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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그거, 30년 전에도 600년이었어!

골목길에서 어슬렁거리기⑦

내용

槐. 회화나무 괴. 영문명은 Chinese scholar tree다. 중국에선 學者樹라고 하나보다.

아닌 게 아니라 예로부터 이 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집안에 학자가 나오고 부자가 된다고 해서 양반 집안에만 심었단 말도 있다. 그러니 잡신을 쫓고 마을을 지키는 수호목으로 더없이 좋겠다. 대티고개를 넘어서 만나는 마을, 괴정(槐亭)은 이 회화나무 이름에서 딴 것이다. 이 마을의 정자나무가 회화나무인 것이다.


“내가 여기서 산 지 30년이 넘었는데, 그거 30년 전에도 600년이었어.”

순간 서로 웃음이 터진다. 보호수 안내 표지판에는 수령이 600년으로 되어있다. 93년에 보호수로 지정했다고 되어 있으니 할아버지 말씀이 맞겠다.

“나밖에 없어. 부산 와서 시작한 게 이 일이야.”

할아버지는 합천서 오셨다. 괴정을 통틀어 단 한 분밖에 없는 ‘연탄배달부’시다. 연탄 배달 리어카가 예사롭지 않다.

“이게 이래도 20년도 더 됐지. 내가 기계 만드는 사람 데려와서 이 골목길들 보여주면서 이렇게 이렇게 만들어 달라고 해서 만든 거야. 기술자가 직접 골목길을 자로 재고해서 만들어온 건데. 이게 오토바이 엔진이고, 그때 돈으로 70만원 줬을걸.”

한 번에 연탄 100장이 들어간단다. 연탄은 배달료까지 합쳐 한 장에 700원. 한 달 내내 해도 기름값도 안나온다 하신다. 옆에서 같이 연탄을 실어드리니, “사진 찍으려고 그러지?” 하신다. 연탄구멍들이 웃는다.


어르신들은 말씀마다 굳이 “괴정 본동”임을 강조하신다. 괴정의 중심 뿌리에서 산다는 강한 자부심이겠다. 날씨가 굉장히 추운데 손 시리지 않으시냐 여쭈니, “손 넣어 보소”라 하신다. 물에 손을 담그니, 따뜻하다. 언 손이 녹는 듯하다. 아까 1시경에 햇볕이 들어올 때는 사람들이 많았단다. “그때 찍으러 오지” 그러신다.

도시에 아직 빨래터가 있다는 게 신기하다. 그것도 올해 들어 최고로 춥다는 날에 빨래하는 모습이라니.

“(물이)땅속에서 나와서 땅속으로 들어간다 아닌교. 땅속에서 나오니까 여름엔 찹고 겨울엔 뜨시고. 세탁기보다 더 좋지. 난 세탁기 팔았뿌서. 물이 좋아서 세탁기보다 때가 엄청 잘 빠지. 전기세 안 들고 물 뜨시고. 어디서 이런 게 있겠노.”

할머니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노란 세숫대야가 푸근하고 정겹다. 20년도 더 됐단다. 세숫대야 하나를 20년 동안이나 쓰고 계신 할머니는 다른 데 이사 갔다가 빨래터 때문에 “괴정 본동”으로 다시 이사 오셨다 하신다.

“옛날에 나는 여서 밤에 빨래하고 집에 가보면 아침에 양말 한쪽이 없는기라. 그래서 거 참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누가 그러데. 니 밤에 빨래하고 나면 양말 한 쪽이 없제? 나중에 보니까, 옛날에는 여 불도 없고, 저쪽에도 저렇게 안 막아났거등. 어두분(어두운)데서 발로 빨래를 밟고 나면 양말이 한 쪽이 물에 떠내리가뿐는기라. 하하하하...”

“하이고, 말도 마라. 나도 여서 우리 아(아이) 새 옷 마이 이자무가꼬 잔소리 마이 들었다 아인교. 하하하하하..”

“옛날엔 여길 내가 매일 청소했어요. 여름엔 마을사람들 피서지지. 여름엔 밤새도록 시끄러워서 잠을 못자요. 겨울에도 (빨래오는)사람들 많고.”

빨래터 옆에서 농산물 가게 하시는 어르신이 한 말씀 거드신다. 가게 이름이 어르신 고향이란다. 금산인삼사. 가게 안에서 한약 냄새가 향긋하게 흘러나온다.

김홍도 '빨래터'

빨래터는 단순히 빨래하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마을 사랑방이다. 집집마다 수도가 들어가고 세탁기가 들어가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끊어지고 있다. 부산시가 벌이고 있는 ‘산복도로 르네상스’나 ‘행복마을 프로젝트’는 도심 낙후지역의 주거, 교육, 문화, 복지환경을 종합적으로 개선해 살기 좋은 마을로 발전시키는 것과 동시에 ‘공동체 복원’을 강조하고 있다. 빨래터는 마을공동체 생활의 아이콘이다. 빨래터처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열린’ 공간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젊은 아줌마들을 빨래터로 나오게 하자.
 

빨래터 옆엔 목요일마다 멍게, 해삼, 조개, 고동 같은 해산물 파는 트럭이 선다. 고동이 먹음직하게 싱싱하다.

“목요일은 여기, 금요일은 장림, 토요일은 구서동 이마트 앞, 포항도 가고. 일주일에 한 번씩 도는 거지. 멍게 좋아한다고 매일 먹을 순 없잖아요. 그러니까 일주일쯤 되면 한 번 먹고 싶어지지. 사진작가요? 왜 인생이 뭔지 알아볼라고? 허허, 이게 인생이지.”

물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인상이 좋아서일까, 사가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


길을 잃었다. 마을 전체를 보기 위해 산 쪽으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사이 해는 져버렸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방향을 못 잡는다. 손은 얼대로 얼었고 다리 사이 찬바람 인다. 날은 춥지요 해는 졌지요... 그때다. 골목 안에서 귀에 익은 옛 노랫소리가 따뜻하다. 헌책방에서 나오는 노랫소리다. 주택가 안에 헌책방이 있다는 게 좀 유별나다 싶다.

“헌책방만 40년쯤 됩니다. 청계천에서 30년 정도 했고, 부산 온 지는 4년 됐어요. 아직 아는 사람이 없어서 외롭지요. 아내는 오래 전에 죽고, 아들 둘 있는데 큰 애는 군대 마치고 서울에 큰 제과점에 취직해서 갔고... 보수동으로 갈까 청계천으로 다시 갈까 고민 중입니다.”

저녁 준비를 하는 중이었나 보다. 커피 한 잔 하라며 내오는 커피 잔에 정이 넘친다. 안방이며 부엌이며 단독주택 전체가 온통 책들로 차있다. 군데군데 키를 넘는 책탑들이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자로 재며 쌓은 듯하다. 책들은 분야별로 꽂히고, 쌓여 있다. 전체 몇 권인지 알 수 없단다. 책을 빌려도 주는데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마을 도서관으로 운영해도 좋으련만.

“내가 글자를 몰랐는데 책을 팔면 글자를 알 수 있을 거 같아서 책장사를 시작했지요. 먼저 사람이 돼야 하잖아요. 돈은 언제든 벌면 되지만 사람 되기는 참 힘들잖아요. 책은 사람을 만드는 거거든. 그런데 책이 많으면 책을 잘 읽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안 읽어지더라고.”

서로 마주보며 웃다 오래 전에 잃어버린 시집 한 권을 산다.

작성자
원성만
작성일자
2010-12-10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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