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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1568호 기획연재

문화회관, 남천동 KBS 자리에 지으려 했다

제3화 문화시설 짓고 가꿔 문화불모지 오명 벗다⑦

내용

언론사 반대 밀려 지금 자리로
당초 명칭은 '고화문화회관'
무대·음향시설 세계수준 자부

당초 계획대로라면 부산문화회관은 남천동 지금의 부산KBS 자리에 들어서야 했다. 부산시는 그러나 KBS측 반대를 이겨내지 못했고, 지금의 자리로 등짝을 떼밀렸다. 사정은 이렇다. 1980년 초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한나절 만에 부산문화회관 건립계획을 세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의 결재를 받았으나 헤쳐 나갈 일이 태산이었다. 첫 번째 문제가 부지선정이었다. 김부환 당시 부산시 문화재과장은 시장 결재를 받아 기관장 회의를 열었다. 어디에 짓는다 해도 반대하는 사람은 있게 마련일 터이지만, 각계 수장들의 뜻을 모으면 웬만한 반대여론에도 사업 추진이 수월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부산문화회관은 당초 계획대로 라면 남천동 지금의 부산KBS 자리에 들어서야 했다. 하지만 언론사의 반대에 밀려 지금 자리에 지어졌다. 부산문화회관은 건립과정에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부산문화의 자부심으로 우뚝섰다.

회의가 끝나고 언론기관을 포함한 부산의 주요 기관장들을 버스에 태워 부지 예정지 시찰에 나섰다. 답사 결과 부산시 실무진이나 기관장들의 의견은 현 KBS 부산 청사 부지를 압도적 1안으로 꼽았다. 당곡공원 예정지였던 오늘날 부산문화회관 자리는 2안으로 뒤쳐졌다.

지금의 남천동 KBS 자리는 80% 이상이 동명목재 고 강석진 회장의 부인 고고화 여사의 기증재산이라 인근의 일부 부지를 사 보태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간선도로변이라 접근이 용이하고, 지하철 계획선이 지나가는 곳이라 부산시민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하지만 KBS 부산방송국장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KBS부산방송국은 고관입구라 부르던 초량에 있었습니다. 외견상으론 KBS가 남천동에 부산문화회관을 짓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조금 감이 잡혔지요. 아마도 KBS가 미리 자기 방송국 지을 자리로 점찍어 놓고 반대를 했지 않나 싶습니다. 반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지금의 문화회관 자리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대강당의 좌석 수. 1천500석을 적정수준으로 판단해 결재를 받았지만 이번에도 언론사 반대가 극심했다. 신문사 1곳, 방송사 1곳의 반대가 특히 심했다. "시민회관도 1천500석이 넘는데, 왜 시민회관과 비슷한 규모냐, 적어도 3천석은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언론사가 유명공연을 주최할 때 좌석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익이 많이 난다는 것이 훗날 들은 반대의 이유였다.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언론사의 반대를 외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렇지만 저는 버텼습니다. 경영상의 문제를 들이댔지요.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3천석 규모 공연장은 경영적자로 문을 닫는 형편이었습니다. 세종문화회관도 일년에 자리를 다 채우는 공연이 몇 번 되지 않았습니다. 부산시민회관은 객석을 채우는 공연이 일년에 단 한차례도 없어서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보다 못한 시장께서 중재자로 나섰다. 난상토론 끝에 1천700석 규모로 결론을 내렸지만 언론사의 불평을 깨끗하게 무마하지는 못했다. '파출소 비껴가면 지서 나온다'고 한 가지 해결하면, 또 다른 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공사비가 발목을 잡았다. 96억원으로 계획한 예산이 실시설계에서 240억원으로 2.5배가 늘어났다. 급기야 책임문제가 불거졌다. 평소에도 매운 눈으로 쳐다보던 시청 동료 과장, 국장들이 김 과장을 집중공격하면서, 문화회관 건립은 무산문제까지 제기되기 시작했다. 김 과장은 A모 재무국장실에 불려가 자초지종을 보고해야 했다.

"책잡힐 게 없었기에 당당했지요. 나는 건축직이 아니어서 단가산정은 건축직 간부의 자문을 받았다. 결재 과정의 촉박함 때문에 검토할 시간이 부족했고, 당시 120억원 정도의 예산이 들 것으로 판단했지만, 100억원이 넘어가면 시장님 결재를 받기 힘들 것 같아서 96억원으로 축소했다. 부산에 반드시 문화회관이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소신이다. 그 소신으로 저지른 일이니, 책임을 물으려면 물어라. 책임지고 공직을 그만두겠다고 할말을 쏟아냈습니다."

부산시 '내부 소란'은 그쯤에서 마무리됐다. 김부환 씨는 당시만 해도 건물다운 건물이 거의 없던 부산에 문화회관 만은 적어도 부산시민의 자랑이 될 수 있는 건축물로 만들고 싶었다고 당시를 떠올린다. 지금 같으면 국제공모를 했겠으나 당시는 이를 생각하지 못했다. 고민 끝에 만든 최종안은 세종문화회관 설계자인 엄덕문 선생과 르코르뷔지에 문하에서 수학한 김중업 선생. 두 분을 지명설계자로 위촉하고 여론을 감안해 형식상 공모를 병행했다. 그 무렵 부산시는 문화재과와 공보관실을 통합했다. 자연스럽게 문화공보담당관이 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 자리는 다른 간부에게 돌아갔다.

"문화회관 업무에서 손을 떼야 했지요. 그때 인사청탁을 해서라도 제가 문화공보담당관이 되었으면 설계자 지명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지명설계를 위촉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당선되어야 했지만 전혀 엉뚱한 작품이 낙점되고 말았거든요. 만약 두 사람 중 한사람의 작품이 오늘 부산에 남아 있다면, 미학적 측면에서 지금의 부산문화회관 보다는 훨씬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다행이랄까. 김부환 씨는 이재과장으로 자리를 옮겨 문화회관 대강당 공사에 힘을 보탤 수 있었다. 무대와 음향을 한국최고, 세계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시설로 갖추는데 온힘을 보탰다. 준공 후 얼마 되지 않아 러시아의 볼쇼이 무용단이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 섰다.  볼쇼이 상임지휘자로부터 세계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음향과 무대를 갖추었다는 칭찬을 들었을 때는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처음 계획 때 전 재산을 기증할 수밖에 없었던 고고화 여사의 이름을 따 '고화문화회관'으로 하기로 했으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최종 완공단계에서 당초예산의 5배나 되는 450억원으로 늘어나 고 여사의 이름이 빠진 것이다. 당초 계획을 입안한 실무자의 한 사람으로 민망하고 죄송스런 마음이다.

작성자
박재관
작성일자
2013-03-13
자료출처
다이내믹부산
제호

다이내믹부산 제1568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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