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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나랏님, 제발 우리 땅 돌려주세요

구포·대저 지명 이야기… 목숨 걸고 땅 이름 되찾아오기도
이야기 한마당 - 행정제도에 얽힌 구포와 양산

내용

지금의 부산시 북구와 강서구 대저동은 통일신라시대 행정구역이 설정될 그때부터 1869년(고종 6)까지 삽량주(신라시대), 양주(良州·신라시대), 양주군(梁州郡·고려시대), 양산군(梁山郡·조선시대)으로 이름이 바뀌어 온 오늘날의 양산시 소속이었다.

황산강 시절 '구포와 양산'

그러다가 1869년 동래부에 편입됐다가 6년 뒤인 1875년 다시 양산군 소속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 북구와 강서구 대저동은 계속 양산군 좌이면으로 있다 1906년 대저리(동)는 김해군에 편입됐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자 오늘날의 북구는 부산부에 편입됐다가 1914년 동래군 소속이 되고 1963년 부산직할시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생각하면 구포는 그 당시에도 가깝고 오가기 편한 동래에 속하는 것이 옳을 것 같고, 대저 역시 거리가 가까운 김해에 속하는 것이 옳을 것 같은데 그 오랜 날을 양산군 소속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늘날에서 보는 견해고 그 옛날의 지형 지세나 생활양식으로 보면 양산 소속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옛날의 지형 지세를 보려면 양산지역부터 보아야 한다. 양산에서 메기들이라 하는 광대한 양산평야 지대는 옛날에는 양산 주위의 산악지대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모두 모아 낙동강으로 내려보내는 거대한 하천인 황산강(黃山江) 개펄이었다. 지금의 양산시 물금읍 남쪽지역으로, 동면의 석산리 금산리 가산리 호포리의 북쪽지역인 넓은 황무지 개펄에 제방이 생기고 반듯한 농토가 이뤄져 메기들인 양산평야가 생겨난 것은 1920년대의 일이었다.

황산강과 거대한 양산평야

1920년대 이전 황산강 개펄은 비가 오면 홍수로 차오르고 홍수가 나간 뒤는 갈밭천지의 황무지였다. 이 황산강을 옛 지도는, 지금의 양산시 화제지역 낙동강으로부터 양산의 양산천 하류를 거쳐 구포까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는 이 지역 사람 역시 황산강이라 했다.

지금의 양산천 하류가 황산강일 때 그 황산강을 앞으로 하고 뒤로 금정산을 배산으로 한 마을이 지금의 양산시 동면인 '석산·금산·가산·호포'가 된다. 그 동면에 이어진 마을이 지금의 북구가 되는 금곡동 화명동 구포동이다. 그래서 지금의 북구를 옛날에는 양산군 좌이면(左耳面)이라 했다. 좌이면은 산과 강을 같이한 양산의 동면과 동질성을 가진 강마을로 양산의 왼쪽이자 황산강의 왼쪽지역이기 때문이다.

산과 강으로 환경을 같이 하면 생활양식이나 이어온 습속이 같을 뿐 아니라 산과 강을 함께 이용하다 보니 상호간 유대도 긴밀해진다. 그래서 한 갈래 행정구역에 속했을 것이다.

'대저동' 양산군에 속한 사연

대저리(동)가 양산군 좌이면에 속한 사연을 살펴보면, 그 옛날 낙동강은 대저도인 삼각주 섬 위쪽에서 동낙동강(지금의 낙동강 본류)과 서낙동강으로 그 흐름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두 갈래 흐름 가운데 낙동강 제방이 생기기 전에는 서낙동강이 본류가 되어 넓고, 구포 쪽의 동낙동강이 지류처럼 되어 좁아서 대저리는 가까운 구포와 함께 좌이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지난날의 행정구역을 강마을이 가진 생활방식과 편의의 동질성에서 온 것이란 말은 구포와 바로 지척지간에 있는 만덕리를 봐도 알 수 있다. 1740년 편찬된 동래부지는 만덕리를 동래부의 서면(西面)에 넣고 동래부사청에서 12리 떨어져 있다고 했다. 그러나 구포 대저 금곡 화명 등은 동래부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만덕리는 그 이후에도 계속 동래에 속해 있었다. 그것은 만덕리가 강마을이 아닌 산마을이기 때문이었다. 만덕리가 구포면에 속한 것은 1914년의 일이다. 그 동안 좌이면이라 한 면의 이름이 구포면으로 이름이 바뀐 것도 1914년의 일이다.

