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민 생활터전 차근차근 밟아가는 길
피란민 만남의 장소 ‘40계단’ … 우리나라 최초 관측소 ‘부산기상관측소’
임시수용시설 ‘부산주교좌성당’ … 동양척식회사로 출발한 ‘부산근대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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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중구 일대에는 피란민들의 애환이 가득하다. 부산항을 끼고 있는 원도심, 대청로 근처를 통틀어 ‘피란수도지구’라고 한다. 근대역사의 물마루에 섰던 부산 거리에는 문화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이 다채롭게 흩어져 있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목숨을 이어 간다는 것이 또 다른 전쟁이던 시절, 절박하고 고단했던 시간의 무늬가 겨울바람 속에 펄럭인다.40계단 → 40계단문화관 → 부산기상관측소(옛 부산지방기상청) →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 → 부산근대역사관 순서로 돌아보면 피란역사 체험을 보다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 6·25전쟁 피란민들의 ‘만남의 장소’였던 ‘40계단’으로 가는 길에는 그 시절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40계단, 구호물자 내다 팔던 장터
도시철도 1호선 중앙동역 11번 출구에서 40계단으로 가는 길부터 시간 여행은 시작된다. 낡은 철로변 풍경과 나무 전봇대, 군데군데 서 있는 조각상들이 눈에 들어온다. 40계단은 부두에서 흘러들어온 구호물자를 내다 파는 장터로, 피란가족이 상봉하는 ‘만남의 광장’으로 피란민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장소였다. 주위에는 그 당시의 생활상을 형상화한 여러 가지 조각상들이 그 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젖을 물린 채 아이와 걸어가는 어머니, 물을 길어 나르는 소녀들, ‘아버지의 휴식’이란 제목의 낮잠 자는 지게꾼, 계단 중간에는 시련이 닥쳐도 낭만을 잃지 않았던 민족성을 엿볼 수 있는 아코디언 켜는 악사가 있다. 뒤편 음향기기 박스에는 센스가 부착돼 있어 손을 갖다 대면 ‘경상도 아가씨’가 흘러나온다.
40계단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재미난 소라계단이 나온다. 이곳이 ‘40계단문화관’ 입구다. ‘40계단문화관’ 5층 전시관은 개항 이후 근대사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사진 전시물과 부족한 물자로 지혜롭게 살아간 피란민들의 아기자기한 물건들로 가득하다. 가장 인상적인 전시물은 포탄피로 만든 재떨이와 수류탄을 이용해 만든 등잔이었다. 전장에서 터졌으면 아찔했을 포탄과 수류탄이 피란민들에게는 생필품이 됐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 40계단문화관 5층 전시관에는 부족한 물자로 지혜롭게 살아간 피란민들의 아기자기한 물건들로 가득하다(사진은 피란시절 먹거리 모형을 관람하는 시민 모습).
피란시절 생필품 전시 ‘40계단문화관’
엿장수의 커다란 ‘놋쇠가위’, 구호품 밀가루 자루와 최초의 풀빵 굽는 기계, 물을 이고 다닐 때 쓰던 ‘또아리’, 거리의 이발사가 사용하던 ‘바리깡’ 등 저마다 온 힘을 다해 밥벌이를 찾아다니던 배고팠던 날들이 고스란히 저장돼 있다.
마중물을 부어 사용하던 녹슨 펌프, 나무로 만든 물동이, 나무 물지게, 미제 깡통을 이어 붙여 만든 양철 물통도 있다. 시장통의 주요 상거래 품목인 미군 전투식량 씨레이션(C-Ration)·시래기죽·감자밥·호박죽·밀기울·수제비·보리밥·강냉이죽·꿀꿀이죽 등 그 당시의 먹거리를 실감나는 모형음식으로 만들어 놓았다. 또 주판, 군용전화선으로 만든 시장바구니, 말표 흑사탕비누, 남양분유 깡통, 까만 고무신, 화폐 등이 보인다. 전쟁 직후의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노무자의 품삯은 제자리걸음이었던 시절 피란민의 고달픔이 만져진다.
그 밖에 전쟁 속의 학구열을 보여주는 노천 피란학교와 40계단에서 나온 벽돌과 흙이 유리관 속에 전시돼 있다. 연세 지긋하신 해설가 선생님께 ‘경상도 아가씨’를 청하니 흔쾌히 응하신다. 40계단의 설움이 뚝뚝 묻어나는 구성진 목소리다.
피란민에 기상정보 알려주던 ‘부산기상관측소’
‘40계단문화관’에서 10분 남짓 올라간 ‘복병산’ 꼭대기에는 ‘부산기상관측소’가 있다. 올라가는 골목이 모두 ‘중앙동 복병산 벽화거리’다. 다양한 기법의 설치 미술이 흥미롭다. 특히 주방기구를 이용한 재미있는 솟대가 눈길을 끈다. 새롭고 기발한 벽화는 기상관측소 정문 앞까지 이어져 올라가는 내내 전혀 지루하지 않다.
확∼ 트인 복병산 정상, 하늘 가까이에 멋진 배 한 척이 있다. 외관이 선박의 모습을 띄고 있는 ‘부산기상관측소’ 건물이다. 옥탑층과 지붕이 선장실을 연상케 해서 푸른 하늘을 항해하는 듯 보인다. 1904년 임시측후소로 출발해 지금의 자리에 우뚝 선 고풍스러운 건물은 부산시 기념물 제51호. ‘부산기상관측소’ 건축물은 르네상스식 건축기법을 도입해 모양새가 아주 빼어난 부산의 보물인 근대문화유산이다. 도르래를 이용한 수직창 등 내부와 외부의 원형이 잘 보존돼 있고, 현관 입구에는 동백나무 한 그루가 동백꽃 다발처럼 활짝 폈다. 아름드리 백일홍나무는 위풍당당하다. ‘부산기상관측소’는 피란시절 ‘국립중앙관상대’로 기능하며, 매일 매시 날씨정보를 피란민들에게 제공했다.
