이 보이지 않았던 거다.

“사람들이 다니니까 차를 주차선 안에다 넣어라 했더니, 당신이 뭔데 그러냐면서 마구 고함을 지르면서 대들고,,, 내 넷째 아들놈 같더구만. 새 사진을 찍는 건 좋은데 이쪽으로 와서 사람들 다니는데 방해가 안 되게 하면 좋잖아.”

엿장수 할아버지 역시 아직 화가 안 풀리신 모양이다.

“앞으로 그런 일 생기면 혼자서 그러지 말고 나한테 말해. 우째 그런 놈이 다있노.” 두 분의 우애가 깊어 보인다.

“새벽 다섯 시에 와서 이 길을 쓸고 청소하고 그래. 이 자리에서 20년 동안 엿을 팔았어. 요즘엔 여기 주차 관리도 같이 하고.

우리집은 연산동이요. 40년 동안 범어사를 위해 봉사했다고 여기 술파는 좌판, 상인들 쫓아낼 때 주지스님이 나만 여기 남게 해주데. 내가 배운 게 없고 재주가 없으니 제일 먼저 여기 와서 청소라도 해야 애들 공부도 시키고 할꺼 아냐.”

할아버지는 올해 예순 아홉이시다. 진짜 나이는 일흔 하나. “옛날엔 일찍 죽는다고 늦게 (출생)신고하잖아.^^”

“10년 동안 여기 주위에 먹을 걸 뿌렸어. 그랬더니 이젠 여기 와서 (내가 주는 걸) 받아먹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할아버지 손 위에 앉은 새는 ‘곤줄박이’다. 곤줄박이에 대해 조사를 해보니,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잘 따르는 습성이 있다. 먹잇감이 귀해지는 겨울엔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손바닥 위에까지 내려앉아 먹이를 받아먹기도 한단다. 다른 새들도 할아버지 손바닥에 내려앉는지는 모르겠다.

합장해 주시는 엿장수 할아버지를 뒤로 하고 조계문(일주문)으로 들어선다. 경내로 들어서는 첫 번째 관문. 문득, 조계(曹溪)의 뜻을 알아야 이 문(門)을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인다.

欲識曹溪旨
雲飛前面山

조계(曹溪)의 뜻을 알기를 원한다면
앞산에 구름 나는 걸 보라

........ 멀뚱멀뚱 .......

주차장서 대웅전으로 가는 길은 새로 단장을 했다. 온통 계단이다. 노(老)보살들이 오르내리시기에 힘들어하시지 않을까 싶다. 늘 다니던 왼쪽 길을 택한다. 처마에 매달린 빗물이 열심히 땅을 뚫고 있다.

대웅전 가는 길은 깨끗하고 고즈넉하다.

스님들은 참선 수행중이다. 동안거(冬安居)다. 정월 보름까지는 바깥출입을 삼가고 수행정진에 몰두하는 때다.

비를 맞으며 묵언수행(默言修行) 중인 법당 앞 돌탑 또한 씩씩하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 연화문(蓮花文) 뚜렷하고

대웅전 늙은 기둥만 설법을 하고 있다.

고맙고 반가운 비는 조용히 천하(天下)의 갈증을 적시는데

앞산에 흰 구름은 거저 말없이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작성자
원성만
작성일자
2011-02-10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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