그러나 구포면이란 이름이 공부상에 오른 때가 1914년이지만 그 이전부터 좌이면은 일반적으로 구포면으로 일컬어졌다. 그것은 1879년 세워진 구포복설비(龜浦復設碑)에서도 알 수 있다.

구포복설비에 얽힌 사연

구포복설비 이야기를 하려면 1869년 양산군 좌이면이 동래부 좌이면이 됐다가 6년 만인 1875년 다시 양산군 좌이면으로 되돌아간 이야기를 해야 한다.

1869년 양산군 소속 좌이면이 동래부 소속이 됐다면 양산군으로서는 빼앗긴 것 같은 섭섭함이 있었을 게다. 그 섭섭함이 불만으로 바뀌어 양산 쪽에서 되돌려 받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고 그에 따른 진정을 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군민들이 모여 의논을 했다. 그 의논은 서울 한양으로 교섭대표가 올라가서 직접 진정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 진정대표로 양산사람 우석규(禹錫奎) 서상로(徐相魯) 이기수(李基洙)가 선출됐다. 이 세 사람은 한양으로 올라가서 정부 관계자를 찾아가 하소도 하고 소장(疏狀)도 내었다.

그러나 받아주지 않았다. 이 세 사람은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 때가 1870년대였다. 각 지방의 봉수대와 함께 한양 남산의 봉수대도 그 기능을 잃고 있었다. 세 사람은 죽음을 각오하고 남산봉수대에서 봉화를 올렸다. 남산에 봉화가 오르자 한동안 소동이 일어나고 불을 지른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잡혔다. 잡혀서는 조정 요인을 직접 만나지 않고서는 봉화를 올린 까닭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마침내 영의정 앞까지 갈 수 있었다.

죽음 각오한 땅 이름 되찾기

영의정 앞에서 세 사람은 조정의 여러 곳에 진정을 해도 받아주지 않아 하소할 기회를 얻기 위해 죽음을 각오한 범행이라 했다. 그러면서 국법을 어긴 중죄에 대한 형벌은 달게 받겠으니 동래부로 옮겨진 좌이면을 본래대로 양산군으로 되돌려 달라 했다. 그렇게 되돌려야 할 이유와 실정을 샅샅이 영의정 앞에서 밝혔다.

자초지정을 들은 영의정은 국법을 어겨도 사사로움이 아니라 대의를 위한 일이라 특별 사면을 할 것이라 했다. 행정구역 환원에 대해서도 일리 있는 일로 바로 조치할 것이니 돌아가서 민심수습이나 잘해 달라했다. 그 결과 1875년 동래부 좌이면은 다시 양산군으로 되돌아갔다.

구포면이 양산군으로 되돌아오자 세 사람은 주위 뜻 있는 사람들과 함께 1879년 12월 그들 고향 가까운 양산군 하북면 용연리 내원사 입구에 '영상대감 이합유원 영세불망비(領相大監李閤裕元永世不忘碑)'를 세우고, 양산군으로 환원 당시 양산군수 어공윤중(魚公允中) 영세불망비와 비석을 세울 때 양산군수 이공능화(李公能華)의 애민선정비를 함께 세웠다.

영의정 은혜 기리는 비석 세워

이때의 영의정 이유원은 1873년 영의정이 됐으니 양산군 대표가 서울로 올라간 것은 1873년에서 75년 사이가 될 것이고, 어윤중이 양산군수로 있은 것은 1874년에서 76년 사이가 되고 이능화가 양산군수로 있은 것은 1878년에서 79년 사이가 된다.

우석규는 양산군 하북면 삼감리 출신이고, 서상로 이기수의 후손들은 현재도 하북면 삼감리와 상북면 좌삼리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앞에 말한 세 비석은 1985년 용연리에서 양산시 교리에 있는 향교 앞으로 자리가 옮겨져 현재도 그 날의 얘깃거리가 되고 있다.

 

-이야기 한마당 '부산 재발견' 끝.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7년 11·12월호
작성일자
2013-10-18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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