뜰에는 백엽상을 비롯해 운고, 운량계, 풍향, 풍속계, 강수량계, 기압계 등이 있지만 요즘은 자동관측장비로 풍향과 풍속, 강우량, 기온 등을 재고, 낙뢰관측 장비와 안개관측 장비 등으로 레이저를 쏘아 구름 높이와 구름양을 측정하는 등 5∼6종류의 장비로 기상관측 업무를 보고 있다. 마당의 하얀 계단 아래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증발량관측기가 있다. 예전에는 소형증발계, 대형증발계 두 개로 측정해 왔으며 증발량 관측이 컴퓨터에서 자동으로 입력되기 시작한 날짜는 2016년 7월 이후부터다.
부산기상관측소에서는 부산 도심이 내려다 보인다. 용두산 공원 부산타워를 기준으로 오른쪽은 천마산, 왼쪽은 봉래산, 더 옆으론 장산, 시야가 좋은 날은 남항대교와 그 너머의 대마도까지 보인다. 올 가을쯤 관측소 사무실은 그대로 운영하면서, 기상 전문 역사체험 전시관으로 탈바꿈 할 예정이다.
▲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 전경.
피란민에 따뜻한 위로 주던 ‘부산주교좌성당’
기상관측소에서 큰 도로 쪽으로 내려오면 골목길 끝에 뾰족한 첨탑의 빨간 벽돌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건립된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 건물이다. 6·25전쟁 때 피란민들이 몰려와 살았던 피란민 임시수용시설로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이 새겨진 건물이기도 하다. 보기 드물게 근대 종교건축물이 잘 보존된 탓에 건축사적 중요성도 지니고 있다. 내부 구조는 전반적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천장은 전체적으로 반원 형태를 띄고 있다. 제단과 마주보는 벽의 상부에는 나무로 만든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제단 아치의 석재 장식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건물은 화강석과 붉은 벽돌로 지은 로마네스크양식이며 종탑에는 1951년 제작된 종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근대종교의 변천사를 담고 있어 부산 근대사에도 큰 의미가 있는 건축 유산이지만 무엇보다 기댈 곳 없던 피란민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됐던 공간이라 더욱 정겹다. 머릿돌이 차분하게 역사를 증명한다. 성당으로 가는 대청동 골목은 시간이 흐르다 멈추고,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흘러가는 매력적인 길이다.
▲ ‘부산근대역사관’은 근현대사 유물 200여점과 영상물을 전시하고 있어 부산 근대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사진은 실물과 똑같은 모형으로 축소 제작한 ‘1930년대 부산 대청동 거리’).
부산 근현대사 한 자리에 ‘부산근대역사관’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부산근대역사관’이다. 도로 하나를 두고 이쪽과 저쪽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대청로 골목길이 거꾸로 가는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부산근대역사관’ 거리는 현대적인 활기로 북적거린다.
부산근대역사관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지어진 건물이다. 처음에는 식민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사용됐고, 광복 후에는 미국 해외공보처 부산문화원이 됐다. 이후 미문화원이 철수하고 정부로 반환된 것을 부산시가 인수했다. 이 역사적인 건물이 침략의 상징이었던 만큼 후대에 아픈 역사를 알릴 수 있는 교육의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3년 ‘부산근대역사관’으로 꾸며 개관했다. ‘부산근대역사관’에서는 부산근대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부산 근현대사 유물 200여점과 영상물, 그리고 입체적인 전시가 매우 자세하다. 1층에는 영상실과 근대 자료실, 정보 검색실과 휴게 공간이 있고, 2층 제1전시실에는 근대부산의 번화가에서 영업하고 있던 가게를 실물과 똑같은 모형으로 축소 제작해 놓았다. 제목은 ‘1930년대 부산 대청동 거리’. 대청동은 부산의 중심이자 일본인들의 거류지로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과 금융기관, 병원, 주류점, 가구점, 일본식 과자점, 세탁소, 미곡판매소, 정미소와 출판사 등이 있었으나 대부분 일본인이 경영했다. ‘동래-운동장’이라는 노선표를 단 전차를 타고 영상물로 구경하는 부산은 진짜 전차를 탄 듯 실감난다. 모형으로 된 거리의 맨 끝에는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던 ‘관부연락선’ 그림이 커다랗게 정박해 있다. 그 앞에 ‘포토존’을 설치했다.
부산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가장 부산다운 ‘피란수도지구’를 천천히 걸으며 부산의 깊은 숨결을 느껴 보길 바란다. 삶과 역사가 함께하는 매력적인 부산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었다가 새봄을 맞이한다면 봄이 달리 보일 것이다.
40계단문화관
•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5시
• 이용요금 : 무료
• 주소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길 49
• 찾아가는 길 : 도시철도 1호선 중앙동역 하차 13번·15번 출구에서 도보 5분
부산근대역사관
• 관람시간 : 평일 및 일요일 오전 9시∼오후 6시
토요일·매월 마지막 수요일 오전 9시∼오후 8시
• 이용요금 : 무료
• 주소 :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로 104
• 찾아가는 길 : 도시철도 1호선 중앙동역 하차 5번·7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 작성자
- 이영옥
- 작성일자
- 2017-02-01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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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라좋다 제2월호 통권 124호 부산이야기호
-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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