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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제201910호 문화관광

"유신철폐! 독재타도!" 울려 퍼진 함성 온 부산이 '민주화의 성지'

부산대학교에서 남포동까지 부마민주항쟁, 그날의 현장을 걷다

내용

#씬 1
1979년 10월 15일 밤, 남구 우암동 우암초등학교 뒤편 주택가 골목.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시계의 시침 소리는 불안했다. 밤 11시 50분, 11시 55분, 59분. 땡, 땡, 땡. 괘종시계가 열 두 번을 쳤다. 종소리와 함께 어두운 골목길에는 급박한 사이렌이 울렸다. 통행금지를 알리는 소리였다. 가을색이 완연한 밤거리로, 막 연탄재가 쌓이기 시작한 주택가 골목으로,  거리를 나뒹구는 마른 낙엽 위로 고막을 찢는 불안한 사이렌 소리가 쏟아졌다.
사이렌 소리에 정광민은 흠칫 움츠렸다.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광민은 단단히 쳐둔 커튼을 조심스럽게 걷어 올린 후 바깥을 내다보았다. 인적이 끊긴 어두운 골목이 낯설었다. 통행금지 사이렌은 토끼몰이하듯 사람들을 어딘가로 몰아넣었는지 사방이 괴괴했다. 자발머리없는 개들만 컹컹 짖어댈 뿐이었다.


부마민주항쟁 부산대학생 가두진출 

- 출처 및 제공 : 국제신문

부마민주항쟁 당시 온천장으로 나오는 부산대학교 학생들.


"야, 개안나?"
친구 도걸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걸의 손에는 시커먼 잉크가 잔뜩 묻어있는 롤러가 들려져 있었다. 도걸의 손과 얼굴에도 까만 잉크가 묻어 있었다. 친구의 얼굴에 묻어있는 잉크가 방금 내다본 바깥의 어둠처럼 짙었다.
"어, 개안타."
"……."
"마저 하자."
두 사람은 묵묵하게 등사기를 밀었다. 서로 말은 안했지만, 광민도 도걸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공에 대한 의구심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등사기를 미는 손이 떨렸다. 그러나 이미 시작한 일, 물러설 수 없었다. 광민은 절박했다. 점점 세상은 겨울공화국으로 얼어붙고 있었다. 죄 없는 사람들이 이유 없이 잡혀 갔고, 무시로 불심검문을 당했다. 언로는 막혔고, 감시의 눈길은 살벌했다. 파시즘의 광기가 민주주의를 말살시키고 있었다.

정광민 이사장이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된 당시 부산대학교 인문사회관 앞에서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정광민 이사장이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된 당시 부산대학교 인문사회관 앞에서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부산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2학년 정광민, 전도걸, 박준석은 10월 15일 밤 열시쯤 광민의 집으로 왔다. 가방 안에는 친구 전증욱이 빌려준 등사기, 초등학교 교사였던 전도걸의 부친이 사용하던 시험출제용 줄판이 들어 있었다. 하늘이 돕는 것인지 마침 광민의 부모님은 집을 비운 참이었다. 세 청년은 민주주의의 말살을 더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누군가 말해야 한다고 결심한 정광민이 친구들을 설득했다. 광민과 친구들은 수업시간에 항거를 다짐하는 유인물을 뿌리기로 결의했다. 유신독재를 무너뜨렸던 부마민주항쟁의 불꽃이 막 점화된 순간이었다. 청년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혁명의 불씨가 될 것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집에 일이 있었던 준석이 돌아간 후 광민과 도걸은 10월 16일 새벽 세 시까지 등사기를 밀었다. 다락방에는 시커먼 갱지에 등사기로 민 유인물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거친 솜씨로 뜨거운 입김을 불어가며 두 청년이 밤새 만든 유인물에는 시커먼 글씨가 붉은 심장으로 씌어 있었다. 마침내 역사적인 아침이 밝았다.


#씬 2
정광민은 며칠 밤을 새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선언문을 들고 학교로 갔다. 친구인 경영학과 2학년 엄태언을 만나 함께 유인물을 뿌리기로 약속해 두었다.
정광민은 학생운동조직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런 그가 부마민주항쟁이라는 거대한 물살을 일으킨 주인공이라는 건 부산과 부산대학교라는 특수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부마민주항쟁의 주역이었던 정광민은 현재 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정광민 이사장의 증언이다.
"당시 부산대학교는 유신대학이라고 불렸습니다. 참 모욕적인 별칭이었지요. 겉으로는 그랬을지 몰라도 안은 전혀 달랐습니다. 유신이라는 현실적인 공포 때문에 말은 못했지만, 속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지요. 민주주의가 죽어가는 데 청년학생들이 어떻게 모른척 할 수 있었겠습니까."
시민과 학생들의 내면에서 불타오르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독재에 대한 저항이 부마민주항쟁을 필연적으로 잉태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10월 16일 오전 9시 30분, 정광민은 밤새 등사한 유인물을 들고 인문사회관 306호로, 엄태언은 206호로 향했다. 정광민은 학우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며 일성을 터뜨렸다.
"학우 여러분! 민주주의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지킵시다. 유신철폐! 독재타도!"


