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근대역사관
#3. 사람 이야기 첫 번째: 쇳소리가 멈춘 자리, 동화가 말을 걸다


영도는 오랜 시간 축적된 소리와 기억이 겹겹이 쌓여 있는 섬입니다.
거대한 선박을 두드리던 ‘깡깡깡’의 리듬 속에는
산업화의 거센 흐름과 그 안을 살아낸 사람들의 노동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좁은 골목마다 남아 있는 발자국에는 누군가의 하루, 누군가의 생이 조용히 스며 있습니다.
이번 웹진 8호에서는 그 오래된 기억을 그림책과 소설이라는 서로 다른 언어로 되살려낸 두 작가,
그림책 〈깡깡깡〉의 이영아 작가, 그리고 소설 〈깡깡이〉의 한정기 작가를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사라져간 풍경과 여성 노동의 흔적을 그림 속에 온전히 기록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소설로 다시 불러내어 상처를 감싸고 기억을 치유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다른 형식이지만 두 작가의 작업은 영도라는 장소가 품고 있는 목소리들을 다시 우리의 시간 앞으로 데려와
세대와 세대를 잇는 ‘기억의 책’을 만들어냅니다.
이 인터뷰를 통해 영도의 숨결과 삶을 이루어온 여성들의 이야기,
그리고 잊히지 않기 위해 기록하고 창작하는 마음을 차분히 따라가 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동화·그림책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영아입니다.
어린이 책에 그림을 그리던 것이 동화를 쓰는 계기가 되었고, 동화를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림책 작업으로 이어졌습니다.
동화는 주로 제 어린 시절 기억과 경험에서 출발했고, 그림책은 제가 살고 있는 부산의 풍경과 부산 사람들의 삶을 바탕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저는 중심보다 주변을, 큰 목소리보다 작고 섬세한 이야기들을 오래 들여다보며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전에 부산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을 배경으로 한 그림책 〈할아버지 집에는 귀신이 산다〉를 작업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부산을 배경으로 한 그림책을 계속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부산을 소재로 한 그림책은 생각보다 많지 않더라고요.
부산 시민으로서 지역의 정체성과 삶의 흔적을 담고 싶었고, 그 두 번째 작업이 바로 〈깡깡깡〉입니다.
깡깡이 마을은 항구 도시 부산의 특성과 부산 사람들의 억척스러운 삶이 고스란히 담긴 공간입니다.
무엇보다 깡깡이 아지매들의 매력에 끌렸고, 사라져가는 산업화 유산을 기록하는 일이 의미 있다고 느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깡깡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지매의 하루를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책에는 세 명의 화자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깡깡이 마을의 역사와 공간, 두 번째는 깡깡이 아지매의 노동 그리고 마지막 세 번쨰는 깡깡이 아지매를 엄마로 둔 아이의 마음 이 세 시선이 겹쳐지며 이야기가 흐릅니다.
그게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림책에서는 소리를 이미지로 구현해야 하니까요.
책을 덮었을 때 ‘깡깡깡’이라는 소리가 독자의 귀에 남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작업했습니다.
이 소리는 단순한 의성어가 아니라 깡깡이 마을의 정체성과 리듬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그림책의 중심 축이 되었습니다.
2018년 작업을 시작한 이후로 답사를 정말 많이 다녔습니다.
이야기가 막히면 다시 가보고, 풍경이 흐려질 것 같으면 또 가고.
당시 깡깡이 마을과 관련된 문화사업이 활발해 자료도 풍부했고,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이 공간이 너무 낯설게 느껴지지 않도록 그림의 스타일에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답사를 다니며 저조차도 “이곳은 부산 안의 또 다른 세계 같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특별한 공간이라는 인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숨겨진 이야기나 기록되지 않은 장면들을 그림 속에 조심스레 담아두기도 했습니다.
그림책의 가장 큰 매력은 텍스트에 없는 이야기가 그림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깡깡이 아지매들을 인터뷰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분들의 자긍심이었습니다.
배 하나를 온전히 고쳐냈을 때의 뿌듯함, 그 일을 통해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가정을 일구었다는 이야기.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자부심이었습니다.
또, 그림 속에는 아이들이 깡깡이 작업장 주변에서 놀던 장면들이 숨어 있는데 이 역시 실제 자녀분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녹과 쇳조각 때문에 늘 빨개져 있던 엄마의 눈을 떠올리며, 그 곁에서 자라던 아이들의 마음까지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정답을 정해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림책은 아이, 부모, 주민 등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니까요.
다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사라져가는 부산의 지역 유산을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그림책을 통해 기억이 되살아나고, 어른의 기억이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지길 바랍니다.
산업화 시대를 살아낸 분들의 헌신과 깡깡이 마을이 지닌 가치를 많은 분들이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깡깡깡〉이라는 제목에는 세 겹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깡깡깡’은 영도를 떠올리게 하는 소리이자, 조선소와 선박 수리 현장에서 울려 퍼지던 노동의 리듬입니다. 이 소리는 영도가 어떤 공간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시간을 견뎌온 곳인지를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정체성의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깡’이라는 단어가 지닌 정서적 의미입니다. 흔히 ‘깡다구’라고 표현되는 억척스러움, 쉽게 무너지지 않는 태도, 삶을 버텨내는 힘은 영도의 여성들, 특히 깡깡이 아지매들의 삶을 관통하는 정서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단어 안에 담긴 생활의 의지와 강인함이 작품의 중요한 정조를 이룬다고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작품 속에는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지닌 세 명의 깡깡이 아지매가 등장합니다. 제목의 세 번 반복되는 ‘깡’은 이 세 인물을 상징하는 동시에, 각자의 삶이 만들어낸 리듬이 겹쳐지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깡깡깡〉은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작품입니다. 소리로서의 ‘깡’, 태도로서의 ‘깡’, 그리고 인물로서의 ‘깡’이 겹겹이 쌓이며 만들어진 이야기이자, 영도라는 공간과 그곳을 살아낸 사람들의 시간을 함께 담아낸 제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새로운 그림책을 준비 중입니다. 이번 작업 역시 부산을 배경으로 하되, 잘 알려진 장소보다는 그동안 덜 조명되었던 주변부의 목소리와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앞으로도 부산이라는 지역을 오래 바라보며, 그 안에 쌓여 있는 삶의 장면들을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기록해 나가고 싶습니다.

