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 건강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특권
닥터B의 의학칼럼 / 헌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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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보다 헌혈을 해본 사람이 적다는 점에 놀란다. 헌혈을 아직 안해본 사람 중에는 아직 기회가 없었거나 헌혈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헌혈에 대해 오해하고 거부감을 가진 사람도 많다. 헌혈과 수혈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면 이런 거부감은 줄어들 것이다.
1901년 ABO혈액형 발견, 수혈·헌혈 발전
헌혈은 자신의 혈액을 다른 사람에게 기증하기 위해 피를 뽑는 행위를 말한다. 반대로 수혈은 헌혈 받은 혈액을 환자에 주는 의료행위다. 이러한 헌혈과 수혈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수혈은 1667년 프랑스에서 양의 피를 15세 소년에게 주입한 사례이다. 하지만 사람의 피를 수혈하는 방법은 훨씬 뒤인 1818년에야 영국에서 처음 시도됐다. 이때는 아직 혈액형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결과는 정말 복불복이었다. 운이 좋아 적합한 혈액을 받은 환자는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거나 심한 부작용을 경험해야 했다. 또 당시는 위생이나 감염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여서 환자는 물론이고 피를 공여하는 헌혈자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했다. 수혈요법은 이와 같은 심각한 부작용 때문에 긴 세월동안 별다른 발전이 없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 한줄기 서광이 비친 건 혈액형의 발견이었다. 1901년 오스트리아인 칼 란트슈타이너가 처음으로 ABO 혈액형을 발견하면서 혈액형과 수혈의 비밀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란트슈타이너는 이 공로로 1930년 노벨상을 수상한다. 혹자는 이 발견이 수많은 노벨상 수상 업적 중에서도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업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혈액형의 발견이 후대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본다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수혈에 필수적인 혈액형 발견이 없었다면 '과다출혈은 곧 사망'이라는 절망의 공식이 현재도 유효할 것이며, 수술이나 출산이 현재와 같이 안전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헌혈제도 도입 40년 … 개인헌혈 절대 부족
이렇듯 중요한 수혈용 혈액을 얻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금전적 보상을 주고 피를 받는 매혈과 대가없이 피를 기증받는 헌혈이다. 지금 우리는 헌혈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우리나라도 법에 의해 금지되기 이전인 1970년대 중반까지는 매혈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매혈 제도도 나름의 장점이 있긴 하지만 소설 '허삼관 매혈기'에서 묘사된 것처럼 혈액 공여자의 건강보호라는 측면에서 큰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돈에 유인돼 안전하지 않은 혈액이 유통될 가능성이 있다는 단점이 있다. 아직까지 매혈제도가 남아 있는 나라도 있지만 세계적으로도 매혈보단 헌혈이 대세다.
우리나라에 헌혈 제도가 도입된 지 40여 년이 지났고 그동안 많은 발전이 있었다. 우리나라 헌혈의 상당수는 학교나 군대 등의 단체헌혈이 차지하고 있다. 미국 등 선진국의 경우 개인헌혈이 대부분인 것과 대조적이다. 단체헌혈은 손쉽게 대량의 혈액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나 헌혈자 관리에 소홀하기 쉽고 군중심리에 의해 헌혈이 이루어지게 돼 위험성이 있는 혈액이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다른 중요한 문제는 헌혈자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헌혈증서와 영화예매권 등 각종 물품이 제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타인을 위한 헌신인 헌혈이라는 대의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혈액 값을 높이는 요인이지만, 헌혈자 확보를 위해서 아직까지는 이런 유인책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헌혈, 질병감염 걱정 없어 안전
헌혈에 대해 흔히 하는 오해 중에 하나는 헌혈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과 헌혈에 대한 얘기를 하다보면 헌혈하다 에이즈(AIDS)에 감염되지 않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아마도 헌혈과 수혈을 혼동하지 않았을까 한다. 주사침, 혈액주머니 등 헌혈 과정에 사용하는 물품은 대부분 일회용이므로 에이즈 같은 감염성 질병에 걸릴 우려는 전혀 없다. 안심해도 좋다. 다만, 헌혈 직후에는 어지러운 증상이 생길 수 있으므로 헌혈하고 바로 작업이나 운동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헌혈은 위험이 거의 없는 반면 수혈은 조금 얘기가 다르다. 일단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혈액이기 때문에 드물지만 거부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또한 B형 간염, C형 간염, 에이즈(AIDS), 말라리아 등 수혈로 전파되는 다양한 질병이 있으며, 확률은 아주 낮지만 이러한 수혈전파성 질병이 수혈로 인해 감염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몇 년 전에 수혈로 인한 감염이 발생하여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된 적이 있었고, 그 사건으로 헌혈 등 혈액사업 전반에 대한 사회적 불신이 가중된 적이 있다. 국민들이 헌혈과 수혈을 기피하는 원인 중에는 이런 불신도 크다. 그러나 수혈이 꼭 필요한 데도 이런 불신, 불안감 때문에 수혈을 거부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의료진이 수혈을 결정할 때는 수혈의 위험성보다 수혈로 얻는 환자의 이익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수혈 안전성 확보와 헌혈·수혈 등 혈액사업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을 해소하는 데 정부와 혈액원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이를 믿고 수혈에 관한한 의료진의 판단에 따를 것을권한다.
생명 살릴 수 있는 가장 편한 봉사활동
이렇게 수혈에 어쩔 수 없는 위험이 있다면 혈액을 다른 안전한 물질로 대체할 수는 없을까?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부정적이다. 헌혈에서 수혈까지 과정은 여러 단계를 거치며 비용이 많이 드는 과정이며, 앞서 얘기한 대로 감염 등 필연적인 위험성을 동반하고 있다. 때문에 혈액을 대체할 수 있는 물질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까지 헌혈을 통해 얻은 혈액을 대체할 수 있을 만한 만족스러운 물질은 없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약물과는 달리 아직까지 혈액은 헌혈자가 기증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자원이다. 그렇기에 헌혈의 소중함이 더해진다고 볼 수 있다.
필자도 많이 해봤지만, 잠깐의 아픔만 감내한다면 헌혈은 가장 편한 봉사활동 중 하나다.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서 10분 정도 주먹을 쥐었다 펴기만 하면 된다. 이렇듯 헌혈은 가장 편하고 쉽게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인 반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감기만 걸려도, 약간의 빈혈만 있어도 헌혈은 할 수 없다. 헌혈은 건강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기회가 된다면 여러분도 가까운 헌혈의 집에 들러 헌혈할 특권을 누려보시기를 권한다.
- 작성자
- 글 박철민/동남권원자력의학원 진단검사의학과장
- 작성일자
- 2015-06-15
- 자료출처
-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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