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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이름없는 들꽃들의 지조와 절개

동래온천과 기생문화⑧

내용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우리 권번(券番)에도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우리말을 없애고 일본말을 국어로 강제 주입시키며,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실시하여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고자 광란했다.

고유전통 지켜낸 동래권번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조선의 일본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권번 기생이 부르는 노래와 춤도 일본식으로 바꾸려 했다. 우리말과 노래, 옷과 예법, 고유의 생활방식을 가장 잘 지키며 보존하고 있는 기생들은 눈에가시였다.

총독부에서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빌미로 기생을 없애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여자청년단을 조직해 가입시키고 일본식 전시훈련을 강요했다. 생활관습까지 일본식으로 바꿔 민족의 뿌리마저 잘라 없애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동래권번 간부들은 이 핑계 저 핑계로 일제의 압력을 교묘하게 피했다. 일제는 지시를 거부하면 권번기생 모두를 정신대(艇身隊)에 끌고 가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버티다가 감격의 광복을 맞이 했다. 이처럼 반세기에 이르는 일제의 강압 속에서도 우리의 전통과 민속예술과 가락 춤사위 예법 등을 고스란히 원형 그대로 오늘에까지 간직할 수 있도록 해준 권번기생의 공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동래별장 부통령 관저로 사용

광복 이후에도 동래온천장은 얼마 동안 예전의 명성을 그대로 누렸다. 일본인들이 남긴 여관과 요정을 인수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온천장을 새로운 모습으로 가꿀 꿈에 부풀어 있었다. 부산에 진주한 미군(美軍) 선발대가 본거지를 온천장의 철도여관(제일은행 온천동지점)에 자리를 잡았다. 미국관리들은 우리의 요정에서 마련한 주연(酒宴)에 권번기생들을 초대해 한국의 독특한 노래와 춤을 처음으로 구경하고 환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이때부터 그 이후의 급격하고도 도도한 변화의 물결은 예고되었다. 미국관리의 접대를 위해 기생들에게 가르친 사교춤이 우리의 기방(妓房)에서 공공연히 추어지기 시작했다.

동래온천장은 광복 이후의 혼란기와 6·25 전쟁으로 부산이 임시수도로서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서도 그렁저렁 명맥을 유지했다. 특히 임시수도 당시에는 부통령의 관저(官邸)가 지금의 ‘동래별장’에 있었다.

그리고 휴양지로서의 옛 명성 때문에 정치계의 막후협상이나 비밀요담 등이 동래의 요정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60년대 초반까지는 비록 옛날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동래온천은 여전히 전국에서 손꼽히는 휴양지였다.

1961년 5·16군사 쿠데타 이후 과도정부는 이듬해 부산시를 직할시로 승격시켰다. 당시 온천장의 백록관(白鹿館 : 동래관광호텔)은 박정희 대통령이 부산의 군수기지 사령부 김용순 장군과 거사를 모의한 장소로 유명했다. 과도정부는 한때 권번제도가 과거 인신매매의 잔재라는 이유로 해산시키려 들었다.

그러자 민족예술을 계승해 온 기생을 매춘집단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여론의 반발에 부딪혀 당국은 한발 물러섰다. 다만 그때까지 존속해 왔던 ‘화초머리 올리는 풍습’은 공공연한 인신매매였기에 절대 엄금하고 매춘행위도 일체 불허한다고 공포했다.

동래권번 국악원으로 개명

그리고 40년 이상 공식·비공식적으로 사용해온 ‘권번’이란 명칭도 일제의 잔재라 하여 바꿀 것을 종용했다. 동래권번도 ‘동래국악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새로운 동래국악원 시대를 열게 된 동래 기생들은, 70∼80년대의 숨가쁜 변화와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동래온천장은 제3공화국 수립 이후 한·일국교 정상화와 함께 일본인 상인들이 속속 한국을 방문하면서 한때 과거의 융성기를 되찾는 듯했다.

70년대에 들어서는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 사이에 정기적인 여객선 페리호가 다니게 되고, 바야흐로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의 관광객들이 한국으로 몰려오면서 동래온천장도 반짝 경기를 함께 누리기도 했다. 이 무렵만 해도 국악원에는 100여 명의 기생이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교방(敎坊)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낮에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국악원 사무실의 연습장에 나와 악사들에게 가무와 음률을 익혀야만 했다.

저녁 무렵이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북이나 가야금 등의 개인 악기를 들고 다시 사무실로 나와 요청에 따라 차례로 연회석에 나가곤 했다.

낭만과 풍류 사라지고 쇠퇴길로

그러나 세간의 풍속은 이미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기생사회의 풍속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우리 고유의 정감과 낭만이 넘치는 풍류의 멋은 차츰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지난날의 유장한 가락으로 빚어내던 은은한 화려함에서도 멀어지고 있었다.

이제 기생도 우리 고유의 풍류와 멋을 이어가고 있다는 명분 속에 상업적 잇속을 챙기는 관광상품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치열한 경쟁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생들의 자구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돈만 쥐어주면 언제 어디서든지 쉽게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성(性)의 상품화시대에, 기생의 존재는 마치 박물관에 진열된 진귀한 골동품처럼 취급되었다. 기생을 지망하는 동기(童妓)들의 발걸음도 끊어졌다. 기왕에 있던 기생들도 하나 둘 국악원을 떠났다. 그녀들은 아예 보다 손쉽고 벌이가 좋은 고급 요정의 접대부로 진출했다. 실로 수 천년 역사를 이어온 우리의 기생문화는 이렇게 해서 마침내 자취도 찾아보기 어렵게 아쉬운 사양의 벼랑으로 치닫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나라 기생문화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동래국악원’은 그래도 우리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자부심으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래국악원 전통 문화 전당 변모

다만 이제는 기생수업(妓生修業)을 하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 국악을 대중들에게 보급하는 장소로서, 우리 전통문화의 전당으로 발전시켜 나가려 애쓰고 있다. 시대의 거센 변화와 바람 앞에 결국은 다시 설자리를 찾지 못하고 영영 모습을 감추어야한 많은 동래기생들.

지금쯤 백발의 할머니로 생존해 있을 지도 모를 그들은, 그래도 화려했던 한 시절의 애환을 떠올릴 것일까 자못 궁금하다.

부산이야기 2001년 11·12월호 기사 입력 2013-11-12 다이내믹부산 제호
자료출처 : 다이내믹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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