#씬 3
부마민주항쟁의 방아쇠는 단숨에 어둠을 불살랐다. 유신독재에 분노한 학생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시위대를 만들었고, 스크럼을 짜고, 학교 안을 돌며 학생들을 모아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앞에서의 2차 선언문 낭독 후 시위대는 5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거대한 산사태처럼 불어난 시위대는 거리로 나서기로 결정했다. 교문 앞에는 완전무장한 경찰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하게 몸을 불린 시위대는 사대부고 담장을 허물고 교문 밖으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거리로 나간 학생들은 경찰의 눈을 피해 집결지로 모였다. 온천장을 지나 서면, 부산역, 남포동을 향해 스크럼을 짜고 행진했다. 경찰이 나타나면 흩어졌다. 시위대는 멈추지 않았다. 점조직으로, 산발적으로 흩어진 후 거짓말처럼 집결지에서 거대한 시위대로 하나가 됐다. 서면에서, 문현교차로에서, 부산역에서, 마침내 남포동에 도착했다. 옛 부영극장 앞 도로를 점거한 시위대는 이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 있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위대의 최종 목적지였던 옛 부영극장 자리.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위대의 최종 목적지였던 옛 부영극장 자리.



학생들이 시작한 시위는 중앙대로를 따라 진격해오면서 시민들이 가세했다. 넥타이를 멘 직장인, 구두닦이, 고물상, 노점상, 자영업자 등 평범한 시민들이 함께 했다. 시위의 중심이 학생에서 시민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랜 독재에 억압받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구호를 외쳤다. "유신철폐, 독재타도!" 함성은 컸고, 부산을 흔들었다. 뒤늦게 경찰이 진압을 시도했다. 곤봉이 날아가고, 시위대의 머리가 터지고, 최루탄의 매캐한 연기가 온 거리를 뒤덮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유신독재를 허물기 위해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인문사회관 306호에서 쏘아 올려진 "유신철폐! 독재타도!" 구호는 단 하룻만에 부산 전역을 뒤덮었다. 시위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부산대학교에서 데모가 시작됐다는 소문은 삐라처럼 번져나갔다. 부산이 요동쳤다. 숨죽였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넥타이를 풀고, 구둣통을 들고, 책가방과 핸드백을 메고 거리로 나왔고, 독재타도의 거대한 물결에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부마민주항쟁의 첫 날이었다.



#씬 4
솟아오른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시위는 다음날인 10월 17일에도 이어졌다. 그날 저녁 시민들이 대거 합세하면서 시위가 지속적으로 확산됐다. 무자비한 진압에 분노한 시위대는 충무파출소·한국방송공사(KBS)·서구청·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했다. 시위 진압에 투입된 경찰차량에는 불이 붙었다. 즉각 유신정권의 탄압이 시작됐다.


옛 부산시청 인근 중앙대로.

옛 부산시청 인근 중앙대로. 당시 중앙대로는 시위의 중심이자 시위대의 광장이었다.


1979년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즉시 계엄군이 투입돼,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긴급조치 9호 및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시위를 주도했던 정광민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부산대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계엄령이 내리면서 부산에서의 시위는 강제로 진압됐다. 그러나 유신독재 타도를 외치는 함성은 부산을 건너 경남으로 옮겨 불붙었다.
1979년 10월 19일 마산 지역에서 마산대학교와 경남대학교에서 시위가 시작됐다. 학생과 시민들은 민주공화당사·파출소·방송국을 습격하며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 발발 하룻만인 10월 20일 마산에 위수령이 선포됐다. 부산에서 시작돼 마산으로 이어진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민주시민들의 시위는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강제 진압되는 듯했다. 그러나 부산과 마산에서 방아쇠를 당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꺼지지 않았다. 부산에서 첫 시위가 일어난 열흘 후 김재규의 총탄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 유신독재는 종말을 맞았다.



#씬 5
부마민주항쟁은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정광민이 불꽃을 지폈고, 350만 부산시민이 꽃피운 시민혁명이었다.
정광민 이사장은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기억과 감격이 생생하다.
"부마민주항쟁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사에서 획기적인 시위 방식을 보여주었던 항쟁이었습니다. 당시 주한미대사관이 본국 정부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부산대학교에서 부영극장 앞까지 15마일 거리를 하루만에 도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온갖 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하루에 15마일을 진출했다는 건 전무후무한 기록입니다. 어떤 민주화운동도 그 긴 거리를 이동해서 본격 시위를 이룬 경우는 없었습니다."
엄혹한 상황에서도 해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는 게 부마민주항쟁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정 이사장은 거듭 강조한다. 시민과 학생들은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도 비폭력 평화시위를 지켜냈다는 것이다.


부산대학교~온천장~서면~문현교차로~부산역~남포동 옛 부영극장 앞 도로는 부산을 관통하는 중심도로다. 이 길을 따라 "유신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부마민주항쟁은 부산의 동맥을 따라 불타올랐던 시민항쟁이었다. 40년 전 민주주주의 꽃을 피웠던 부산의 거리는 옛 기억을 가슴으로만 품고 있을 뿐 지난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세월의 변화에 따라 시들었고, 개발의 바람에 휩쓸려갔다. 그러나 공간은 기억을 간직하는 법, 부마민주항쟁의 함성을 되살리고 불씨를 지펴야 하는 몫은 여전하다.
"부산의 거리는 민주화의 성지가 아닌 곳이 없습니다. 그 중심에 중앙대로가 있고요. 중앙대로를 따라 적당한 곳에 부마민주항쟁 기념관을 건립해야 합니다. 부산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낸 위대한 민주화의 성지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게 중요합니다."


                                                                                                                                 글 김영주/사진 권성훈





작성자
김영주
작성일자
2019-09-27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 제201910호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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