깡깡이 아지매의 손끝에서 울리던 노동의 소리는 한 사람의 하루를 넘어서 한 시대의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자란 소녀는, 오래 뒤 그 기억을 소설로 다시 불러냈습니다.
이제 그림에서 열렸던 영도의 풍경을 뒤이어, 또 다른 언어로 되살아난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안녕하세요. 소설을 쓰고 있는 한정기입니다. 일상의 작은 장면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를 오래 써 왔고,
특히 어린 시절의 기억과 장소가 가진 힘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플루토 비밀결사대〉 시리즈로 많은 어린이 독자들과 만나왔으며, 소설 〈깡깡이〉에서는 제가 실제로 사춘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부산 영도 대평동의 시간과 풍경을 다시 불러내고 싶었습니다.
그 시절의 공기, 노동의 무게, 서로에게 기대며 살던 마음을 오늘의 독자들과 나누고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살았던 곳이 바로 깡깡이 마을이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영도 대평동 2가 143번지, 개미굴처럼 이어진 다섯 집의 풍경은
제 사춘기 그 자체였습니다. 소설의 배경을 그곳으로 선택한 것은 제 경험에 역사적 이야기를 더해 쓴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생생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1967년 영도로 이사 왔습니다.
전차 종점이 있던 적산가옥 2층 다락방에서 살았고, 1968년 전차 운행이 종료되기 전까지 약 1년 정도 전차를 보며 지냈습니다.
그 시기는 매우 가난했지만 주변 친구들 모두 비슷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상대적 빈곤감은 크게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역시 여동생 둘, 남동생 둘을 둔 장녀였습니다.
아버지는 송출선원으로 집을 자주 비우셨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집안 살림은 자연스럽게 제 몫이 되었습니다.
동생들을 먼저 챙기며 살았고, 부모님께 어리광 한 번 부릴 수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의지가 제게 많이 닿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당신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라는 지인의 말이 큰 힘이 되었고, 억척스럽게 견뎠던 어린 시절의 나를 다시 불러내어 조용히 쓰다듬는 마음으로 〈깡깡이〉를 쓰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사춘기를 보낸 지금의 부모 세대는 저처럼 장녀·장남으로 살아온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에게는 잊힌 공간과 사람들, 그리고 잊힌 시간들에 대한 향수를 다시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랐습니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치유하는 작은 계기가 된다면 더 좋겠죠.
반면 지금의 청소년에게 ‘가족’은 매우 개인화된 개념입니다.
같은 집에 살아도 각자 휴대폰을 보며 따로 존재하는 시대니까요.
그런 아이들에게 형제들이 부딪치고, 언니가 동생을 보살피고, 동생이 언니를 따르던 시절의 풍경을 통해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끈끈함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어머니가 어린 동우를 업고 깡깡이 일을 하던 장면입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생명을 키워낸 어머니들의 강인함을 담고 싶었습니다.
또 “재첩국 사이소”라는 문장은 그 시대 사람들의 애환과 삶의 냄새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저에게도 깊이 남아 있는 문장입니다.
〈깡깡이〉는 한편으로는 산업화 시기의 생생한 삶을 들려주는 이야기이고, 또 한편으로는 가난하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수고했다, 잘 버텼다”라고 말해주는 위로의 책입니다.

저의 이야기가 지금 시대의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늘 고민합니다.
책을 잘 읽지 않는 시대라 회의감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씁니다. “세상에는 이런 삶도 있었다”는 것을 한 사람이라도 더 알 수 있도록, 제 숙명이라 생각하며 묵묵히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골목을 지나오며, 문득 영도의 오래된 소리들이 다시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배를 두드리던 ‘깡깡깡’의 리듬, 바람에 스치는 파도 냄새, 그리고 그 속에서 묵묵히 하루를 이어가던 여성들의 단단한 숨결까지
두 작가의 이야기는 시간이 먼 곳으로 밀어냈던 기억들을 다시 현재로 불러와 우리 곁에 잔잔히 놓아주었습니다.

그림과 소설이라는 서로 다른 문학의 언어는 영도의 풍경과 사람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품어 안으며
결국 하나의 길처럼 만나 ‘기억의 책’을 완성했습니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붙잡고, 잊힐 수 있는 삶들을 다시 빛으로 데려오는 일, 두 작가가 건넨 문장과 그림은 그 조용한 역할을
한결 자연스럽고 깊은 마음으로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읽는 모든 분들께서 영도의 시간 속 고요히 쌓여 있던 숨결과 이야기를
자신의 하루 속 작은 빛처럼 간직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또 다른 이야기로, 또 다른 마음으로 이어지기를 살며시 바라며, 인터뷰를 마칩니다.